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牛馬처럼 걷는 인천 여행

(강화) 사적 제130호 삼랑성(三郞城)의 가을

언제 : 2023년 10월 20일 금요일

어디 :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온수로 635

 

강화 삼랑성은 일명 정족산성(鼎足山城)이라고도 한다.

성을 쌓은 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단군이 세 아들에게 성을 쌓게 하고 이름을 삼랑성이라 했다는

기록이 <고려사>에 남아 있다.

 

성안에는 삼국 시대에 창건된 전등사가 있다.

고려 시대에는 임시로 지은 궁궐인 가궐(假闕)이 있었으며, 조선 시대에는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는 

정족산 사고와 왕실의 족보를 보관하는 선원보각이 있었다.

이곳은 조선 고종 3년(1866)에 프랑스 군대가 침공한 병인양요 때 양헌수 장군이 이끄는 군대가

동문과 남문으로 공격해 오던 160여 명의 프랑스군을 무찌른 곳으로 유명하며,

동문안에는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양헌수승전비가 있다.

 

삼랑성은 강화산성과 더불어 고려 - 조선시대에 수도 개경과 한양의 외곽을 방어하는 매우 중요한 곳이다.

강화 삼랑성은 유구한 역사를 가진 곳으로, 예로부터 신성한 곳이라는 인식이 있었다.

 

* 병인양요 : 고종 3년인 1866년 흥선대원군의 전주교도 학살과 탄압에 대항하여

프랑스 군대가 강화도에 침범한 사건

 

 

 

 

 

 

 

 

삼랑성 남문- 종해루

삼랑성은 동문, 서문, 남문, 북문 4개 성문이 있는데, 남문만 누각으로 지었고,

나머지 3개는 돌로 쌓은 석문이다.

 

 

가을색

 

 

삼랑성

삼랑성 남문에서 성곽을 따라 한 바퀴를 걷는다.

전등사를 품은 정족산을 한바퀴 돌아 쌓아 진 석성으로 멀리 동문 방향의 산등성이를 막은 성벽과

산을 넘어가는 성벽이 보인다.

 

 

 

 

 

 

 

 

 삼랑성에서 본 주변 풍경

장흥저수지 너머 서해 바다와 조그만 섬 세어도,

김포와 강화를 경계하며 흐르는 염하가 가늘게 보이고 그리고 염하에 초지대교가 보인다.

 

염하강은 서해에서 한양으로 가는 뱃길이라

  개화기 때 이곳은 미국과 프랑스 그리고 일본과 피비린내 나는 전투가 벌어진

역사의 현장이다.

 

 

 

 

 

삼랑성에서 본 마니산

강화 마니산에는 단군님이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는 참성단이 있다.

그리고

삼랑성은 성을 쌓은 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단군이 세 아들에게 성을 쌓게 하고 이름을

삼랑성이라 했다는 기록이 <고려사>에 남아 있다.

 

 

 삼랑성 서문

 

 

강화 선두리 들판 가운데 냇물은 망실지에서 흘러내리는 수로이다.

 

 

 

 

 

삼랑성 북문

 

 

 

 

 

 

삼랑성 동문에서 전등사 진입로

삼랑성 따라 가을 냄새를 맡으며 산길을 걷다가,

산몰랑에 서서 추수를 기다리는 가을 들녘을 넉넉한 마음으로 바라본다는 것, 

건강하게 걸을 수 있음이 행복이며,

 

가을 들녘 너머

염하에서 잡은  밴댕이 파닥거리는 모습과 소리를 상상한다는 것,

행복이고 말고

동물이 태어나 처음 동작이 젖을 먹는 것과 두 발로 일어서는 것 아닌가?

 

그러다

다시 흩어진 마음을 다잡고

삼랑성 동문에서 전등사로 진입하는데 정말 주변 단풍이 아름답게 물들었다.

특히

고목 너머 노랗게 물든 두 은행나무는 

노승나무와 동자승 나무 이야기로 유명하다.

 

노승 나무와 동자승 나무 이야기

 

조선조에 들어오면서 배불숭유의 정책으로 전국의 사찰은 조정으로부터 여러 가지 박해를

받게 되었다. 승려는 성곽을 쌓거나 다리를 놓는 일에 사역을 나가야 했고,

사찰에서는 제각기 특산물을 공물로 바쳐야만 했다.

그러던 어느 해, 관아에서 전등사 입구에 서 있는 은행나무 수확량의 두 배를 공물로 바치라고 한다고

동자승이 노승에게 전하였다.

 

전등사 노승은 걱정이 태산 같았다.

풍년이 들어야 열 가마니인데, 스무 가마니를 공물로 내라고 하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고민 끝에 노승은 도술이 뛰어난

백련사 추송 스님에게 도움을 청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동자승을 추송 스님에게 보냈다.

동자승과 함께 온 추송 스님은 은행열매가 더 열리게 하는 3일 기도에 착수했다.

마지막 날 늦은 오후 은행나무 앞에서 3일 기도가 막바지에 다다르자 주송 스님이 축원을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축원의 내용은 두 그루 은행나무가 앞으로 천년만년 열매를 맺지 않게 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뜻밖의 축원에 모인 사람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축원이 끝나자마자 먹구름이 몰려오면서 천둥 번개와 함께 돌풍이 몰아치고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관군들과 모여있던 사람들이 놀라서 모두 땅바닥에 엎드렸다가 고개를 들었을 땐

기도하던 추송 스님과 노승 동자승까지 모두 사라졌다.

 

사람들은 보살이 전등사를 구하기 위해 세 명의 스님으로 변해 왔다고 하였다.

이후 은행나무는 더 이상 열매를 맺지 않았으며, 긴 세월의 풍상과 역사의 상처를 안은 채

오가는 이의 발길을 멈추게 하고 있다.

 

 

 

 

 

전등사 전통찻집

 

 

 

 

 

이번 삼랑성과 전등사 가을 여행길에서 

스쳐 지나가버릴 뻔했는데 우연히 발견하여 가장 힘들게 그리고 자랑스럽게 담은 꽃으로,

 핸드폰으로 접사(接寫)한 사진이다.

 

 

전등사 무설전에서 본 풍경

 

 

 

 

 

 

 

 

 

 

 

 

 

 

 

삼랑성을 한바퀴 돌았으니

이제는 전등사를 한바퀴 돌며 전등사 가을 사진을 담아보련다.

 

나에겐 참 행운이 많다.

어쩌다 인천까지 와 어느덧 나이 일흔도 넘었는데,

그 행운의 하나는 

바로 전등사와 버스로 1시간 30분 거리에 산다는 것이다.

내 안에는 어렸을 적 어머니를 따라 교회를 다닌 기독교 신앙이 자리하고 있지만,

내가 힘들 때면 

전등사를 찾아 절길을 걸으면서 

다음을 다잡곤 했다.

 

오늘도 감사한 마음으로 전등사 가을을 만끽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