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牛馬처럼 걷는 강원 여행

(강원) 단종 유배지 영월 청령포(寧越 淸泠浦)

영월 청령포(寧越 淸泠浦)

 

언제 : 2010. 5. 14.금요일

 

5월도 딱 중순이다.

5월 13일 밤,

같은 직장에서 퇴직한 박 HY, 정 BM 선배와 술 한잔을 하였다. 두 분은 객지에서 만났지만

연륜처럼 정겹고 배려하는 마음이 남다르다.

귀갓길에 문득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나의 여정에서 지금 어디쯤 서 있는가?

 

궁금하면 나는 길을 나선다.

길을 나선다는 것은 통로를 뚫는다는 것이다.

 

5월 14일, 날 좋은 날이다.

강원도 영월 단종 유배지인 청령포와 장릉 그리고 단종의 유적지를 다녀오기로 하고  아침 6시에 배낭을 메고 집을 나섰다.

인천 버스터미널에서 07:30 영월행 버스에 올라 10:30 영월에 도착.

먼저

단종의 유배지인 청령포로 향했다.

 

 

 

청령포는 영월군 남면 광천리 남한강 상류에 위치한 단종의 유배지로 2008년 12월 국가지정 명승50호로 지정되었다.

 

조선 제6대 왕인 단종이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찬탈당하고 상왕으로 있다가 그 다음 해인 1446년 성삼문 등 사육신들의 상왕복위의 움직임이 사전에 누설됨으로써 상왕은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중추부사 노득해가 거느리는 군졸 50인의 호위를 받으며 원주, 주천을 거쳐 이곳 청령포에 유배되었다.

청령포는 동, 남, 북 삼면이 물로 둘러싸이고 서쪽으로는 육육봉이라 불리는 험준한 암벽이 솟아있어 나룻배를 이용하지 않고는 밖으로 출입할 수없는 마치 섬과도 같은 곳이다.

단종은 이 적막한 곳에서 외부와 두절된 유배생활을 했으며, 당시에는 이곳에 거처할 수 있는 집이 있어 호장 엄흥도는 남몰래 밤이면 이곳을 찾아 문안을 드렸다고 전한다. 그 해 뜻밖의 큰 홍수로 강물이 범람하여 청령포가 물에 잠기게 되니 단종은 영월 동헌의 객사로 처소를 옮겼다.

 지금 청령포에는 단종 유배시에 세운 금표비(禁標碑)와 영조때 세운 단묘유지비(端廟遺址碑)가 서 있어 옛일을 전하고 있다. 또한 망향탑, 노산대, 관음송이 있다.  

 

청령포와 육육봉 전경

단종어가 

2000년 4월5일 단종문화제와 때를 맞춰 건립된 단종어가는 승정원일지의 기록에 따라 기와집으로 그 당시의 모습을 나름대로 재연했다.
어가에는 당시 단종이 머물던 본 채와 궁녀 및 관노들이 기거하던 사랑채가 있으며 밀납인형으로 당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어가 담장 안에 유지비각이 위치해 있다.
이 어가는 어가 또는 적소라는 명칭에 대한 논란과 주거형태, 어가의 위치 등 여러 가지 문제로 한동안 논란을 겪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그러나 승정원일지의 기록에 따라 기와집으로 재현했다.

어가에는 당시 단종이 머물던 본 채와 궁녀 및 관노들이 기거하던 사랑채가 있으며, 밀납인형으로 당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어가 담장 안에 유지비각이 위치해 있다. 

 

단종 임금을 정면으로 알현하지 못한 조선시대 선비. 

 

 

 

단종에게 절 하는 소나무

관음송(觀音松)

청령포수림지 한가운데 수령 600년의 소나무로 우리나라에서 자라고있는 소나무 가운데 가장 키가 큰 소나무로 천연기념물 제349호이다. 

 

단종이 유배생활을 할 때는 두 갈래로 갈라진 이 소나무에 걸터앉아 쉬었다는 전설이 있다. 또한 단종의 유배 당시 모습을 보았으며(觀), 때로는 오열하는 소리를 들었다(音)는 뜻에서 관음송(觀音松)이라 불리어 왔다.

 

소나무 크기는 높이 30m, 가슴높이의 둘레 5m로 지상에서 두 갈래로 갈라져 동,서로 비스듬히 자랐다. 갈라진 줄기의 밑둘레는 3.3m, 남북 20m로 가지를 펼치고 있다. 수령은 600년으로 보고 있는데, 이는 단종 유배시의 수령을 80년으로 하여 계산된 것이다.

망향탑

청령포 뒷산 층암절벽 위에 있는 탑으로 단종대왕이 유배생활을 할 때, 자신의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근심 속에서도 한양에 두고 온 왕비 송씨를 생각하며 여기저기 흘어져 있는 막돌을 주워 쌓아 올렸다는 탑으로 단종이 남긴 유일한 유적이다.  

 

금표비

이 비석에는 「東西三百尺 南北四百九十尺 此後泥生亦在當禁」(동서삼백척 남북사백구십척차후니생역재당금)이라 기록되어 있다.

청령포에서 동서로는 삼백 척을, 남북으로는 사백 구십 척 강봉된 노산군이 이 청령포에서 동서로는 삼백 척을, 남북으로는 사백 구십 척을 벗어날 수 없다는 이른바 행동 반경을 제한하는 금지령 팻말. 
 

청령포수림지 - 영월군 남면 광천리 청령포에 위치한 이 수림지는 수십 년에서 수백 년생의 거송들이 들어 찬 수림지로 단종의 유배처를 중심으로 주위에 울창한 송림을 이루고 있다. 
육육봉 - 청령포 바로 뒷산으로 일명 刀山이라고도 하는데 청령포에서 솟아오른 암벽으로 된 이 산은 6개의 작은 봉을이루고 있어 육육봉이라고 칭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 육륙봉은 어찌 보면 톱날과 흡사하다.

 

 

 

 

 

자규루는 단종(재위 1452∼1455)이 세조(재위 1455∼1468)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유배되었을 때 잠시 지내던 곳이다. 단종은 이 누각에 자주 올라가 자규시를 지었다고 한다. 자규란 피를 토하면서 구슬피 운다고 하는 소쩍새를 가르키는 말로 자신의 처지를 견주어 지은 것이다. 원래는 세종 10년(1428) 군수 신권근에 의해 지어져 ‘매죽루’라 불리웠으나 단종의 자규시가 너무 슬퍼 누각이름을 매죽루에서 자규루로 바꿨다고 한다. 그 후 많이 퇴락해 민가가 들어섰는데, 정조 15년 (1791) 강원도 관찰사 윤사국이 이곳을 돌아다니다 그 터를 찾아 복원하였다.

子規詞

月白夜蜀魄(월백야촉백추)                          달밝은 밤에 두견새 울음소리 더욱 구슬퍼
含愁情依樓頭(함수정의루두)                       수심많은 이내 목 누 머리에 의지하노라
爾주悲我聞苦(아주비아문고)                       슬피우는 네 목소리 내 듣기 괴로우니
無爾聲無我愁(무이성무아수)                       네 울음 그쳐야 내 수심도 그치리라
寄語世上苦勞人(기어세상고로인)                세상에 괴로움 많은 자에게 한마디 부치니
愼莫登春三月子規樓(신막등춘삼월자규루)    아예 춘삼월에는 자규루에 오르지 말아다오

 

子規詩

一自怨禽出帝宮 (일자원금출제궁)      한 마리 원한 맺힌 새가 궁중으로 나온 뒤로

孤身雙影碧山中 (고신쌍영벽산중)     외로운 몸 짝 없는 그림자가 푸른  산 속을 헤맨다. 

暇眠夜夜眠無假 (가면야야면무가)     밤이 가고 밤이 와도 잠을 못 이루고

窮限年年恨不窮 (궁한년년한불궁)     해가 가고 해가 와도 한은 끝이 없구나 

聲斷曉岑殘月白 (성단효잠잔월백)     두견새 소리 끊어진 새벽 멧부리 엔 달빛만 희고 

血淚春谷落花紅 (혈루춘곡락화홍)     피눈물나는 봄 골짜기엔 낙화만 붉었구나 

天聾尙未聞哀訴 (천롱상미문애소)     하늘은 귀먹어리인가 애달픈 이 하소연 어이 듣지 못하는지

何柰愁人耳獨聰 (하내수인이독총)     어찌다 수심 많은 이 사람의 귀만 홀로 밝는고

 

 


관풍헌

관풍헌은 본래 영월 객사의 동헌 건물이다. 단종은 본래 청령포에 유배되어 있었는데, 마침 홍수가 나서 이곳으로 옮겨와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때를 즈음해서 단종 복위운동이 계속해서 일어나곤 해서 세조는 결국 단종에게 죽음을 내림으로써 이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1457년(세조 3) 10월 24일 단종은 금부도사 왕방연이 가지고 온 사약을 먹고 또 공생 화득이 목을 졸라 죽음을 당하게 되었다. 그때 이렇게 비참하게 죽음을 당한 곳이 바로 이 관풍헌 앞마당이다. 현재는 보덕사 소유로 되어 있으며 포교당으로 이용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