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牛馬처럼 걷는 경기 여행

(경기) 융. 건릉 그리고 용주사 여행

수원 근교의 융. 건릉 그리고 용주사 여행('06.2.16)

 

아침 8시에 부랴 부랴 블러그에 오늘 올릴 글을 정리하여 올린 후

집 사람이 넣어준 과일 도시락을 챙겨 베냥에 넣고 9시에 집을 나섰다.

서울 구로역 수원행 3-3에서 10시에 동행을 만나기로 하였기에.

 

사실

며칠 전 부터 발이 걸을 수 없을 정도로 아파 정형외과에 다니며 주사와 물리치료를 받았으며

약속을 지키기 위해 최소한 통증이라도 없게 약을 먹으며 전철을 탓다.

성격탓이리라.

당연히 약속을 뒤로 미루면 되는데 어리석음이리라.

약속을 꼭 이렇게라도 지켜야 되는 줄 알고.

 

구로역에서 천안행 전철을 타고 수원역에 내렸다.

오래전에 수원에 왔을 땐 볼품없는 역 건물이였는데  역사가 산뜻한 새 건물로 시설도 편리하게 잘 지어져 있어 깜짝 놀랐다. 

관광 안내소에 들러 융. 건릉과 용주사 그리고 화성(수원성)에 대해 설명을 듣고 지도 한 장을 얻어

먼저

사도세자와 정조왕이 묻혀있는 융.건릉을 가기로 했다.

수원 역 남쪽 버스정류소에서 버스를 타고 3~40분쯤 후 융.건릉에 도착 하였다.

 

 

입장료를 내고 먼저 사도세자의 융릉을 보고 다음은 정조왕의 건릉을 보았다.

평일이어서인지 한 그룹의 관광객들만 볼 수 있었다.

인상적인 것은

정조 왕의 건릉보다 사도세자의 융릉이 멋지게 꾸며졌고 주위의 풍광도

사도세자의 융릉쪽이 소나무도 울창하고  나무들이 많고 잘 조성 되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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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릉(隆稜)

사적 제 206호
위치 : 경기도 화성시 태안읍

융릉은 조선 제 22대 정조의 아버지인 장조(1735-1762)와 그의 비인 현경왕후(1735-1815) 홍씨가 묻힌 곳이다. 1749년(영조25년) 부왕을 대신하여 서정(庶政)을 하면서, 정치적 견해를 달리하는 노론(老論)들과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김씨, 숙의 문씨 등의 무고(誣告)에 의해 영조의 미움을 사 영조 38년(1762) 뒤주 속에 갇혀 세상을 떠났다. 그 후 영조는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의미로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렸고, 묘호를 수은묘(垂恩廟)라 하였다. 그의 아들 정조가 즉위하자, 장헌(莊獻)으로 추존되었다가 1899년(광무 3년)에 다시 장조(莊祖)로 추존되었다. 장조의 무덤은 경기도 양주 배봉산(현재의 동대문구 휘경동)아래에 있었는데 정조가 수원 화산(花山)으로 옮겨 현륭원(顯隆園)이라고 하였고, 장조로 추존된 뒤 능호를 융릉(隆稜)으로 높였다. 현경왕후는 영의정 홍봉한의 딸로 1744년(영조 20년)에 왕자세빈으로 책봉되었다. 장조가 세상을 떠난뒤 혜빈(惠嬪), 정조 즉위년에 궁호를 혜경(惠慶)으로 올렸고, 뒤에 사도세자가 장조로 추존되면서 현경왕후에 추존되었다. 남편의 참사를 중심으로 자신의 한 많은 일생을 자서전적인 사소설체로 적은 한중록(閑中錄)을 남겨 궁중문학의 효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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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릉은 합장릉으로 동.서.북 3면에 곡장(曲薔)을 두르고, 봉분은 모란과 연화문(蓮華紋)을 새긴 병풍석을 둘렀는데 난간석은 생략되었다. 그러나 방위표시를 위해 병풍석 위에 꽃봉오리 모양의 인석(引石)에 문자를 새겨 넣었다. 봉분 바깥으로 석호(石虎)와 석양(石羊)을 각각 2기씩 배치하여 봉분을 호휘하고 있다. 봉분앞에는 상석(床石), 망주석(望柱石)과 장명등(長明燈), 문인석(文人石)과 무인석(武人石), 석마(石馬)들을 배치허였는데, 추존왕릉임에도 무인석까지 배치한 점이 중요하다. 또한 제향(祭享)을 지내는 정(丁)자 모양을 한 정자각(丁字閣), 정자각 뒤로 제향 후 축문을 태워 묻는 사각형의 석함인 예감(濊坎), 비를 안치하는 비각(碑閣), 제물을 준비하는 수라간(水喇間), 제향후 축문을 태워 바라보는 곳인 망료위(望燎位)등의 부속시설이 있다. 신문(神門), 홍전문(紅箭門)에서 정자각까지는 두 사람이 걸을 폭의 신도(神道)와 어도(御道)로 구분하였고, 정자각 그 아랫단 왼편까지 넓게 박석(薄石)을 깔았다. 융릉은 누가 보아도 능 조영에 정성을 들인 정조의 효심을 한눈에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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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릉(健陵)

사적 제 206호
위치 : 경기도 화성시 태안읍

건릉은 정조(1776-1800 : 재위, 1752-1800)와 효의왕후(1753-1821) 김씨가 묻힌 곳이다. 정조는 장조(莊祖)의 아들로 1759년(영조 35년)에 세손에 책봉되었다. 1762년 장헌세자가 비극의 죽음을 당하자 영조의 맏아들 효창세자의 후사가 되어 왕통을 이었다. 1775년(영조 51년)연로한 영조를 대신하여 대리청정(代理聽政)하였고, 영조가 승하하자 1776년에 왕위에 올랐다. 정조는 아버지인 왕헌세자가 당쟁에 희생되었기에 왕권을 강화하고 체제를 재정비하기 위하여 영조 이래의 기본정책인 탕평책을 계승하였다. 왕실의 도서관인 규장각(奎章閣)을 설치하였고 새로운 인물들을 대거 등용하여 새로운 혁신 정치를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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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임진자(壬辰字).정유자(丁酉字)등의 새로운 활자를 만들었으며, [속오례의(續五禮儀)], [국조보감(國朝寶鑑)], [대전회통(大典會通)], [증보동국문헌비고(增補東國文獻備考)] 등의 많은 서적을 편찬 간행하였다. 재위기간은 정조의 학문적 소양에 터전한 적극적인 문화 정책의 추진과 선진문화인 중국의 건륭(乾隆)문화영향 등으로 문화적인 황금시대를 이루어 조선후기 문예부흥기를 이루었다. 효의왕후는 청원부원군 김시묵의 딸로 1762년(영조 38년) 세손빈으로 책봉되었으며, 정조가 즉위하자 왕비가 되었다. 1821년(순조 21년) 창경궁에서 승하하였다. 건릉은 합장릉으로 동.서.북 삼면의 곡장에 병풍석을 두루지 않고 난간석만 둘렀으며 다른 상설 내용은 융릉의 예를 따랐다.

 

용주사

              융건릉을 빠져 나오면 1.7km지점에 숲으로 둘러싸인 용주사가 있다.
           행정구역상으론 태안읍 송산리지만 융건릉을 모신 화산 뒤쪽인 동쪽기슭이다. 이곳엔 본디
           신라 문성왕 16년(854)에 염거화상이 창건한 갈양사가 있었다. 고려 광종21년(970)에는 우
           리나라에서 최초로 수륙재를 개설하는 등 청정하고 이름 높은 도량이었으나 병자호란때 소
           실된 후 폐사가 되었으나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화산으로 옮기면서 절을 다시 일
           으켜 원찰로 삼았고 낙성식날 밤 정조가 꿈을 꾸니 용(龍)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여 절이
           름을 용주사(龍珠寺)라 했다고 전한다.                                   
           정조는 용주사를 중창할 때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을 목판에  새겨 보존하도록 명을 내리
           고 당대 제일의 화가 김홍도에게 맡겨 아름답게 꾸미도록 했다. 50여 목판과 함께  대웅전
           옆 잔디밭에는 10개항에 이르는 부모은중경을 새긴 탑비가 우뚝 서 있다.
           대웅전 후불탱화는 김홍도의 지휘로 그려진 걸작이고 정조대왕이 심었다는 대웅전 앞 회양
           목은 수령이 무려 200여년이 넘는 천연기념물 제264호이다.      
           범종각의 동종도 상원사 동종, 국립경주박물관의 에밀레종 등과 더불어 손꼽히는 걸작이 

           역시 국보 제120호이다.  

 

마침

바람이 불어 대웅전의 풍경이 뎅그렁 뎅그렁 울려

좋은 징조가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절의 규모는 크지 않았으나 오밀 조밀 짜임새가 있었다. 

느끼는 것이지만

절에 들어가는데 입장료를 내는 것은 참으로 우습다.

일부러라도

사람들을 절에 오게하여 포교를 하여야 함이 옳을 것 같은데

돈을 내고 들어가야 하다니....

교회나 성당에 들어갈때도 돈을 내지 않음과 같이

절에도 그렇게 함이 좋을 것 같은 생각이다.

 

수원시내로 나오는 버스가 연결이 잘 안되어 약 30분을 길 거리에서

서 있다가 겨우 버스를 타고 수원으로 나와

화성을 구경하기 위해 팔달문을 지나 버스에 내려 화성행궁을 구경하고

점심을 먹기 위해 화홍문 근처의 연포 갈비집에서

수원 한우 갈비에 식사를 하고 술도 한 잔 하였다.

늦은 점심에 술도 마시고

컨디션이 좋지 않아

아쉬운 마음으로 화성은 다음에 둘러 보기로 하고 전철에 몸을 실었다.

 

찾아 가는 길

 

 1) 서울과 오산을 잇는 1번 국도의 태안읍 병점 육교에서 서쪽으로 약1.5km 정도 가면 
            안용  중학교를 지나 수원대학교 방향으로 1.5km 더 가면 용주사가 나오며,

            길 우측에 위치해 있다.  
                         
           2) 신갈IC에서 수원시내로 진입, 동수원 사거리에서 좌회전 해 계속 남쪽으로 가다 7.8 km
              지점인 병점주유소 앞 병점삼거리에서 우회전 (정서쪽)하여 3km지점
           3) 북수원 I.C에서 오산방면으로 내려가서 수원공설운동장, 동수원 사거리를 거쳐  내려가
              면 병점삼거리가 나온다. 여기서 정남방향(서쪽)으로 1.5km 가다가 안녕리 지나 용주사
              로 오면 된다.   
           4) 동수원IC 또는 북수원IC에서 수원시내로 진입, 수원역 지하차도(세평지하도)를 이용 발
              안/남양 방면으로 우회전한 후 고색동을 지나 오목천 삼거리에서  좌회전한다.  여기서
              약 500m가면 발안/태안/수원대 방면의 수영리 사거리가 나온다. 여기서 다시 태안/수원
              대 방면으로 가서 융건능을 지나 1.7km 직진하면 좌측에 위치해 있다.

대중교통


           수원남문(팔달문), 수원역 - 시내버스 24, 24-1, 46, 46-1번
           수원영통, 화성시 병점 - 시내버스 34, 34-1
           화성동한, 병점 - 시내버스 50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