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牛馬처럼 걷는 경기 여행

(경기) 수원 화성(華城)

세계 문화 유산 수원 화성(華城)

 

수원의 화성(華城)은 1997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

 

'06.2.24일 오전 10:00 부평역에서 동행을 만났다.

오늘은

지난 번 융.건릉과 용주사 그리고 화성행궁만 구경을 하고 돌아왔기에

이번엔 화성을 직접 한 바퀴 돌아보며 운동도 하고 역사공부도 하기로 하고 

집 사람이 준비해 준 과일 도시락을 베낭에 넣고 전철을 타고 수원에 도착하였다.

 

   화성은 조선조 22대 정조대왕께서 아버지 사도세자가 당쟁으로 인해 뒤주속에서

참혹하게 죽음을 당한 것을 슬피 생각하다 즉위 하자 아버지의 고혼을 위로키 위해

유해를 양주 배봉산(지금의 동대문구)으로부터 수원 남쪽 화산으로 전봉하고, 정조 18년

1월 부터 20년 9월까지 2년 10개월에 걸쳐 성곽을 축성한 것이다.

 

(화성 안내도)

 

 

▲ 화성은 실학자인 유형원과 정약용의 성설을 설계의 기본 지침으로 삼아, 영의정 채제공이

성역을 주관하고 화성유수 조심태등이 이룩한 것으로 우리나라 성곽중 가장 과학적으로

구조물을 배치하고 우아하고 장엄한 면모를 갖춘 것이다.

거중기[擧重機]
 

움직 도르래를 사용하여 무거운 물체를 들어올리는 데 이용한 도구.

 

거중기, 벽골제수리민속유물전시관 소장
조선 후기 실학자 정약용(丁若鏞)이 만든 것이 유명하다. 정약용의 〈기중도설 起重圖說〉에 그림과 함께 설명이 상세히 실려 있는데, 그는 이 장치를 1792년 수원성을 쌓을 때 사용하여 상당한 효과를 보았다. 정약용이 이를 만들게 된 것은 그의 창의적 발명이 아니라 정조가 그에게 왕실에 있던 서양과 중국의 기술서적을 주어 연구하게 한 결과였다. 1627년 중국에서 예수회 선교사 테렌즈[鄧玉函] 등이 지은 〈기기도설 奇器圖說〉이 참고가 되었다.

 

   성곽은 동서남북으로 관문이 있는데 북쪽은 장안문長安門, 남쪽은 팔달문八達門,

서쪽은 화서문華西門, 동쪽은 창룡문蒼龍門이 있고 각 문의 사이에 적정을 관찰하는

공심돈을 만들었고 서장대, 동장대를 만들어 군사를 훈련시키고 봉돈을 비롯 각 5개씩의 포루와

 2개의 노대, 4개의 각루 그리고 수원천 위에 북수문(화홍문), 남수문(유실)을 축조하였다.

 

   화성의 둘레는 5,744m, 면적은 130ha로 동쪽지형은 평지를 이루고

서쪽은 팔달산에 걸쳐 있는 평산성의 형태로 성의 시설물은

문루 4, 수문 2, 공심돈 3, 장대 2, 노대 2, 포(鋪)루 5, 포(砲)루 5, 각루 4, 암문 5,

봉돈 1, 적대 4, 치성 9, 은구 2등 총 48개의 시설물로 일곽을 이루고 있으나

이 중 수해와 전란으로 7개 시설물(수문 1, 공심돈 1, 암문 1, 적대 2, 은구 2)이 소멸되고

40개 시설물이 현존하고 있다. 

 

(보물 제 402호 팔달문)

 

버스로 팔달문에서 내려 팔달문(남문)을 구경하고  팔달산 성벽을 따라  오르니

소나무 숲이 우거지고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명상 음악이 분위기를 한껏 돋구고

수원 시내와 지난 주에 다녀온 화산도 멀리 볼 수 있었고

서호와 수원의 광교산 등 수원 근교를 한 눈에  볼 수 있어 너무 좋았다.

입장료 1,000원

 

 

서장대

서장대는 팔달산의 산마루에 있는데 유좌(酉坐) 묘향(卯向)이다.

위에 올라가서 굽어 보면 팔방으로 모두 통한다.

석성[석성산]의 봉화와 황교(皇橋)[대항교]의 물이 한 눈에 들어오고,

한 성의 완급과 사벽(四壁)의 허실은 마치 손바닥 위를 가리키는 듯하다.

이 산 둘레 백리 안쪽의 모든 동정은 앉은 자리에서 변화를 다 통제할 수 있다. 

그래서 돌을 쌓아서 대(臺)를 만들고 위에 층각(層閣)을 세웠다. 

문지방 위에 임금께서 쓰신 큰 글자[화성 장대(華城將臺)]로 편액을 붙였다. 

 
서장대에서 멀리 연무대를 바라보니 옛날의 어떤 장면이 떠오르며

마치

내가 정조대왕이 되어 동행인을 장군으로 호칭하며 한바탕 웃었다.

 

도중에

벤치에 앉아 집 사람이 정성스럽게 싸 준 과일 도시락(딸기,배, 밤, 토마토)과

소세지, 초콜릿으로 간식을 나눠 먹고 웅장한 장안문(북문)을 구경하였다.

 

(사실상 화성의 정문인 장안문)

 

장안문 

장안문[편액은 전 참판 조윤형(曺允亨)이 썼다]은 성의 북문이다.
성과 만나는 곳에서 다시 凸의 반쪽 모양으로 층을 만들었는데 높이는 9척으로

각기 총안을 1구멍씩 뚫었다. 안쪽은 둘레가 평평한 여장이며 옹성 위는

모두 네모난 전()을 깔고 좌우 끝에는 벽돌로 된 홍예에 작은 판문을 설치하여

성의 위와 통하게 하였다.  

 

장안문을 지나 성벽을 따라 한참 걸으니 어디선가 갈비내음이 코를 자극한다.

지난 번에 점심을 먹었던 연포 갈비집이다. 거기가 화성에서 아름답기로 소문난

화홍문과 방화수류정이 있다.

 

화홍문은 수문의 기능과 7칸의수문위에 축조된 문루가 하나의

예술픔으로 조화를 이루어 방화수류정과 함께 한폭의 그림을 연상케 한다.

 

 방화수류정 아래 성 밖의 원형의 연못과 주위에 늘어진 수양버들,

물위에  노니는 오리 한 쌍을 바라보니

달 밤에 술 한 잔 마시며 여기에 앉아서 멋진 시를 쓰고 싶은 마음 간절하였다.

 

방화수류정을 지나 언덕을 오르니 확트인 연무대의 너른 잔디밭이

따사로운 햇살을 받으며 마음을 평온하게 해 준다.

동장대에서 연무대에서 훈련하는 병사들을 생각하며

잠시 쉰 다음

 

봉화대를 지나 좀더 가게 되면 아직 복원 되지 않은 곳이 있고

저만치 팔달문이 보이면 화성 일주의 끝이다.

 

 

  화성의 축성 동기 군사적 목적보다는 정치, 경제적 측면과 부모에 대한 효심에

의해 이뤄진 것이다. 그리고 도시 기반 시설인 문, 도로, 다리, 상가 등을 설치하고

생산기반시설인 저수지와 둔전을 경영함으로 계획된 신도시를 건설하였다.

 

화성행궁

  행궁은 국왕이 지방에거동시 머물던 별궁으로 화성행궁은 정조대왕이 원행시

임시 거처하던 곳으로 평시엔 관아로 활용 되었습니다. 봉수당과 장락당을 비롯한

총 33동 576칸 규모의 조선시대 최대 규모의 행궁이었으며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열고 노인잔치를 여는 등 효를 몸으로 실천하던 장소였습니다.

 그러나 일제시기에 훼손되어 1996년 화성축성 200주년을 맞아 1단계 복원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팔달문 까지 화성 일주를 하니 약 3시간이 소요 되었다.

멋진 데이트도 할 수 있고, 한 바퀴를 돌면 운동도 되고, 역사공부도 할 수 있어

일석 삼조의 효과를 거두었다.

날씨가 봄 날 같아 구경 온 사람들이 평일 임에도 많았고

우리의 문화를 국민들이 사랑한다는 것에 기분이 좋았고 다행스러웠다.

 

또한

화성 주변의 화장실을 들렀는데 깜짝 놀랐다.

너무 깨끗하고 아름답게 꾸며져 있어

여느집 안방보다 더 청결하고 좋았다. 좋은 기분으로

계단을 내려오니 재래식 큰 시장을 만나게 된다.

갖가지 봄 나물들과 야채, 과일들이 길바닥과 상점에 즐비하고

사람들의 바쁜 몸 놀림과 사람 사는 내음을 한 껏 느끼며

중화요리(쟁반짜장과 짬뽕)에 소주 한 병을 마시고 화성 관광을 마무리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