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牛馬처럼 걷는 충남 여행

(충남) 수덕사와 덕숭산

 

수덕사와 덕숭산 여행

 

충남 예산 수덕사와 덕숭산 산행을 하기 위해 인천에서

시외버스로  충남 예산으로 향했다.

   

경기도와 충청도를 잇는 서해대교를 지나니

얼마 전 행담도 개발 사업 의혹 사건으로 주목을 받았던 행담도가 서해대교 아래 있다.

(행담도)

 

서해대교를 지나 곧 당진으로 들어서 아산만 들녘을 달렸다.

연록과 황금 물결이 어우러진 너른 들

그 너른 들 가운데 버스 차창문을 열고 달리는 기분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었다.

허리 휘어지는 빨간 립스틱을 바른 여인이 반갑다고 손을 흔들고

붉다 못해 검붉은 칸나의 유혹에 황홀 하기까지 했다.

 

  

 

그녀 이름은 칸나

 

가을은 황금 물결

바람은 나그네

 

하늘은 푸른 호수

구름은 흰 돗배

 

서른 즈음

햇살 따가운

이란 테헤란 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여인

그 이름

칸나.

 

서해 대교 지나

아산만

너른 들

햇살 그을린 전봇대 아래

 

터질 듯

검붉은

그 여인이

통통한 두 젖 가슴 내밀고

 

나그네 발길을

주저 앉혔다.

 

너른 들 을 벗어나니 길목에 추사 김정희 고택이라는 간판이 보였다.

"명은 길어 실 같고 붓을 잡으면 추사를 닮아라." 옛 어른들의 말씀이 이러했다니

얼마나 추사의 글씨가 뛰어났나를 알 수 있다.

 

예산에 도착

수덕사행 버스를 물으니 2분 전 버스가 떠났고 다음 버스는 40분 후에 있단다

버스를 중간에 잡을 요량으로 택시를 타고 가다보니

삽교까지 와 버렸네.

삽다리.

유명한 가수가 방송에 나와 얘기하던 그 사람 고향

한가하고

늘어진 시골이다.

언젠가

혼자 이곳에 기차타고 와 수덕사를 여행 한 적이 있었는데

추억이 아물하다.

 

삽교에서 버스를 타고 유명한 덕산 온천을 지나고 고개를 넘으니

드디어

수덕사 관광단지.

점심을 먹기 위해

지인이 소개한 개미식당을 찾아 산채 비빕밥을 맛있게 먹고

수덕사로 향했다.

 

 (수덕사 입구)

 

무슨 인연인지 두 번째 수덕사를 찾는데 올 때 마다 혼자 오게 된다.

 수덕사에 들어서자 마자

도로 좌측에 있는 수덕여관이 반긴다. 오래 전 이곳에 왔을 땐 영업을 하였는데

지금은

수덕사 경내에 들어와 있으나 페허가 되어가고 있다.

고암 이응로 화백이 새겨 놓았다는 수덕여관의 뒤뜰 이끼 낀 암각화도 보았으나

많은 이야기들이 남아있는 수덕여관이

쓸쓸히 늙어가고 있슴에 아쉬움이 남았다.

▲ 정적에 싸인 수덕여관

 

 사천왕 문을 지나니 거대한 건물이 기다리고 있다. 지하에 수덕사 박물관이 있는데 

 박물관에서 직물을 통한 불교예술 전람회가 있어 귀한 자료들을 볼 수 있었다.

 

전시유물은

직조. 염직. 자수 등의 방법으로 이루어진 중국 국보 2점을 비롯한 충 69점을 전시하였는데

사진 촬영을 할 수 없어 아쉬운 마음이다.

 

 언제나 봐도 단정하며 우아한 기품이 있는 대웅전에 올랐다.

예전에 왔을 땐 그곳 기념품 파는 아가씨가 저녁 공양을 하고 가시라는 권유도 받았는데

대웅전 외에 다른 건물들은 예전과 같지 않은 것 같다.

 

 

(수덕사 대웅전)

 

국보 제49호 이며  고려 충렬왕 34년(1308년)건립된 창건연대가 정확히 전해지는

건물 중 가장 오래 된 목조건물이다.

 특별한 기교나 화려한 장식을 생략해 단순하면서도 균형감을 강조한 맛배지붕으로

측면에서 보면 대웅전의 균형미와 안정감이 넘쳐 한국 목조 예술의 극치로 불린다.

대웅전 앞 낮고 부서진 탑이 보물로 지정된 3층 석탑인데

 

▲ 대웅전 건물의 옆모습

 

근래에 세운 듯한 높다란 석탑이 오히려 사람들의 눈길을 끈다.

특히 그 석탑꼭대기는 햇볕을 받아 반짝이는 황금색 상륜부가 화려한 모습이다.


 

잘못하면 그냥 지나칠 수 있는

대웅전 좌측에 관음바위가 있는데 수덕사에 대한 전설이 담겨 있다.

관음바위와 관세음보살상
관음바위와 관세음보살상
백제시대에 창건된 수덕사가 통일신라시대에 이르기까지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가람은 극히 퇴락이 심해 대중창불사를 하여야 했으나 당시의 스님들은 불사금을 조달하기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묘령의 여인이 찾아와서 불사를 돕기 위해 공양주를 하겠다고 자청하였다. 이 여인의 미모가 빼어난 지라 수덕각시라는 이름으로 소문이 원근에 퍼지게 되니, 심상궁곡인 수덕사에 이 여인을 구경하러 오는 사람이 연일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그중 신라의 대부호요 재상의 아들인 "정혜(定慧)"라는 사람이 청혼을 하기까지에 이르렀다. 이 불사가 원만성취되면 청혼을 받아들이겠다고 하는 여인의 말을 듣고 이 청년은 가산을 보태어 10년 걸릴 불사를 3년만에 원만히 끝내고 낙성식을 보게 되었다.

 

낙성식에 대공덕주로서 참석한 이 청년이 수덕각시에게 같이 떠날 것을 독촉하자 "구정물 묻은 옷을 갈아 입을 말미를 주소서"하고 옆방으로 들어간 뒤 기척이 없었다. 이에 청년이 방문을 열고들어가려하자 여인은 급히 다른 방으로 사라지려 하였다. 그 모습에 당황한 청년이 여인을 잡으려 하는 순간 옆에 있던 바위가 갈라지며 여인은 버선 한짝만 남기고 사라지니, 갑자기 사람도 방문도 없어지고 크게 틈이 벌어진 바위 하나만 나타나 있었다.


관음바위
관음바위
이후 그 바위가 갈라진 사이에서는 봄이면 기이하게 버선모양의 버선꽃이 지금까지 피고 있으며 그로부터 관음보살의 현신이었던 그 여인의 이름이 수덕이었으므로 절 이름을 수덕사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광경을 본 정혜라는 청년은 무상함을 느끼고 산마루에 올라가 절을 짓고 그 이름을 정혜사라 하였다고 한다.

 

또한 이때부터 관세음보살이 현신하여 절을 크게 중창하고 바위속으로 사라진 이 곳에서 기도를 하면 모든 소원이 성취된다는 소문이 경향각지에 퍼지자 소원을 비는 인적이 끊이지 않았으나, 수덕사는 근대한국선불교의 중흥조인 경허 만공스님의 가풍을 간직한 선찰로서 자칫 기복에 치우칠 우려가 있어 이를 더이상 구전치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곳을 찾는 많은 불자들의 심원(心願)에 따라 수덕사에서는 이 성역에 참배 기도하는 이에게 관음의 신통묘용(神通妙用)한 가피(加被)가 얻어지기를 기원하며 근래에 관음상을 봉조하게 되었다 /펌

 

수덕사를 구경 후

덕숭산 중턱에 있는 정혜사를 갈려고 지나는 스님에게 정해사 가는 길과 시간을 물어보니

뒷길로 올라가면 되고 시간은 약 10분 정도 걸린단다.

 사실 정혜사는 근대 최고의 선승이자 기인이신 만공(1871-1946)이 계셨던 곳이다.

젊은 여자의 허벅지를 베지 않으면 잠을 이루지 못했다는 기인!

1946년 어느 저녁 공양을 마치고 거울 앞에 서서

"이 사람 만공! 자네와 나는 70여년 동거 동락 했지만 오늘이 마지막 일세

 그 동안 수고 했네." 하고 열반에 들었다는 분.

▲ 만공탑

쉬엄 쉬엄 오르니 만공이 세웠다는 미륵불이 나오고 만공 탑이 나온뒤

드디어

정혜사가 나타났다.

 

▲ 정혜사 마당의 이끼 뒤덮인 바위와 돌탑

 

 

 

정혜사에서

 

세상 사 땀 흘리지 않고

즐거움 없슴이라

 

정혜사 오르는데

목 마르고 숨 차

오던 길

뒤 돌아 보려니

보이는 돌담이 정혜사라 하네

 

앞 마당 너른 바위에 앉아

만 가지 생각에

해는 지고

천 년 

향 내음과 목탁 소리 

발 아래 있네

 

밤은 스멀 스멀 덕숭산 재우고

달도 지고

별도 자네

 

바람은 차고

소나무

잎 새 우는 소리 외로운데

 

정혜사 앞 마당

맑은 샘

넘쳐 흐르는

저 물

누가 비춰 주련가.

 

정혜사(定慧寺)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사천리 덕송산에 있는 절.

대한불교조계종 제7교구 본사인 수덕사의 말사이다.

백제 599년(법왕 1) 지명법사(智明法師)가 창건한 이후에

많은 고승들이 수도를 했다고 하나 절의 자세한 역사는 전하지 않는다.

1930년 승려 만공(滿空)이 머물면서 절이 크게 확장되었으며 많은 제자들을 배출했다.

현존 당우로는 관음전·능인선원(能仁禪院)·산신각·불유각(佛乳閣)·요사채 등이 있다.

 

정혜사 앞 마당에 너른 바위에 앉아 발 아래 수덕사를 내려다 보니 정말 아름다운 풍경이다.

마당에 흐르는 샘에 목을 축이고

탁 트인 시원한 풍광에 한참을 머무르다

 뒷길을 따라 10여분 올라 가니 드디어 덕숭산 정상(495m)이다.

 

바로 맞은 편 높은 산이 가야산이고 저 아래 윤봉길 의사 기념관이 보인다.

 

아무도 없는 곳

나 혼자

덕숭산 정상에서 야~호를 외치며

땀을 식히고 하산 하다

다시

정혜사에 들러 물을 마시는데

나이 든 스님이 올라오는데 뒤에는 아리따운 비구니 스님이 뒤따라 온다.

순간 

만공 스님이 여기 계실 때 일엽스님은 저 아래 견성암에서 이따금 스승인 만공을 만나러

일엽도 저렇게 올라왔을까?

순간 쓸데없는 생각이 든다.

어리석은 자는 어리석은 생각만 하니 어쩔 수 없구나.

 

 내려올 땐 오른쪽 차도로 내려 오다

비구니의 사찰인 견성암을 살짝 들렀다.

 

(견성암)

 

덕숭총림 수덕사의 산내암자인 견성암은 창건될 때부터 선원으로 출발, 선원연혁이 곧 사찰 연혁이 된 국내 최초의 비구니 전문 선원이다. 초가집에서부터 출발해 함석집, 기와집으로 증·개축을 거듭하다 1965년에 이르러 오늘날의 지하 1층, 지상 2층의 인도식 석조건물로 자리를 잡았다.

견성암이 대표적 비구니 참선도량으로 자리잡게 되는 데는 만공스님과 법희스님, 그리고 일엽스님의 원력이 컸다. 만공스님은 28년 선원의 역사라 할 수 있는 방함록의 서문을 써 견성암이 비구니 선원으로 확고하게 자리잡을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 또한 법희, 일엽스님 등 한 획을 그은 비구니 상좌들에게 전법게를 내려 비구니 승가가 발전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해 주었다. 국내 비구니 선풍은 비구와 비구니, 출가자와 재가자를 차별하지 않는 만공스님의 너른 품 안에서 출발이 가능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현재 견성암 입구에 걸려 있는 편액도 만공스님의 친필이다.

 


법희스님은 피나는 정진 끝에 16년 만공스님으로부터 전법게를 받았다. 이때가 스님의 세속 나이 28세. 이로써 한국 비구니 법맥의 새 장이 열리게 되었다. 스님이 75년 입적했을 때 당시 한 불교계 신문에는 “만공 큰스님의 지도를 받아 일찍이 소안(心眼)을 열고, 한국 최초로 비구니 선맥을 일으켜 덕숭산 수덕사 비구니 총림선원의 원장으로 추대되었던 법희 비구니 스님이 4월20일 오후 2시 세수 89세로 금생사를 마치자, 전국 비구니스님들은 ‘전국비구니장’으로 법희의 장례를 거행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스님이 생전에 만공 문하에서 당대의 쟁쟁한 수좌 금오·춘성스님 등과 마주앉아 서슴없이 법거량을 했다고 전하고 있어 법희스님의 위치가 어느 정도였는지 실감케 하고 있다.
법희스님이 비구니 승가의 기초를 닦았다면, 일엽스님은 여성 수행자에 대한 관심이 적었던 당시 상황에서 여성도 뛰어난 수행자가 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어 대중적 관심을 촉발함은 물론 비구니 승가의 외연을 넓히는 데 큰 기여를 했다. 최초의 여성 유학생, 최초의 여성잡지 ‘신여자’ 주간 등을 거치며 나혜석과 함께 대표적 신여성으로 불렸던 일엽스님(본명 김원주)은 28년 만공스님을 만나 크게 발심한 이후 출가했고, 33년 견성암에 들어온 이후로는 25년간 산문을 나가지 않은 채 수행을 거듭했다. 시인이자 수필가였던 그녀는 이광수에게 필력을 인정받아 “한국 문단의 일엽(나뭇잎 하나)이 되라”는 고평을 들었지만 출가 이후 “글 또한 망상의 근원이 된다”며 절필을 했다. 그녀의 대표적 저서이자 베스트셀러였던 수필집 ‘청춘을 불사르고’가 나온 것은 62년에 와서이다. “아무래도 청춘을 사르지 못하면 생사를 초월한 영원한 청춘을 얻을 길은 없습니다”는 구절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구도의 문 앞에서 서성이는 청춘들의 가슴에 불을 지르는 명문이다.
 일엽스님은 속세에 있을 때 일본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 찾아오자 “나를 어머니로 부르지 말고 스님으로 불러라”라고 냉혹하게 대했다. 당시 14세였던 아들을 위로해준 사람은 다름 아닌 나혜석이었다. 나혜석은 당시 수덕사 입구 수덕여관에 머물며 일엽스님처럼 출가하려 했으나 만공스님이 “스님 될 사람이 아니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최근 자신의 체험을 책으로 엮은 일엽스님의 아들 일당스님에 의해 알려졌다. 유명한 화가인 일당스님은 파란만장한 생애를 보내다 67세에 불가에 귀의, 어머니의 뒤를 따르고 있다./펌

 

(화소대)

 

견성암을 뒤로 하고 조금 내려오면 왼쪽에 아름다운 화소대가 자리하고 있다

화소대에서 왼쪽 사잇길로 나오니 수덕사 대웅전 뒷길이다.

 

언제 다시 이곳에 올지 알 수 없다.

허지만

반갑고 마음 편해 지는 곳이다.

 

좋은 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만남의 사람과 올 수 있을지......

 

 

 

 

 

 

 

 

 

 

 

수덕사를 나와

생밤을 3kg 사서 아내에게 줄 선물을 마련하고 개미식당에 들러

세수도 하고 

도토리 부침과 동동주를 배고프고 목 말라 벌컥 벌컥 마시니 얼퀴하게 술이 오른다.

 

거나 해 졌다.

술이 취하지 않았다면 덕산 온천에서 온천욕을 했을 터인데 

술 좋아하는 나는 어쩔수 없나 보다.

아뿔사!

동동주 마신 것이 취해 버스를 타는데 판단 착오가 생겨

예산에서 기차나 버스로 오면 될 것을 천안까지 버스로 가다가

퇴근 길 정체에서 2시간 정도 길에서 고생을 했다.

그러나

혼자의 여행이기에 실수를 해도 신경 쓰지 않아  마음이 편했다.

밤 11시에 집에 도착 하여 2박 3일의 여행을 마쳤다.

 

 

    (덕숭산에서 내려다 본 수덕사와 멀리 서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