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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화유산

(프랑스 -18) 부르주 대성당(Bourges Cathedral; 1992)

세계문화유산(246)/ 프랑스

부르주 대성당(Bourges Cathedral; 1992)

 

상트르 주(Centre Region) 셰르 현(Department of Cher)에 위치한 12세기 말부터 13세기에 걸쳐 건축된 

부르주의 생 에티엔 대성당은 고딕 예술을 대표하는 위대한 걸작으로 설계에 있어 균형미와 통일성을 갖춘 건축물로서 칭송받는 건축물이다. 팀파눔(tympanum; 건축에서 정면에 있는 아치형 문의 윗부분)에 새겨진 조각, 아름다운 스테인드글라스로 장식한 창문이 특히 경이롭다. 건축의 아름다움 외에도 중세 프랑스에서 기독교의 권력을 증명하는 유적이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부르주 대성당은 고딕 건축의 발달 면에서뿐만 아니라 중세 프랑스에서 기독교 권력의 상징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닌 유적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조화로운 균형미와 최고 수준의 장식으로 놀랍도록 아름다운 공간을 꾸민 점이다. 프랑스 남부를 바라보는 카페 왕조의 얼굴이라 할 수 있는 생 에티엔 대성당은 독특하게 설계되었다.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건축가가 선택한 이 건축물의 건축 양식은 수랑이 없고 당시에 유행하던 매우 근대적인 조형 효과를 지닌 설계에 기초한 것이었다. 부르주 대성당은 지금도 중세 도시의 반목조 주택에 둘러싸여 있다. 1100년 이후 왕의 도시 부르주는 규모가 커지고 번창했다. 새로운 고딕 대성당은 아키텐의 관구장, 부르주의 대주교들의 권위를 찬미하는 곳이었다. 3세기 이후 이 대성당에는 기독교를 숭배하는 예배당이 있었다. 그때 아바리쿰(Avaricum)이 갈리아 최초의 기독교 도시가 되었다. 이곳에 성 스데반에게 봉헌된 로마네스크 양식의 초기 그리스도교 교회당이 세워진 것은 11세기로 이후 주위에 다른 종교적 건물들이 밀집하게 되었다.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은 자그마한 성 스데반의 납골당은 현재의 부르주 대성당 지하에 남아 있다. 12세기에 수랑과 기념비적인 서쪽 파사드를 신축했다. 1190년대 초에 화재가 일어났으며,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을 건설하던 시기와 같은 때에 이 대성당을 전면 개축했다. 1195년 앙리 드 쉴리(Henri de Sully) 대주교는 대성당을 재건하기로 결정하고 고딕 양식으로 애프스(apse)의 건립부터 착수했다. 작업은 13세기 동안 계속되었으며, 단순하고 조화로운 설계에 따라 새로운 대성당이 건립되었다. 이 대성당은 네이브(nave) 주위에 예배소들이 자리하고 있으며 이중 통로, 이중 앰뷸러토리(ambulatory)가 있고 수랑이 없는 매우 단순한 구조이다. 측벽의 경관과 내부 공간의 통일성은 부르주 대성당의 우수한 특징으로 꼽힌다. 애프스에 서면 건물 전체를 한눈에 볼 수 있다. 피라미드형 상승 구조 구성과 대담한 이중 플라잉버트리스(flying buttress)를 사용했는데 이것은 건물 내부의 입체감 있는 조망과 조화 효과를 높이기 위한 것이다. 1199년 전 시토회 수도원장 기욤 드 당종(Guillaume de Dangeon) 대주교가 앙리 드 쉴리 대주교의 뒤를 이었다. 그는 부르주 대성당의 발전과 도상학적 기획의 정의에 지대한 역할을 했는데 성당의 곡선 장식, 스테인드글라스 창 등 성당 전체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 특히 스테인드글라스는 이단을 물리치는 종교 원리를 주장하기 위한 것이다. 네이브와 서쪽 정면(facade)을 포함한 2차 건설 사업은 1230년경에 마무리되었다. 파사드는 으리으리하게 조각된 5개의 정문으로 이루어졌다. 첫 번째 건축가의 뒤를 이은 건축가들은 공간에 통일감을 주는 데 효과적인 방법으로 수랑을 없앴다. 13세기 초에는 3단으로 된 성가대석에 스테인드글라스 창을 냈다. 스테인드글라스에는 최후의 심판일의 그리스도, 요한 계시록, 성모 마리아가 그려져 있다. 성 에티엔 옆에는 수공업 길드가 만든 신약과 구약에 나오는 장면, 성자들과 순교자들의 삶, 부르주 대주교, 예언자, 열두 제자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서쪽 파사드의 정문 문틀 널판에는 시간을 뛰어넘는 사실적인 최후의 심판 조각이 새겨져 있다. 이 조각에는 지옥에서 악마들과 절망 속에서 고통 받는 많은 군상들의 모습이 표현되어 있다. 북문과 남문에 새겨진 조각과 서쪽 파사드에 조각된 최후의 심판은 당대 미술의 결정판이라 할 수 있다. 스테인드글라스의 질도 매우 높은 편이다. 이 유적지 내에 있는 다른 역사적 건물로는 13세기의 작은 헛간, 시청으로 변한 17세기 주교 궁의 부속 건물, 프랑스 고전주의 양식의 대성당 정원 등이 있다. 구조는 13세기에 완성된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하지만 다른 모든 고딕 양식의 대성당과 마찬가지로 많은 부속물이 수세기에 걸쳐 개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