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牛馬처럼 걷는 전북 여행

(전북) 변산반도 여행기

 

변산 반도 여행기

 

 

 

2박3일 일정으로

산과 바다가 어우러져 매혹적인 변산반도 여행을 했다.

혼자 떠남이 좋지만

2박3일의 일정상 지인과  동행을 했다.

 

 

06.9.20.

08:10

  인천 버스 터미널에서 부안행 시외버스를 탔다.

서해대교의 위용을 느끼며 서해 바다를 건너 충청도 당진 너른 들에

연록의 벼들이 신선함과 풍요로움을 보내준다.

 

 

훌쩍 떠남은 걱정은 있지만 새로운 곳의 기대 또한 크다.

역시

떠남은 행복하다.

 

 

늦은 가을 코스모스는 외롭고 쓸쓸해 보이지만

황금 들녘에서 본 코스모스는 아름답고 생기 넘치는 여인이

여린 입술에 붉은 립스틱을 발라

알 듯 모를 듯

웃음 지으며

가는 허리를 살랑 살랑 흔든다.

 

만경에서 김제. 부안까지 이어지는 호남평야의 황금물결은

잊었던 단어

지평선을 선물해 주었다.

 

11:10

부안에 도착했다.

첫 눈에 부안은 군 소재지 치고 큰 건물들과 거리가 잘 정리 된

아름답고 활기찬  도시이다.

 

부안에서 격포가는 버스를 타고 들 길을 달리니

저 멀리

새만금 방조제가 푸른 바다에 띠를 두르고 있고

변산 해수욕장은

바빴던 여름 뒤

한가로이 밀려오는 파도를 안았다가 놓아주고 있다.

 

12:15

변산면 지서리에 도착

청국장 백반에 소주 한 병을 마셨다.

주문을 받던 젊은이가 어디서 왔느냐 물어 인천과 서울에서 왔다니

자기 고향이 인천이라며

든든히 식사하고 산행을 하라며 밥 한 공기를 더 가져다 준다.

지서리에서 산행을 시작하는 남여치까지는 도보로 약 40분 소요되어

택시(3,000원)를 타고 갔다.

 

변산은 호남의 5대 명산 중에 하나로 서해에 접한 반도를 형성한 산 군을 말하며,

행정구역상으로는 전북 부안군 하서면, 상서면, 변산면, 진서면, 보안면에 접해 있는 산이다.

의상봉(509m), 삼예봉(355m), 덕성봉(328m), 상여봉(398m), 옥녀봉(433m),

쌍선봉(459m), 신선봉(486m), 삼신산(486m), 갑남산 등을 통칭하여 변산이라 부르고 있다.

 

13:20

남여치 매표소

개울을 건너면서 다음 목적지 월명암을 향해 산을 오르기 시작했는데

계속 오르막길이다.

호흡은 가파오고 다리는 후들거리고

배부른 점심과 소주가 괴롭히기 시작했다.

 

긴 팔 상의는 벗고 반 팔로 갈아입고 바지는 무릎까지 걷어 올리고 걸은지 약 50분쯤

쌍선봉(459.1m) 고개에 도착

다리를 쉬고 월명암으로 발 길을 돌렸다.

 

 

월명암

변산의 쌍선봉 아래에 자리하고 있는 월명암은 692년(통일신라, 신문왕 12)

부설거사에 의해 창건되었다

월명암에 도착

차가운 물로 세수도 하고 물통에 물도 채우니 몸이 상쾌해 진다.

 

 내변산을 바라보니

저 멀리 변산의 정상 의상봉(508.6m)과 덕성봉(328m), 관음봉(424.5m)과

세봉, 망포대(492.4m)와 신선봉(491m)의 봉우리들이 기암과 함께

아름답게 내변산을 둘러 싸고 있다.

 

 

월명암을 출발 다음 목적지 자연보호 헌장탑.

가는 길은 평지를 걷다 계속 내리막 길이지만 암릉이 있고

쉽지 않은 내리막 길이다. 

후들거리며 약 50분을 내려오니 계곡물이 흐르는 봉래구곡이다.

직감에 멀지 않은 곳에 직소폭포가 있음직하고

멀리서

직소폭포의 강렬한 물 내림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암릉길)

발길을 재촉하다 보니 조그만 저수지가 나오는데 관음봉과 주위 봉우리들이

물위에 비춰 한 폭의 동양화를 선사하고 있다.

정말

어디서 이런 그림을 본 듯 한데 기억은 나지 않는다.

 

 

직소폭포

 

드디어

내가 그렇게 보고 싶었던 직소폭포가 멀리 보이는데

이상하다

분명

힘찬 물 내림 소리가 들려야 하는데 들리지 않는다.

이게 무슨 날 벼락이람!

물이 내리지 않는 말라버린 폭포!

부산히 산길을 내려가 폭포 바로 아래에 섰다.

 

참으로

잘 생긴 폭포임에 틀림없다.

웅대한 기골

힘지게 파인 물 고랑

그러나

물이 흐르지 않는 폭포.

 

그래도

물이 흐를 때를 연상하며 직소폭포의 위용과 자태에 흠뻑 빠졌다

등산화를 벗고 두 발을 담갔다.

 

 

한 여인을 생각했다.

 

매창 이계생

 

"梨花雨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秋風落葉에

 저도 나를 생각하는가/ 
 千 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매."

 

조선 시대 대표적 여류시인 중에 규수시인으로 허란설헌을 꼽는다면,

기녀시인으로는 황진이와 매창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매창은 1573년(선조 6) 당시 부안 현리였던 이탕종의 서녀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해가 계유년이어서 계생(癸生, 桂生) 또는 계랑(癸 )이라 하였으며,

호는 매창(梅窓)이다.

그는 아버지에게서 한문을 배웠다고 하며, 시와 거문고에 뛰어나

 김제군수를 지낸 이귀(李貴) 같은 고관이라든가,

유희경(劉希慶), 허균(許筠) 같은 시인들이 그를 제대로 알아주고 깊이 사귀었다.

그의 대표적인 시는 「梨花雨」로,

매창이 유희경과 이별하고 지은 이 시조는 「가곡원류」에 실려 전해지고 있다.

1610년(광해 2) 여름 38세의 나이로 죽자 거문고와 함께 부안의 봉덕리(매창이 뜸)에 묻혔다.

평생 수 백편의 시를 남겼으나 거의 흩어져 없어지고,

1668년에 부안의 아전들이 외어 전하던 58편을 얻어 개암사에서 목판으로 「매창집」을 엮어냈다.

그녀는 선조 6년 이곳에서 아전의 딸로 태어나 기생이 되었는데
시문과 가무가 뛰어나 당대의 풍류명사들로부터 아낌없는 사랑을 받은 명기였다.

(촌은=유희경)
我有一仙藥 能醫玉頰嚬 내 신효한 약 있어 못난 얼굴도 고치는데
深藏錦囊裡 欲與有情人 깊이 간직한 이 약 정든 그대에게 주리라
하니

매창
我有古奏箏 一彈百感生 내게 묵은 거문고 있어 한번 타면 온갖 생각 나는데
世無知此曲 淫和 山笙 알아주는 이 없으니 생황하고 멋지게 어울렸으면

 

贈醉客(증취객)

醉客執羅衫 ..........술 취한 손이 옷자락을 잡으니
취객집나삼

羅衫隨手裂 ..........옷자락이 손끝에서 찢어지네
나삼수수렬

不惜一羅衫 ..........옷자락 하나는 아깝지 않으나
불석일나삼

但恐恩情絶..........고마운 이 정 끊어질까 두렵네
단공은정절

 

직소폭포는 물이 내리지 않아도 좋았다.

힘차게 내리는 물 소리와 물 보라는 볼 수 없슴은

다름아니라

물 내리면 다시 한 번 오라는

직소폭포와 매창이 나에게 주는 마음의 선물이라 생각했다.

 

직소폭포

 

이제사 왔던가

하마터면

영영 볼 수 없었을지도 몰라

 

깊디 깊은 변산 관음봉

배꼽 아래 숨는다고

내가 못 찾을 줄 알았는가

 

내가

그대를 보지 못했더라면

한 세상 무얼 하며 살았다고

감히

누게 말할까

 

그대의

넘치는 소리 못 들어도 좋네

무지개 타며 추는 춤 

아니 보아도 좋네

피곤하고

목이 잠겨 그런걸.

 

늦은 해후와 그대 사모한 이유로

내 눈물

그대의

비류(飛流) 되려니

 

우리 영혼 위해

그대는

노래 한 곡 준비하소

나는

동동주 한 통 준비하려니.

 

 

 

물 내리지 않는 직소폭포를 남겨두고 재백이고개를 향해 발 걸음을 옮겼다.

길은

숲이 우거지고 편하고 너르다.

행복

감사할 줄 알고 배려 할 줄 알며

감격에 눈물을 흘릴 수 있어야 행복이 아니던가!

숲길을 걸으며 내가 지금 이 순간

행복함을 느낀다.

또한

직소폭포에서 재백이 고개 까지 길은

내가 이곳에 왜 와야만 했던가를 생각케하는

사색을 할 수 있는 길이었다.

 

재백이 고개에서 트러블이 있었다.

동행인은 피곤하니 원암리로 곧장 내려가자 하고

나는

관음봉에서 곰소만과 내소사를 내려보아야 한다고 우겨

겨우

관음봉으로 향했다.

힘 들었다

약 30분을 올라

관음봉에서 보는 저 멀리 고창땅과 변산 사이의 곰소만

발 아래 내소사는 절경이다.

정말

원암리로 내려갔다면 두고 두고 후회 했으리라.

 

 

 

 

감격의 내소사(來蘇寺)

고요하고 산뜻하며

크지도 작지도 않고

관음봉과 세봉의 정기를 내려받아 안온한 명당에 자리한 사찰이다.

 

대웅전 앞 마당

1000년 거목이 서서 내소사의 희노애락을 지켜보고 있다.

 

내소사는 백제 무왕 34년(633) 혜구두타 스님이 창건했다는 기록이 있고

본래는 소래사라 했다 한다.

동국여지승람(성종17년:1486)에도 소래사라 했으니 내소사라는

명칭은 성종 그 이후의 일인 듯 하다.

대웅전은 오랜 세월 동안 단청을 하지 않아 자연스레 빛 바랜 단청과

고색 창연한 기품이 

오히려 정갈하고 우아한 멋을 느끼게 한다.

특히

대웅전의 문살에 새겨진 연꽃, 국화꽃 문양은 무채색으로 바래져 오랜 풍상의 흔적속에

새로운 품격을 드러내 주고 있다.

 

▲ 내소사 대웅보전 내부 천장과 독특한 용조각 장식.






앞 마당에 넘치는 생수를 한 바가지 마시니

꿀맛이 이러랴

솔직히

벌컥 벌컥 마시는 생맥주 생각이 절로 났다.

 

대웅전 아래

마당 옆 문에 씌여진 글 귀가 예뻐 적어본다.

 

"벌은 꽃에서 꿀 을 따지만 꽃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

열매를 맺게 해 준다."

 

남여치 산행시작-오름길 쌍선봉 고개2km(14:10)-월명암0.2km(14:15-14:25) 내림길-자연보호

헌장탑2km(15:15)-직소폭포0.9km(15:40-16:00)-재백이고개1.5km(16:30)오름길-관음봉(424.5m) 삼거리0.8km(16:55)내림길-

내소사1.3km(17:20)

 

▲ 특이한 모양과 공간 활용이 돋보이는 설선당.


만나면 헤어지는 것

영원은 없다.

50년 더 오래 부터 변산 내소사와 직소폭포를 마음에 두고

언젠가

나 그대를 보러 가리 했던 꿈을 이루었다. 

내소사 입구의 긴 전나무 숲을 걸어 나오며 물 내리는 직소폭포 다시 보러 오리라 다짐하며

전나무의 향그러움과 싱그러움으로 여행을 마쳤다.

 

 

내소사 입구 관광단지의 주막에 들러

전어 소금구이에 동동주 2통을 나눠 마시니 아리 딸딸 하다.

계획은

여기서 민박을 하고 내일 아침 일찍 내소사를 다시 한 번 구경 할 예정이었는데

내일의 스케줄을 힘들지 않게 하기 위해

무리인 줄 알면서 격포까지 가기로 했다. 

 

18:40

격포

숙박 하기 위해 유스 호스텔과 모텔들을 찾아 갔으나 학생들의 수학여행으로

빈 방이 없네.

겨우 찾아간 비사벌 모텔에 숙소를 정하고

젖은 옷 세탁과 샤워를 하니

밤 9시에야 채석강 해수욕장 앞 횟집에서 전어회 무침에 소주와 식사를 했다.

 

판단은 냉철하게 하여야 함에도

술 한 잔 마신 김에 격포까지 나온것이 후회스럽다.

내소사 입구에서 쉬었어야 했는데 왜 그랬을까?

술도 취하고 피곤하다.

 

06.9.21

06:00

기상하여 간단히 세수하고 아침에 채석강을 보러 방을 나섰다.

모텔 라운지에 컴퓨터가 비치되어 좋다.

밖을 나서니

바닷물이 나고 있었다.

서해의 푸른 바다가 싱그럽고 갈매기가  나를 유혹한다.

날마다 바다 건너 출.퇴근을 하지만

여행을 와 이른 아침에 바다를 본다는 것은

정말

기분 좋은일이다.

모래밭에 발을 내리니 사각 사각 느낌이 좋다. 햇살 받은 앞 바다에는 어선들이 떠 있는

채석강으로 조심스럽게 발을 디뎠다.

물이 금방 빠져 바위들이 미끄럽다.

 

 채석강

 

 

 

 

 


 


채석강이라는 이름의 유래는 당라의 시인 이태백이 배 타고 술 마시다가 물에 비친 달빛 모습에 반하여 달을 건지러 물에 빠졌다는

중국의 채석강과 비슷하다 하여 붙여졌단다. 


 
채석강은 변산반도 서쪽끝 격포항과 그 오른쪽 닭이봉 일대 1.5km의 층암 절벽과 바다를 총칭하는 이름이다.

격포항 오른쪽 닭이봉 밑에 위치한 채석강은 선켐프라이대에 화강암, 편마암을 기층으로 하고 중생대의 백악기(약 7천만년 전)에 퇴적한 해식단애가 마치 수만권의 책을 쌓은 듯한 와층을 이루고 있어 자연의 신비를 만끽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오랜 세월 자연이 빚은 퇴적예술의 걸작이라 할만큼 경관이 빼어나며, 다른 퇴적암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구조가 많고, 퇴적된 과정들이 절벽에 입체적으로 잘 드러나 있어 학술적으로도 보존 가치가 높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해안절벽 앞에는 먼 바다에서부터 깎여들어온 암반이 넓다랗게 펼쳐져 있어 해안의 경치를 더욱 아름답게 한다.

 오랜 세월과 바닷물의 걸작품인 퇴적암 절벽

전북 부안군 산내면 격포리 해안. 퇴적암이 빚어내는 절경은 부산 태종대와 해남 우항리 등 우리나라 해안 여러 곳에 존재하지만 이 곳 해안의 채석강은 이름 만큼이나 경관이 빼어날 뿐 아니라 수천만년 동안 바닷물에 깎이고 남은 바위절벽 면을 이루고 있는 자갈, 모래 등의 켜(층리)가 수평으로 길게 이어지지 않아 전체적인 모습을 볼 수 있는 것 이 많기 때문이다.

채석강의 절벽과 해수면 부근은 검은색의 이암과 실트암으로 이루어져 얇은 책을 연상케 하는 반면, 위는 층리가 다소 두껍게 나타나는 사암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곳곳에 얇은 역암층이 관찰된다. 반면 퇴적암 구조상 채석강의 아래층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이는 봉화봉 남쪽은 큰 바위들이 끼어있는 역암층이 두껍게 나타난다.

전체적으로 보면 아래로 갈수록 입자가 크고 위로 갈수록 입자가 작아지는 것이다. 이런 퇴적구조로 볼 때 입자가 크고 불규칙한 역암층이 쌓인 환경은 수심이 깊고 경사가 급한 호수 속이었으며, 층의 두께로 볼 때 그 시기는 비교적 길었다고 말할 수 있다. 입자가 고운 이암과 실트암이 쌓일 때는 비교적 평온한 수중삼각주 평원이었으며, 이런 시기는 상대적으로 짧았을 것이라는게 전승수 교수(전남대 지질학)의 분석이다.

한편 격포항 방파제에는 채석강 절벽의 사암 사이에 모난 돌로 이뤄진 역암층이 끼여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런 모습은 다른 퇴적암 절벽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다. 이는 입체적인 구조로 봐 호수 속 급경사면에 불안정하게 쌓여있던 자갈이나 바위들이 물속에서 사태를 일으켜 모래가 쌓여있던 더 깊은 호수 속으로 이동해 왔거나 경사가 급한 호수 속의 작은 물길을 따라 실려내려 왔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전 교수는 " 채석강은 미국의 그랜드케니언 등 규모가 큰 퇴적암층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퇴적구조가 많이 발견돼 바위절벽이 드러나는 길이는 길지 않지만 학술적으로는 세계적인 보존가치가 있는 퇴적암 관광지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펌

 

적벽강

 

채석강을 막 지나면 호젓한 해변, 적벽강이 있다.

만물의 형상을 닮은, 붉은빛이 감도는 암벽과 그 곳을 향해 달려가는 거친 물결이

송나라의 시인 소식(소동파)이 거닐던

중국 황주의 적벽강과 닮은 해변이라 이름을 따서 붙였다 하네요.

 

 

09:00

아침식사는

시원한 바지락 칼국수로 해결했다.

짐을 꾸려

격포에서 부안

부안에서 군산가는 시외 버스를 타고 군산 터미널에서

장항으로 건너가는 배를 타기 위해 부두로 이동했다.

 

 

여러번 TV에서 보았던

군산과 장항을 오가는 배를 타니

갈매기들이 어서 오라 고래 고래 소리를 지른다.

 

 

 

 장항의 상징인

제련소 굴뚝은 내가 국민학교때 사진으로 봤는데 아직도 건재하고 있다.

서천에서 전어 축제가 있다기에 서천으로 이동

포구까지 가지 못하고 중간에 노래자랑도 하고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어

그곳이 전어 축제장인줄 알고 내렸으나 특화시장 축제라나.....

이왕 내린 김에

 1층은 어시장 2층은 횟집들이 즐비한 어시장에 들러 광어회와 전어회 그리고 매운탕에

술을 많이 마셔

일단

이번 여행은 이 곳에서 끝내기로 했다.

  

동행인에게 어제 산행이 너무 힘 들었나 보다.

내 의지가 아닌 남에 의해 변경 또는 취소 되는것이

내가 남과 여행하기를 꺼리고

혼자

여행 다니기를 좋아 하는 이유일지 모른다.

 

그것은

내가 타협과 양보의 기술이 부족함을 의미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