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牛馬처럼 걷는 대구+경북 여행

(경북 청송) 국립공원 주왕산 산행기.

주왕산 산행

 일   시: 2008.4.18~19(1박2일)인   원: 2명비   용: 200,000원교   통 : 대중교통 이용(동서울 터미널~주왕산~안동~서울)산행지: 경북 청송소재 주왕산(722m)코   스:  대전사- 주왕산 정상-칼등고개-후리메기삼거리-제3폭포=제2폭포-제1폭포-협곡-             학소대-시루봉-급수대-자하교-주왕암-주왕굴-대전사 주왕산 :  

경북 청송군과 영덕군에 걸쳐있는 국립공원(1976년).  주왕과 마 장군의 전설이 곳곳에 배어있는

유서 깊은 주왕산은 그리 높지 않으나 거대한 암벽이 병풍처럼 둘러선 산세 때문에

석병산(石屛山), 대둔산 등 여러 이름으로 불려왔다.

또한 주왕산은 설악산, 월출산과 더불어 우리나라 3대 암산(岩山)중에 하나이다.

 

                                 

 

주왕산 전설 :

주왕산은 신라 말부터 주왕이 은거하였던 산이라 하여 주왕산으로 불리게 되었다.

주왕산은 매우 깊고 험준하다는 말을 듣고 옛날부터 난리가 났을 때마다 이곳으로 피난을 온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선유 선사들이 산에 와서 살았다하여 대둔산이라 했고,

신라 선덕여왕의 족자인 김주원이 여기에 와 있었다 하여 주방산이라 했다.

 

신라시대 중국의 동쪽에 있던 진나라에서 복야상서란 벼슬을 지낸 주의 팔 대손 주도가 자칭 후주천왕이라 하고

진나라를 회복하고자 장사 수백 명을 주축으로 수만 군사를 이끌고 남양에서 반기를 들고

당시 서울인 장안을 쳐들어 가니 때는 당나라 덕종황제 정원 15년(신라 소지왕: 799년)이었다.

주도가 당나라 군사에게 패전을 당하고 요동으로 쫓기어 압록강을 건너 강원도 원주를 걸쳐 석병산이 매우 깊고 험하다는

소문을 듣고  이 산에 은거하였으나 신라왕이 당나라 왕의 청을 받아 마일성 장군을 시켜 주도를 잡게 하니

마일성 장군은 자기의 아우인 이성 삼성 사성 오성과 합세하여 대군을 거느리고 석병산을 포위하였다.

마장군 형제가 일시에 공격해 오자 주왕과 그 부하 장수들이 어쩔 바를 모르고 헤메다가 암굴(지금의 주왕굴)속으로 피해

들어가 숨었다. 왕은 너무나 안전한 곳이라 믿고  주왕굴 입구에 떨어지는 물에 낫을 씻다가 주왕을 찾고 있던

 마장군에게 들켜 그의 화살을 맞고 파란 많은 일생을 마치게 되었다.

 

주왕의 아들 대전도군과 주왕의 딸 백련낭자는 재빨리 피해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마장군이 주왕의 목을 갖고 신라왕에게 바치니 신라왕은 사신을 시켜서 주왕의 머리를 가지고 당나라로 가게 했다.

사신들이 압록강을 건널 때 돌연히 풍랑이 크게 일어나며 배가 전복되어

주왕의 목을 잃어버려 강을 건너지 못하고 뒤돌아 왔다.

어느 날 태풍이 심하게 일고 모래와 돌이 하늘 높이 날아 올라 사람들은 문 밖에 얼씬도 못했는데

이 때 대전도군이 주왕의 시체를 거두어 석병산 북쪽에 장사하였으니

그 날이 압록강에서 주왕의 목을 실은 배가 전복된 날이라 한다.

장사를 지낸 후에 분봉이 없는 고로 후세 사람들이 주왕의 무덤을 알 수 없다고 한다.

대전도군은 주왕의 장사를 지낸 후 세상일이 무상하고 부귀공명이 뜬구름과 같음을 깨닫고 세상사에 뜻이 없어

삭발염의하고 변장하여 입산수도의 길을 들어갔다.

그 후 나옹스님(서기1320~1376년)이 이곳에서 수도할 때 이산을 주왕산이라 불러

지금까지 주왕산이라 부르고 있다.

  

 

고속버스 안에서 풍기읍과 멀리 소백산. 

 

 

주왕산 버스 터미널에서 바라본 주왕산  

 

 

주왕산 詩碑 

 

주왕산의 대표적인 사찰이다. 청송군의 문화재 자료에 의하면 672년(문무왕 12)에 의상조사가 창건하였다고 하나 주왕사적에 의하면 신라 말인 892년(진성여왕 6)에 낭공대사가 창건하였다고 한다.대전사의 창건 동기는 절 이름, 벽화, 전설 등을 종합하여 볼 때 종교적인 동기 이외에 김범문의 효성을 기리기 위한 뜻도 포함된 것으로 보인다. 창건 당시는 웅장한 절이었음에 틀림없으나 임진왜란 때 대부분 소실되었다.그후 1672년(현종 13)에 중창, 1976년에 번와 및 단청을 하였으며 1988년에 봉향각, 수선당, 회연당을 신축하였다. 또한 1995년에 명부전과 산신각을 이전, 신축하였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기 전에는 4방 4불 3루각과 쌍탑이 있었다고 한다.4방은 열선당, 탐진당, 수월당, 한산전이고 4불전은 보광전, 극락전, 관음전, 명부전이며 3루각은 용화루, 범종각, 응향각이다. 이 가운데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은 보광전과 명부전뿐이다.보광전은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02호로 지정되어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단층 맞배지붕의 다포양식으로 공포는 외2출목, 내2출목을 이루는데 외부에서는 양서로, 내부에서는 교두형으로 되어 있는 조선 중기 이후의 목조건축 양식의 특징을 보여 주고 있다.이 절에는 금강탑이라는 쌍탑이 있었는데 지금은 완전히 파손되어 원래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며 일부 탑신 조각만 보광전 앞에 아루렇게나 쌓여 있다. 이 탑신 조각에는 사천왕상이 정교하게 돋을 새김된 부분이 있다. 사천왕상은 우주의 사방을 지키는 수호신인 동방 지국천왕, 서방 광목천왕, 남방 증장천왕, 북방 다문천왕등 사천왕을 도상화한 것이다.사천왕상이 우리나라에서 크게 성행한 시기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던 때부터라고 할 수 있다. 대전사 금강탑 조각에는 도검지물의 동방신장, 장창지물의 서방신장, 삼고지물의 남방신장, 보탑지물의 북방신장이 각각 한 쌍씩 있다. 전문가의 말에 의하면 이 탑의 원래 모습은 사적 제 46호인 경주의 원원사지 삼층석탑과 보물 제610호인 영양군 현일동 삼층석탑과 비슷하였을 것이라 한다. 이 금강탑이 보존만 잘 되었다면 보물급 문화재가 되었을 것이나 지금은 탑신석과 기단석으로 보이는 돌들이 대전사 마당에 굴러다니는 것이 안타깝기만 하다.대전사에서 나온 유물로는 금동여래입상과 금동이불병좌상이 있다. 금동여래입상은 1968년 4월 1일 절터 옆의 밭에서 출토된 것이다 이때 출토된 금동여래입상은 모두 7점으로 높이가 5.5센티미터부터 15.2센티미터까지의 작은 불상으로 통일신라시대의 불상으로 분류되고 있다. 발굴당시는 국립경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국립대구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국립대구박물관에는 금동이불병좌상도 보관, 전시되어 있는데 대좌 위에 두 개의 불상이 나란히 앉아 있다. 이 불상은 높이가 6.3cm, 아래 너비가 9.6cm의 작은 불상이며 금동여래입상과 같은 시대인 통일신라시대로 분류되고 있다.대전사에는 이여송 장군의 친필 목판도 있다. 가로 42.5cm, 세로 24.5cm의 목판에 새겨진 것으로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당시 주왕산에서 승병 훈련을 시키고 있던 사명대사에게 보낸 편지이다.  의승도대장 사명대사 귀하
의로운 승장 사명 대사의 장도에 삼가 보냅니다.
세상의 명예와 지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오로지 불도와 선도만을 배우십니까?
지금 나라의 일이 위급하다 하오니 의승병을 모두 데리고 산을 내려오기 바랍니다.
                                                                                           -명나라 장수 태자소부 이여송 삼가 씀-

 

 

 

기암: 주왕산 입구에 있는 웅장하게 솟아 있는 바위. 옛날 이곳에 은거하던 주왕이 신라의 장수 마장군과 싸울 때

볏짚을 둘러 군량미를 쌓아둔 것처럼 위장하여

마장군을 현혹케 했다고 함. 후에 마장군이 이곳을 점령했을 때 대장기大將旗를 세웠다고 하여 기암이라고 불리고 있다.   

 

 

 

 

 

갈림길 - 주왕산 산행은 우측 계곡은 좌측

 

 

주왕산 중턱에서 바라 본 기암과 병풍바위들

 

 

기암 건너 봉우리 장군봉 

 

 

 

 

 

주왕산에는 생각보다 우람한 적송이 많아 산행하는데 솔향이 넘치는 좋은 환경이었다. 

 

 

 

 

 

주왕산 정상(722m) 표지석 

 

 

주왕산 정상 부근에는 이름모를 노란 꽃들이 지천이었다. 

 

실타래처럼 얽혀진 소나무가 마치 우리의 삶과 같다. 

 

진달래가 만개하였고

 

 

숨어 내리는 작은 폭포

 

 

후리메기 삼거리 근처에 핀 야생화

 

 

후리메기 삼거리 이정표 

 

계곡물이 설악산 백담계곡 물과 다름없이 맑고 풍부해 걷는데 행복했다. 

 

 

 

 

 

 

 

제3폭포의 윗폭포

 

 

남성스런 제3폭포의 풍부한 수량과 파열음 그리고 흩날리는 물보라와 무지개가 장관을 이루었다.떠나기 싫어 오래 머무르고 싶었으나 그러나 또 나는 서둘러 떠나야 했다.

 

 

 

 

 

 

제2폭포는 여성스럽게 암벽 계곡속에 숨어 있었다.

 

 

제2폭포의 전경(바위계곡을 지나 아름답게 내리는 제 2폭포)

 

 

제2폭포 주변 암벽에는 누군가 무엇을 기원하며 돌맹이들이 떨어지지 않도록 박았다.

 

 

암벽으로 형성된 골짜기 거대한 암벽들이 압권이었다.

 

 

암벽계곡에 숨어 내리는 제1폭포

 

 

주왕산에 이런 놀라운 경관이 감춰져 있다니 경탄! 그리고 경탄!! 또 경탄!!!

 

 

시간이 없어도 빨리 떠남은 주왕산 암골을 모독하는 행위었다.차마뭐라 형언하기 힘들어 카메라 셧터만 눌렀다.떠나야 하는 건지. 

 

 

 

주왕산 폭포에서

 

진달래는 암벽 몰랑에서분홍 속살로 푸른 하늘을 유혹하고암벽을 숨어 내리는 폭포는허연 포말을 날리며 봄 날 바쁜 나그네 발 길 더디게 한다.

 

물위에 고운 오색 무지개그리고 물에 비친 진달래 속살이 거칠게 살아온 중년의 春情을 일게 하는데

 

아서라,세상事 無想하고 부귀공명은 뜬 구름이라흔들리는 마음을 다잡고발 길 돌리며 푸른 하늘에 속내 들킬까 봐곁눈질로검푸른 소沼를 바라보니

 

푸른 하늘도그곳에 빠져 허우적 대고있구나. 

 

 

 

 

 

 

 

 

 

 

 

 

 

숨어 내리는 소폭포

 

 

 

 

 

 

 

 

주왕암과 주왕굴을 가기 위해 건너는 자하교.

 

 

 

 

 

 

 

 

주왕암

 

 

 

 

 

 

 

 

그래도 누군가가 주왕의 영혼을 달래주기 위해 소주병을 갖다 두었다. 

 

 

주왕굴에서 밖에 내리는 폭포를 굴 안에서 찍었다.

 

 

주왕이 신라 군사를 막기 위해 대전사 동편 주왕암 입구에서 나한봉에 걸쳐 가로막은 돌담으로

길이가 약 30여리(약 12km)에 달하였다고 한다. 이 성은 주왕굴을 중심으로 사방을 방어할 수 있는 요새로 돌문과 창고 등이 있었으나, 지금은 성의 형체는 거의 사라지고, 곳곳에 부서진 성터의 자취와 이끼만 덮혀 있다.  

 

 

 

 

 

연화봉 

 

 

 

 

여름의 기암

 

* 백련암 :

대전사 건너편 옥같이 맑은 개울물과 병풍처럼 에워싼 사철나무에 감싸인 백련암은

대전사와 함께 지은 절로

주왕의 딸 백련의 이름을 따서 절 이름을 지었다.

옛날에는 이 암자에는 큰 종이 있어 새벽마다 산야에 은은한 종소리가 스몄다고 하는데

지금은 그 종은 없어지고 오직 그윽한 정서를 담고 있다.  

 

 

 

 

 

봄의 기암(08-4-18)

 

- 여행후기 - 직장생활을 하면서 1박2일 여행을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예전에는 여행은 혼자 떠나야 여행답다고 자랑을 했는데 중년에 들어 혼자 낯선 곳에서 하룻밤을 지낸다는 것이 쉽지 않아 서울에 계시는 마음이 통하는 선배님과 둘이서 여행을 하기로 정하고4월 18일 아침 6시 30분 인천에서 출발 동서울 터미널에서 8시 40분 주왕산 가는 고속버스에 몸을 실었다. 오랫만에 좋아하는 선배님과 여행을 하니 기분도 좋았고 그렇잖아도 봄날의 경치는 아름다운데더욱 아름답고 고웁다.주왕산은 가을 단풍이 아름답고 숲이 우거진 여름의 주왕산이 좋다지만 이번 여행은 아직 나무잎이 어우러지기 전 주왕산 속살을 보기 위한 떠남이다.13:45  주왕산 입구에 내려 대전사라는 조그만 절에 서니 뒷산에 엄청난 기암들이 하늘을 향햐여깃발을 날리듯 서 있다. 더구나 불탄일이 가까와지는지 오색 연등과 어우러진 기암은 장관이었고 과연 주왕산의 얼굴이라 할 수 있다. 금요일이어선지 산행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고 대부분 사람들은 폭포가 있는 계곡으로 발길을 향하는데우리는 주왕산 정상을 향해 올랐다. 주왕산 오르다 뒤돌아본 기암과 병풍바위들은 그냥 돌아보지 말고 돈을 내고 뒤 돌아 보아란 말이 옳다.14:10해발 722m 주왕산 정상 표지석이 보란 듯 서서 우리를 맞이한다.선배님이 가져오신 술을 나눠 마시며 특별한 표지석에서 촬영 하고 주변에 핀 진달래를 따 먹으며노래도 부르며 계곡이 궁금하여 서둘러 후리메기 삼거리로 하산해 제 3폭포를 향해 걸었다. 15:10제 3폭포는 남성스런 폭포로 수량이 풍부하고 우람하며 물보라에 서리는 무지개가 너무 고와오랫동안 머물렀다. 떠나기 싫었다. 그러나 나그네는 떠나야 나그네지......제 2폭포는 여성스럽게 도로에서 깊숙히 바위계곡을 지나 오묘한 자태로 숨어 내리고 있었고무엇을 기원했는지 암벽에 조그만 돌맹이들이 다닥다닥 붙여 있고 세워 있는 제 2폭포를 지나조금 내려오니 이게 어디인가! 폭포소리가 들리긴 한데 앞에 느닷없는 암벽들이 계곡을 이루고 하늘을 가리어 마치 중국 장가계를연상케 한다.제 1폭포와 어우러진 바위계곡은 놀라움과 웅장함 그리고 신비로움 그 자체였다.주왕산 입구에서 바라 본 기암이 얼굴이라면 이 협곡은 주왕산의 가슴이었다.어떻게 이 놀랍고 웅장한 경치를 두고 간단 말인가?정말 떠나고 싶지 않았다.  이곳을 떠남은 이 바위협곡을 무시하는 것 같았으나 아쉬운 마음을 두고그 협곡을 빠져 나오니 거대한 바위가 하늘에 뻗쳐 있는데 바위위에 청학과 백학 한쌍의 학이 살았다는 학소대 맞은편에 우뚝 솟아오른 바위는 떡 찌는 시루를 닮았다는 시루봉. 옆 모습은 마치 사람의 얼굴모양으로 참으로 놀랍다. 어떻게 바위가 그렇게 곧게 솟아올라 있는지.좀더 내려오니 급수대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 있고 그 아래 자하교 다리를 건너 약 10분 오르니주왕암자와 주왕굴이 있다.주왕굴은 주왕이 주왕산에 숨어 지내다 신라 마장군에게 들켜 죽었다는 깊지 않은 굴에 아직도 주왕의 넋을 달래는 잿상이 있고 동굴 앞에 떨어지는 폭포는 또한 일품이다.18: 10처음 출발했던 대전사에 도착했다. 석양의 기암이 낮에 보았던 기암과 또 다른 모습으로우리를 맞이해 준다.활짝 핀 벚꽃 그리고 대전사 연등들이 주왕산 기암을 더욱 빛나게 한다.18:45사실주왕산에서 하룻밤 보내려 했는데 주변 숙박시설이 모두 민박뿐이며 주변 여건과 위락시설이전무하여 긴 밤 시간을 보내기가 너무 쓸쓸할 것 같아 우리는 피곤함에도 안동으로 나오기로 했다.진보까지 나오는 막차를 타고 진보에서 19:55 안동가는 버스를 타고 20:30 안동 도착술을 곁들인 저녁식사를 마치고 근처 모텔을 정하고 다시 우리는 안동 시내를 구경하며 주막에 들러 골뱅이 안주에 거나하게 술을 마시고 01:00에 숙소에 돌아왔다.아마혼자 여행을 한다는 것은 젊었을 땐 긴 밤 혼자 있는 외로움도 멋스럽더니이제는정말 견디기 어렵다. 다행히 좋아하는 선배님과 숙박을 같이하는 여행길은행복한 여행이다.아내와 함께 다시 이곳을 찾아 아내에게 설명도 하는 그 날을 기다려 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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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봉에서 바라본 가을의 기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