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牛馬처럼 걷는 서울 여행

(사적 제143호) 서울 문묘(文廟)와 성균관(成均館)

 

언제 : 2023년 12월 30일 토요일

어디 : 서울특별시 종로구 성균관로 31

 

 

서울 종로구 성균관로 31에 위치한 조선의 국립고등교육기관이자 최고학부인 성균관은 공자를 위시한

성현들이 모셔진 유교의 사당인 문묘도 함께 있으며,

면적은 81,673㎡. 태학(太學), 문묘(文廟), 반궁(泮宮) , 행단(杏壇)이라고도 한다.

 

1964년 11월 10일 사적 제143호로 지정되었으며 문화재로서의 공식 명칭은

'서울 문묘와 성균관(Seoul Confucian Shrine and Seonggyungwan National Confucian Academy)'

이다.

'성균관'이라는 이름에서 '성균(成均)'은

성인재지미취(成人材之未就), 균풍속지부제(均風俗之不齊) 라는 말의 각각의 앞 글자들을 따온 것으로,

'인재로서 아직 성취하지 못한 것을 이루고,

풍속으로써 가지런하지 못한 것을 고르게 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매년 봄과 가을마다 유교의 성현들을 제사하는 석전대제가 거행됨에 따라

한국에서 유일하게 팔일무와 더불어 종묘제례악에 비견되는 문묘제례악이 정기 연주되는 장소이며,

이것은 중국으로 역수입되어

문화대혁명으로 실전되었던 공묘의 제공대전을 가까스로 재현할 수 있게 되기도 했다.

 

 

 

하마비와 탕평비각(下馬碑. 湯平碑閣)

 

비각 안의 탕평비는 1742년(영조 18)에 세운 것이다.

영조는 지나친 당쟁 피해를 막기 위해 능력에 따라 공정하게 관리를 뽑는 탕평책을 펼쳤고,

이 비를 세워 그 의미를 널리 알렸다.

영조가 직접 쓴 " 周而弗比 乃君子之公心 比而弗周  寔小人之私意 "라는 비문은 

"두루 사귀어 편당을 짓지 않는 것이 군자의 마음이고, 편을 가르고 두루 사귀지 못하는 것이 소인의 마음이다."

라는 뜻이다. 비각 오른쪽의 하마비에 새겨진 " 大小人員皆下馬 "는 

"높고 낮은 모든 사람은 이곳에서부터 말에서 내리라"는 뜻이다.

 

하마비( 下馬 碑)

 

 

 

 

- 삼문(三門) -

삼문 양쪽에는 큰 은행나무가 서 있는데, 대성전 은행나무로 시도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대성전 좌우에 동무 서무

 

 

방학 중일 터인데

한 무리 학생들이 성균관에 대해 안내자의 설명을 듣고 있다.

 

 

대성전 현판 : 석봉(石峯) 한호(韓濩) 친필

 

 

 

묘정비각( (廟廷碑閣)

서원의 건립취지와 그 서원의 주인, 곧 주벽(主壁)으로 모시는 인물에 대한 추앙의 문장 등이 적혀 있어

일명 서원비(書院碑)라고도 한다.

당대의 인망이 높은 인사의 글을 받아 명필의 글씨로 새기는 것이 보통이다.

 

서원은 본래 선비들이 모여 강학(講學)하는 곳을 말하나

조선시대는 모든 학자들이 추앙하는 현인을 추모하는 곳이 되었다. 따라서, 서원을 설립하는 데는 반드시

뜻이 앞서고  여기에 모시는 주인공이 있어야 하며,

또 모든 유림의 뜻이 모아져야 했다.

 

 

제기고 - 수복청 -진사청

 

 

 

 

 

 

 

 

명륜당 마루 천정에 걸린 현판들 

 

 

명륜당에서 본 동재와 서재

그리고 마당 중앙 두 그루 은행나무(천연기념물 제59호)와 눈 덮인 대성전 후면

 

 

 

 

 

 

비천당( 丕闡堂)

재생(齋生)들의 학습장소 또는 임금이 성균관에 친림(親臨)하여 과거를 시행할 때 시험장소로 사용되던 곳이다.

규모는 명륜당(明倫堂)과 같이 남향으로,

중앙에 정청(正廳)이 있고, 좌우에 협실(夾室)이 있는데 모두 25칸이다.

 

 

- 진사식당 -

 

 

 

 

향관청

원래 제사에 사용하는 향과 축문을 보관하는 곳이었으나, 

주로 제사 업무를 주관하는 관리들의 사무실 및 공관 역할을 하였다. 향관청 좌우에 있는 동월랑과 서월랑은 

성균관의 감사를 담당하는 감찰 집사들이 사용하던 건물이다.

 

 

 

존경각과 욱일각

 

 

문묘란

유교를 집대성한 공자나 여러 성현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드리는 사당을 말한다.
문묘는 크게 제사를 위한 건물들이 있는 대성전 구역과 학문을 갈고닦는 건물들이 있는 명륜당 구역으로

나누어진다.

조선 태조 7년(1398)에 처음 세웠으나

정종 2년(1400)에 불에 타 없어졌고, 태종 7년(1407)에 다시 지은 것도 임진왜란 때 타버렸다.

지금 있는 건물은 임진왜란 후에 다시 지은 것이다.

대성전과 명륜당은 담장을 사이에 두고 남북으로 분리되어 있다.

대성전 서우(보물 제141호) 북쪽에는 제사 때 쓰는 도구를 보관하는 제기고와 잡다한 것을 두는 잡사가 있다.

명륜당을 중심으로 존경각과 향관청, 비천당, 계성사가 있으며,

남쪽 좌우에 유생들이 살면서 글을 읽던 동재와 서재가 남북 방향으로 길게 배치되어 있다.

동재 동편에는 식당이 있고, 그 위쪽으로는 창고, 육일각, 잡사가 배치되어 있다.

문묘는 제향의 공간일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유생들이 공부하는 유교의 중심지로

건축사 연구의 중요 자료로서 전통과 역사가 깊이 배어있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