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牛馬처럼 걷는 서울 여행

(용산) 백범 김구의 기념관과 묘(墓)

 

백범 기념관을 둘러보고

백범 묘와 삼열사 묘를 찾아 가니 백범 묘는 조용한데 삼열사 묘에는 어린이들의 놀이터처럼 

여러 어린이들이 소리를 지르며 뛰어다닌다.

삼열사의 묘에는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세 의사의 묘와 안중근의사의 가묘가 모셔져 있다.

 

어렸을 적부터 

 안중근, 윤봉길, 이봉창 의사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지만

백정기 의사에 대해선 잘 알지못했다. 

솔직히 백정기 의사의 호가 구파鷗波라는 것도 오늘 처음 알았다

특히

백범께서는 귀국하시어 

 윤봉길 尹奉吉(1908~1932)-이봉창李奉昌(1900~1932)-백정기白貞基(1896~1934) 의사의

유해 국내봉환을 가장 먼저 서둘렀다는 주변 사람의 얘기를 듣고

백정기 의사에 대해 알아본다. 

 

백정기 의사는 1896년 1월 19일(음)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신운리에서 출생하였다.

1919년 23세에 중국 봉천으로 망명서로군정서 홍범도장군 부대와 같이 활동했으며,

1924년 우당 이회영 집에서 거주하며 우관 이정규 등과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을 결성하여

항일독립운동에 매진했으며, 30년 <남화한인청년연맹>을 결성하였고, 32년 3월 상해 홍구공원에서

일본 천장절 및 전승축하식 폭파계획을 세웠으나

행사장 입장권 구입 실패로 거사하지 못했다고 한다

 

1933년 주중일본공사가 상해 육삼정에서 회동한다는 정보를 입수해

 <흑색공포단:BTP(Black Terrorist Party)>의 실행주역으로 뽑혀 대기하던 중거사 직전에 밀정에 의해

정보가 탄로나 현장에서 체포되었고그해 11월 무기징역을 받고 복역 중 34년 6월 옥중에서

지병 악화로 순국했다

비록 홍구공원과 육삼정 거사가 실패했으나민족정기를 바탕으로 항일독립운동에 매진한

그의 족적과 불굴의 사상이 너무나 뚜렷했기에백범 선생이 해방조국에 유해 봉환을 앞장섰을 터

정부는 1963년에야 대한민국건국공로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백범일지(보물 제1245호)

백범일지(白凡逸志)는 백범 김구 선생이 자신의 생애를 직접 기록한 자서전으로

'일지(逸志)'란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라는 뜻이다.

상권은 백범 김구 선생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무령으로 일을 하던 1928년, 독립전선에 목숨을 바치기로

결심하고 열 살 내외의 두 아들 인과 신에게 집안 내력과 자신의 지난 일을 알리고자

유서 대신 쓴 글이 담겨 있다.

하권은 우리 민족에게 독립운동의 경륜과 소감을 알리려고 쓴 글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충칭에 정착한 1941년에 집필을 시작하였으며, 임시정부의 활동을 담고 있다.

 

충칭(重慶) 임시정부 청사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중국 충칭에 정착하면서 오랜 피난생활로 인해 흐트러진

정부의 조직과 체제를 정비.강화하였고,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좌익진영과 통일을 이루었으며,

한국광복군을 조직하여 국내진입작전을 추진하였다.

이 모형은 임시정부의 마지막 청사로 1995년 충칭 롄화츠(蓮花沚) 38호에 복원하였다.

 

충칭의 대한민국임시정부 활동 지역도

 

김구가 안창호의 부인 이혜련에게 조국독립에 끝없는 헌신을 부탁하며 보낸 태극기(1941.3)

 

대한민국 임시헌장 -1944

제36차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확정, 공포된 대한민국임시정부 5차 개정 헌법 초안

 

장제스(蔣介石)의 글

1969년 서울 남산에 김구의 동상 건립을 기념하여 중화민국 총통 장제스가 보낸 글

 

 

임명장(任命狀) -1943.8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 김구가 이원순(李元淳)을 주미외교위원부위원으로 임명한 임명장

 

 

이승만(李承晩)의 편지 - 1944.11.24

이승만이 김구에게 활동 자금의 확보와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의 권한 행사 등이 약속되어야만

직무를 수행하겠다고 한 편지

 

 

김구 - 장제스 기록화

1943년 7월 김 구는 장제스를 만나 카이로회담에서 한국의 완전 독립을 요청하였다. 

장제스는 이를 수락하고, 카이로회담에서 한국의 독립을 보장한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1949년 6월 26일 서거, 그리고 ----

 

1949년 6월 26일 

백범 김구 선생은 안두희의 흉탄에 의해 그토록 바라던 통일 대한민국을 보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그날은 일요일이었고, 비보를접한 시민들이 경교장으로 몰려와 조문 행렬이 끊이지 않았다.

장례식은 '국가와 민족'을 합한 국민장, 10일장으로 결정되었다.

안장지는 생전 김구 선생의 뜻대로 삼으사(안중근 가묘.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의 묘와 

임정요인(이동녕, 조성환, 차리석)의 묘가 있는 효창원으로 결정하였다.

 

김구 선생이 서거한 후,

안두희는 현장에서 체포되어 무기징역 판결을 받았으니 15년 형으로 감형되었다.

그리고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이후,

안두희는 국방부 특명4호로 남은 형을 집행정지 처분 받고 육군소위로 복귀하였다.

3년에 걸친 동족상잔의 비극이 있었고, 전후(戰後) 처리 과정에서 김구 선생 암살 사건은 해결되지 않은 채

추도식조차 시행할 수 없었다.

 

1960년, 백범 김구 선생 서거 이후 첫 추도식에서 안두희의 배후를 밝히기 위한 

'김구선생시해 진상규명투쟁위원회'를 구성하여 당국에 진상 규명을 요구하였다.

1993년 국회에 '백범김구선생시해진상규명회 국회특별법제정청원서'를 제출하였고, 1995년에 이르러

국회 차원에서 진행된 법제사법위원회 산하 '백범김구선생시해진상규명조사위'는 

'백범 김구 선생 암살은 이승만 자유당 정권의 비호 하에 이루어진 정권적 차원의 범죄'로 규정 의결하고,

국회 본회의에 상정하였다.

 

김구 도장

백범 김구 선생이 평소 편지나 공문서에 사용하였던 도장

 

낙관(落款)

백범 김구 선생이 평소 자신이 쓴 글이나 휘호 등에 사용하였던 

관화(寬和), 백범(白凡), 김구(金九) 도장

 

백범 김구 선생 신발

 

 

백범 김구의 데스마스크(death mask) -1949.6.27

백범 김구 선생의 마지막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