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 제18호 부석사(浮石寺) 무량수전
언제 : 2008년 10월 1일
아주 오래전부터 꼭 가 보고 싶었던 부석사 무량수전을 찾아가려고 어제 꾸려 놓았던 배낭을 메고
2008년 시월 초하루 05:30분 집을 나섰다.
젊었을 적,
해외생활부터 국내에 정착해서도 기회 있으면 훌쩍 낯선 곳으로 떠나는 나의 역마살에
아내는 늘 외톨이가 되었다.
여태까지 별말이 없던 아내가 나이 들어가니 잔소리가 제법 내 귀에 들어온다.
누구랑 가느냐,
어디로 가느냐,
지난 9월에
2박3일 여행을 10월에 다녀오겠다는 통보를 했었고, 회사에는 휴가를 얻었기에
아내에게 잘 다녀오겠다는 인사만 하고 인천버스터미널로 향했다.
소백산을 넘는 데까지 안개가 산천을 드리우고 있었으나, 소백산 터널을 지나니 그야말로 전형적인
가을 날씨다.
어디론가 떠남은 흥분이다. 낯선 곳의 어떤 기대와 설레임 그리고 미지에서 오는 조그만 떨리움.
09:45
영주에 도착하여 일정의 변화를 주려다 시간을 지체하여 계획보다 좀 늦은
11:10
부석사입구에 도착했다.
소백산을 지나기 전 충북 어느 지역의 안개에 묻힌 멋진 풍광을 찍어보았다.
영주에서 풍기를 지나 부석사 가는 길에는
황금물결이 바람에 출렁이고, 과수원에 익어가는 먹음직스런 사과들은 마치 루비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부석사 버스 종점에는 아주 멋지게 생긴 바위 하나가 세상 시름을 잊은 체 누워 있다.
아마 국민학교 4,5학년 사회책에서 부석사 무량수전을 처음 접했을 터인데, 내 나이 오십 후반 머리 희끗하여 부석사를 찾았다.
이제야,
부석사를 찾게 됨과 가슴에 짓이겨져 있는 앎에 대해 미안하게 생각하며, 늦게나마 찾아올 수 있었음에 감사를 드린다.
만일,
이번 기회에도 오지 않았다면 평생 가슴에 담고 후회하며 살았을 것을......
부석사 일주문
(부석사는 뒷산의 봉황산 품에 안겨 있는데 일주문에는 태백산을 올렸다.)
오히려 소백산이라면 이해할 수 있겠으나 태백산이라니......
일주문에서 천왕문까지 부석사 오르는 길은 은행나무 숲길이다. 깊은 가을 이곳을 지나면
아주 노란 숲길이어 가을의 운치를 한껏 맛 볼 수 있다.
당간지주
천왕문
범종루
부석사 삼층석탑(양쪽)
부석사에는 2개의 누각이 있는데 안양루와 범종각이다.
오른쪽에서 본 앞 범종루, 다음 안양루, 그리고 맨 뒤의 건물이 무량수전이다.
이렇게 아름다운 조화를 이룬 사찰도 드물다.
안양루와 무량수전
잘 난 안양루가 무량수전을 지키고 서 있는 참으로 어디서 볼 수 없는 아름다운 건물의 조화이다.
부석사는 입구에서 부터 무량수전까지 온통 오르막길이다.
늦게 옴을 탓하듯 구석구석 돌아보며 종루를 지나니 갈한 목을 축이라고 시원한 물이 내린다.
속세에 찌든 속을 이 물을 마심으로 정화되기를 바라며
속을 쏵 씻어내 듯 한 바가지 물을 마셨다.
가을의 꽃 국화
물로 마음을 씻어내고 향기로운 국화향기로 정신을 맑게 하여 안양문을 지나 무량수전을 올랐다.
안양루
무량수전 앞마당 끝에 놓인 누각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로 무량수전과 함께 이 영역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이 건물에는 위쪽과 아래쪽에 달린 편액이 서로 다르다.
위층 마당 쪽에는 '안양루'라고 씌어있고, 난간 아랫부분에 걸린 편액은 '안양문'이라 되었다.
하나의 건물에 누각과 문이라는 2중의 기능을 부여한 것이다.
'안양'은 극락이므로 안양문은 극락 세계에 이르는 입구를 상징한다. 따라서 극락세계로 들어가는 문을 지나면
바로 극락인 무량수전이 위치한 구조로 되어있는 것이다.
안양루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엎드려 모여 있는 경내 여러 건물들의 지붕과 멀리 펼쳐진 소백의 연봉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아스라이 보이는 소백산맥의 산과 들이 마치 정원이라도 되듯 외부 공간은 확장되어 다가온다.
부석사 전체에서 가장 뛰어난 경관이다.
그래서 예부터 많은 문인들이 안양루에서 바라보는 소백의 장관을 시문으로 남겼고 그 현판들이 누각 내부에 걸려 있다.
안양루의 내벽엔 비운의 방랑시인 '김삿갓'의 시가 있다.
"평생에 여가 없어 이름난 곳 못 왔더니, 백수가 된 오늘에야 안양루에 올랐구나
그림 같은 강산은 동남으로 벌려 있고, 천지는 부평 같아 밤낮으로 떠 있구나.
안양문의 가랑이 사이를 고개 숙이며 올라서니 무량수전이 눈앞에 버티고 서 있다.
불자가 아니어도 스스로 고개를 숙이어 법당을 찾는 기본 예의를 저절로 갖추며 무량수전을 올려 볼 수 있게 만든 기법이 훌륭하다.
종루부터 급경사 계단을 올라 안양문을 지나 무량수전 앞에 서 두 손을 합장하여 인사드리고
뒤를 돌아보니
눈 앞에 펼쳐지는 아름다운 풍경은 너무 경이롭고 아름답고 조화로와 가슴이 확 터지며 탄성이 절로 났다.
이곳이 仙界인가!
저 멀리 소백산을 하늘에 닿게하고 그 사이 능선들이 무량수전을 향해 경배를 드리고, 발아래는 부석사 부속건물이 엎디어
나열하여 있다.
또한,
무량수전은 산속에 연꽃이 피어 속세를 내려다 보고 있는 듯 곱게 나이들어 있었다.
◇ 무량수전 (국보 제18호) 과 배나무◇
절에 들어가면 불전이 많은데 그 중에서 무량수전은 서방극락정토의 책임자인 아미타여래를 모시는 불전을 뜻한다.
아미타여래는 끝없는 지혜와 무한한 생명을 지녔으므로 ‘무량수불’로도 불리는데 ‘무량수’라는 말은 이를 의미하는 것이다.
부석사 무량수전은 우리 나라에 현존하는 목조건물 중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건물로 국보 제18호.
역사적으로는 봉정사 극락전이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이지만 건물 규모나 구조방식, 법식의 완성도라는 면에서 보면
이 건물에 비해 다소 떨어진다. 그러므로 무량수전은 고대 불전 형식과 구조를 연구하는 데 기준이 되는 중요한 건물이다.
무량수전은 1916년 해체·수리할 때 발견된
묵서명(墨書銘)에는 원융국사(964~1053)가 1376년에 중수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연대상 서로 차이가 있어 당시 주지로 있었던
원응국사를 잘못 쓴 것으로 추측된다.
건축양식은 배흘림의 기둥과 사뿐히 쳐들어진 추녀 곡선으로 회자되어있다.
*배흘림 기둥이란
가운데 부분이 불록하고 나와 있어 지붕의 하중을 견딜 수 있게 설계된 것 으로 건축미의 극치를 보여주며
국내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건물로 손꼽힌다.
무량수전 정면 중앙칸에 걸린 편액은 고려 공민왕의 글씨이다.
▼
부석사소조여래좌상(浮石寺塑造如來坐像)(국보 제45호) 무량수전 서쪽에 봉안되어 동쪽을 바라보시는 소조 아미타여래 좌상이 협시보살 없이 독존으로 모셔져 있으며, 불상을 동향으로 배치하고 내부의 열주를 통하여 이를 바라보도록 함으로써 일반적인 불전에서는 느낄 수 없는 장엄하고 깊이감 있는 공간이 만들어졌다. 소조여래좌상은 법당 서쪽 끝 고주(高柱) 열의 후불벽에 조성한 불단에 모셔진 목조 광배를 갖춘 소조(塑造 ) 아미타여래 좌상으로 불상의 체고는 278cm 광배 높이는 380cm이다. 대좌 역시 흙(점토)으로 되어있다. 나는 불자는 아니지만 등산화를 벗고 무량수전 아미타여래 불상에 세 번 절하고,
비록, 냄새나고 추한 육신이지만 더럽다 버리지 마시고,
부처님께서 보듬어 주시기를 기원드렸다.
소조불상이란 나무로 골격을 만들고 진흙을 붙여가며 만든 불상이며,
무량수전 소조불상은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가장 크고 오래된 것으로 그 가치는 높다.
높이 297cm. 방형의 지대석 위에 기대받침이 있으며,
기대석의 각 면에는 안상(眼象)이 2구씩 장식되었고 윗면에는 8각의 연화 하대석이 있다.
이 석등은 통일신라시대< 統一新羅時代 >의 가장 아름다운 대표적 석등이다.
선묘당과 부석
부석사 창건 설화의 주인공인, 의상대사를 사모하던 선묘공주의 사당. 무량수전의 오른쪽 약간 높이 자리하고 있다.
초상화는 관세음보살의 모습으로 그려진 듯. 용이 되어서 대사를 지키던 선묘낭자가 커다란 바위로 변신하여 절터의 잡귀들을
덮칠 듯이 위압을 주어 물리쳤다는 그 바위 '부석'. 부석사의 사명도 여기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무량수전을 가운데 두고 부석은 왼쪽에 선묘각은 오른쪽에 마치 옹위하듯 자리하고 있다.
바위 왼쪽에 부석(浮石)이라고 음각 되어 있다.
부석의 사전적 뜻은 수면에 반쯤 드러나서, 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바위라는 말이다.
그리고 부석사에 있는 부석은 두 개의 돌이 붙은 것 같지만 사실 하나 정도의 공간만큼 떠 있다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부석사 삼층석탑 (보물 제249호)
높이5.2m, 기단 폭 3.5m의 장대한 규모의 이 탑은
상·하층 기단의 각 면에 우주를 새기고 탱주를 두었으며 탑신부는 1층만 높고 2층부터는 낮아지면서 1층 옥개석을 포함하여
2,3층의 탑신과 옥개석 모두 적정히 체감된 장중하고 안정된 모습을 보이는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 삼층석탑이다.
선비화(仙扉花)
조사당 오른쪽 처마 밑에는 보호 철창을 설치해놓았는데 그 안에는 의상 대사의 주장자 전설이 담긴 선비화(仙扉花: 골담초)가
자라고 있다. 택리지에도 기록이 남아있는 이 나무의 수령은?... 1300년인가...가시도 달려있고 짙푸르러 얼른 보면 장미나무 같지만
잎이 전혀 다르다. 묘약이라는 속설에 손을 타서 그만 철창 속에서 자라게 됐다.
어렸을 적 가을에 우리의 장난감이었던 탱자열매. 가지고 놀다가 배 고프면 시디 신 탱자를
감귤처럼 까서 먹던 생각에 입에 침이 고인다.
풍기하면 인삼이 아니던가! 인삼밭 풍경과 길거리에 팔기 위해 진열해 놓은 사과.
부석사 기행후기
깊은 가을에 부석사를 왔다면 단풍들어 더 아름다운 부석사를 볼 수 있었으련만, 세상사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 어디 있던가.
흰 구름 둥둥 떠 있는 푸른 하늘 아래 부석사를 돌아볼 수 있었음도 행복이요,
수십 년 동안 내 안에 앎으로 짓이겨오던 부석사 무량수전을 볼 수 있으므로 묵혀 걸린 아쉬움도
시원스런 트림으로 뱉어낼 수 있어 기쁨이고 감사함이다.
무량수전은 아주 곱게 나이들어 가고 있었다.
나이는 들어 노색이 완연하나
흐트러짐이 없는 몸가짐과 걷는 발걸음에는 소리도 없을것 같아 보였다.
세월의 내공으로 매력있는 미소와 묵언으로 내방자를 맞이하고 있었다.
어찌 외로움 없었을까만,
어찌 흔들림 없었을까만,
멀리 앉은 소백산이 또한 묵언의 벗이 되어 무량수전을 지켜보고 있었다.
소백산과 더불어 무량수전이 오래 오래 우리 곁에 계시기를 기원해 보았다.
만나면 또 헤어져야 하는것이 인연 아니던가!
언제 다시 올 수 있을지 몰라 오래도록 머물며 해후를 풀고 싶었지만,
오래 머물지 않는 것이 나그네의 행보가 아니던가.
떠남은 곧 새로운 만남이다.
나그네는 떠남을 아쉬워해서는 안되며, 남아있는 것에 미련을 두어선 안된다.
2008.10.1.부석사 무량수전에서 雨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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