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안성당
1960년 당시, 이곳 차이나타운에는 4,. 000여 명의 중국 화교가 거주하고 있었고,
소수의 화교 가톨릭 신자들은 답동 성당을 다니며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중국화교 신자들의 언어 소통과 민족 이질감으로 화교들을 위한 성당을 절실히 요구하게 되었다.
이에 미국 메리놀회에서 1960년 7월 17일 화교를 위한 선린성당을 설립하고,
중국 만주에서 사목 경험이 있고, 중국어에 능통한 고요셉 신부를 초대 신부로 임명하게 된다.
현 성당 건물은 초대 신부의 노력으로 1966년 6월 9일에 완공된 건물이다.
설립초기에는 중국 화교를 위한 성당이었으나,
초대 고요셉 신부가 노환으로 귀국하고, 중국 화교 신자는 감소하게 되고, 관할 구역 내 한국인 신자 수 증가로
한국인 성당이 필요하게 됨에 따라, 1972년 10월 1일,
해안성당으로 명칭을 바꾸고, 한/중 합동 본당으로 운영되다. 그 후 화교 신자가 감소함에 따라
한국인 성당이 되었으며, 1981년 2월 최기산 보니파시오 신부(전 인천교구장)가
첫 한국인 사제로 부임하였다. 현재 해안성당은 이 지역에서 치명당하신 10분의 순교자를 기리는
제물진두 순교 성지를 관할하고 있다.
그동안 여러번 인천 차이나타운과 한중문화관을 방문했었지만,
정작 이곳에 천주교 순교 성지가 있다는 것은 위 설명과 지도를 보고 알았다.
차이나타운에서 바라본 인천항
멀리 인천항 크레인 혹은 시설물이 보인다.
붉은색 건물이 한중문화관이며
바로 좌측 옆 십자가가 보이는 시멘트 건물이 제물진두 순교 성지다
제물진두 순교성지
제물진두(祭物津頭)는 서울 절두산(양화진두)과 함께 19세기 천주교인들의 대표적인 공개 처형장이다.
개화기 외세의 진입 관문이었고,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출발지,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의 입국 경로로서
한국 천주교 역사상 중요한 장소이다.
지금은 150여년에 걸친 도시화로 당시 관문으로서의 지형은 찾을 수 없고 추정지만 현존한다.
성당 내부로 들어가는 통로
겨우 두 사람이 비켜 설 수 있는 좁은 통로이나 한쪽 벽면에는 순교자들의 사진이 걸려 있고
통로 끝에는 성모 마리아상은 들어오는 사람을 맞이하며
좌측 문은 성당 내부이다.
인천 차이나타운 한중문화관 우측에는
2014년에 건립한 12평 규모, 높이 15m의 제물진두 순교성지 경당이 있다.
여러곳 성지를 다녀봤지만, 이렇게 좁고 작은 순교성지가 있음을 보고 마음 착잡하고 놀랐다.
그러나
이곳은 순교터 위에 세운 성지 기념관으로 하늘로 향하여 피어오르는 꽃봉오리로 순교자들을 표현했고
하느님께 순교자들을 위해 두 손 모아 기도하는 모양을 형상화했다.
순교자들의 명패를 따라 들어서면
경당 내부는 30명도 앉을 수 없을 비좁은 성당이다.
벽면에 걸린 사진
제물 진두에서 1868년과 1871년의 순교자
왼쪽부터 ①손넙적이(베드로), ②김씨(손넙적이 베드로의 처), ③백치문 사도요한(손넙적이 베드로 사위),
④이마리아의 손자, ⑤형 이연구(이승훈 베드로 성현의 손자), ⑥동생 이균구(이승훈 베드로 손자),
⑦김아지, ⑧정씨(이승훈 베드로 성현의 손자 이재겸의 부인), ⑨이(손)명현, ⑩백용석
이상 10명의 모습을 하늘과 구름 속에 표현 하였고,
왼쪽에는 김대건 안드레아 부제가 작은 배를 이용하여 중국으로 가는 장면과
중간부에는 처형 장면을 묘사하고,
오른쪽에는 1888년 샬트르 성 바오로수녀회 소속 수녀 4명(프랑스국적2명, 중국국적2명)이
아이의 손을 잡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제물진두 순교성지에 건립된 15m 높이의 경당은
하늘을 향해 피어오르는 꽃 모양이자
순교자들을 위해 두 손 모아 기도하는 모양을 형상화한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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