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牛馬처럼 걷는 충남 여행

(합덕) 천주교회 - 신리성지

 

언제 : 2021년 11월 20일 토요일

어디 : 충청남도 당진시 합덕읍 평야 6으로 135

 

 

솔뫼성지에서 합덕버스터미널까지 걸어 나오니 약 20분 소요되었다.

 

원래 계획은 솔뫼성지에서 합덕성당을 거쳐 신리성지까지 버그내순례길을 걸으려고 생각했는데,

정오가 지나도 안개는 걷히지 않아

생전 처음 길에다 사방이 뵈지 않아 합덕 터미널에서 신리 가는 버스를

확인하니 13;50 신리행 버스가 있다.

 

2019년 12월 19일 합덕 성당을 방문할 때는 승용차 여행으로 

합덕 성당이 합덕 시내에 있는 줄 알았는데 합덕 버스터미널에서 합덕 성당이 2.3km 떨어져 있음을 알았다.

역시 여행은 걷는 여행이 좋다.

떠나기 전 갈 곳에 대한 공부하고 걸으며 보고 들으며 깨우치는 것이 좋기 때문이다.

 

14:10

신리성지에 도착하니 이곳 역시 안개로 희미하나 주변에 산이 없는 평야이다.

SNS에서 이곳 사진 담기가 좋은 곳이라고 알려져 있어서인지 많은 사람이 친구들과 어울려

사진을 담고 있다.

 

 

 

 

신리성지

신리성지는 조선 후기 천주교 박해시대에 이름난 교우촌(敎友村)으로

1866년대 중반에는 마을 사람 400여명이 모두 신자일 정도였다. 이곳에는 성 손자선(토마스)의 생가이자

프랑스 선교사 성 다블뤼 주교의 주교관이 자리하고 있어

교회 중심지 역할을 했다.

다블뤼 주교는 1866년 병인년에 위앵 신부, 오메트르 신부, 황석두(루카)와 함께 신리 인근 거 더리에서

체포되어 보령 갈매못에서 순교하였다.

다블뤼 주교는 체포되기 전까지 신리의 주교관에서 신유박해, 기해박해, 병오박해 때 순교한

이들의 행적을 조사하여 한국 천주교 역사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신리와 거더리는 문헌에 기록된 순교자만도 40여 명에 이를 정도로 많은 순교자를 배출한 마을이다.

성지 인근에는 32기의 무명 순교자의 묘와 손자선의 가족 순교자 묘 14기 등 40여 기의 순교자 묘가 있다.

 

이곳에는 손자선 성인의 당숙인 손치호(니콜라오) 순교자의 옛 집과 마을이 일부 보존되어 있어

순교자들의 체취를 느끼게 한다.

성당에서 북쪽으로 약 2km 지점에 무명 순교자들의 묘가 있다.

 

 

 

 

 

 

 

 

 

 

 

 

 

 

 

 

 

 

 

 

 

 

 

 

 

 

 

 

 

 

 

 

 

 

 

 

성 다블뤼주교관 - 손자선 성인의 생가

 

- 다블류 주교관 앞 마당에는 그 옛날에 치던 종이 달려 있다. -

 

 

1. 신해박해.辛亥迫害.1791년.윤지충 사건

1791년(辛亥, 正祖 15년)에 있었던 박해.

전라도 진산에서 윤지충(尹持忠)과 그의 외종사촌 권상연(權尙然)이 제사를 폐하고 신주(神主)를 불태운 이른바

진산사건(珍山事件)으로 인해 발생하였다. 

12월 8일(음 11월 13일) 윤지충과 권상연이 참수되고, 이승훈은 배교했음에도 불구하고

면직되고, 권일신은 유배 가는 도중 사망하고, 그 외의 교우들은 배교하고 석방됨으로써 박해는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그 결과 서학서의 구입이 금지되고 또 이미 들여온 홍문관(홍문과)의 서학서도 불태워지는 등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더욱 강화되었다.

 

2. 신유박해.莘酉迫害.1801년

1801년(신유년)에 일어난 천주교인에 대한 박해,

1800년(정조 24년) 6월(음) 천주교에 대한 비교적 온화한 정책을 써왔던 정조가 승하하자, 모든 정세는 천주교와 남인에게

더욱 불리하게 되었다. 정조의 뒤를 이어 순조(順祖)가 겨우 11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게 되고,

대왕대비(大王大妃) 정순왕후(貞純王后) 김 씨는 섭정이 되어 모든 정사를 마음대로 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왕대비는 원래가  노론벽파(老論僻派)에 속해 있었으므로,

집권하게 되자 천주교도들과 남인 시파(詩派)를 일망타진하려 하였다. 신유박해로

 교회의 지도급 인사들이 거의 사라졌을 뿐만 아니라 살아남은 교인들도 유배를 당했거나 생명유지를 위해 산간벽지로

 피신하지 않을 수 없어 거의 빈사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천주교회 는 그 후에도 전국적인 규모는 아닐지라도

 크고 작은 박해를 끊임없이 받으면서, 신앙을 굳게 지켜나갔고, 선교사를 다시 영입하려는 시도를 계속했다.

 

3. 기해박해. 1839년

1801년에 일어난 신유박해 이후 한동안 잠잠했던 천주교에 대한 박해는 1839년(헌종 5년)에 이르러 다시 시작되었다.

1839년이 기해년이었기에, 이때의 박해를 흔히 기해박해라 한다.

기해박해 때에는 조선에 들어와 활약하던 앵배르(Imbert)주교와 모방(Maubant)신부 샤스탕(Chastan) 신부 등

3명의 불란서 선교사와 더불어 모두 114명 이상의 신자가 순교를 하였다.

기해년의 박해가 일어나자 앵배르 주교는 순교자들의 사적을 기록하기 시작하였으며, 자신도 곧 체포될 것을 예감하고

그는 정하상과 현석문에게 순교자의 사적을 면밀히 조사하여 기록하는 일을 계속하도록 명하였다.

이 일을 부탁받았던 정하상은 곧 체포되어 처형되었지만, 현석문은 숨어 다니며

교우들로부터 모아들인 기해박해 순교자들의 자료를 정리하고 기록하여 '기해일기'란 책을 완성하였다.

이 '기해일기'는 한동안 실전되었다가, 1904년경 당시 제8대 조선교구장으로 임명된 뮤텔(Mutel)주교에 의해 한글본이

발견되어 이듬해인 1905년에 그대로 출판되었다.

이 '기해일기'에 의하면 당시에 순교한 사람이 모두 114명이 넘었다고 되어 있으나,

여기에는 78명의 순교사기만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 '기해일기'는 그 사료적인 정확성이 입증되어

여기에 기록된 78명 가운데 69명이 1925년 7월 5일에 복자위에 올랐으며, 

이들은 1984년에 성인품에 오르게 되었던 것이다.

 

*병오박해.1846년 헌종 12년

기해박해 후 7년이 지난 1846년 6월 5일, 김대건 신부의 체포를 계기로 시작된 병오박해는 9월 20일 종결됐다.

이 박해로 형벌을 받고 순교한 사람은 성직자 1명, 평신도 8명 등 모두 9명으로 1984년 모두 시성 됐다.

순위도 등산진에서 선주와 사공 등과 함께 체포된 김신부는 9월 16일 어영청을 거쳐 새남터로 끌려가 군문효수를 받았다.

그로부터 3일 뒤인 19일, 신앙을 굳게 지켜오던 현석문도 군문효수령을 받고 임치백, 남경문 등도 장사(장사)로 순교했다.

병오박해의 여파는 그다지 크지 않았다. 여러 차려의 박해를 겪어온 신자들은 박해소문을 듣고 피신했고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도 교우촌으로 피신했다.

순교자는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를 위시하여 현석문 가를로,남경문 베드로,

 한이형 라우렌시오, 우술임 수산나, 임치백 요셉, 김임이 데레사, 이간난 아가다. 정철염 가타리나 등이다.

 

4. 병인박해.丙寅迫害.1866년-1873년

조선조 말기인 1866년(高宗 3년)에 시작되어 1873년 대원군이 실각할 때까지 계속되었던 박해를 말한다.

피로 얼룩진 한국 교회사를 통해서도 병인박해는

그 규모와 가혹함과 희생자의 수에 있어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대박해였다.

 

이 박해의 주요 원인은 유교사상에 젖은 보수지배충의 서학(西學)에 대한 사갈시(蛇蝎視),
즉 천주교에 대한 이교도들의 증오심에서 발작한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척사(斥邪)를 요구한 박해자들은

"천주교 신자들이 윤리 도덕을 무시하고, 아비와 임금도 안중에 없으며 죽음을 가장 영광스럽게 여기는 족속으로,

재물을 가지고 사람을 유인한다"고 하여, 동양윤리의 이단자요 모든 악의 전형으로 몰았다. 위정자들은

 또 신유년(辛酉年, 1801년)의 이른바 황사영 백서(黃飼永帛書) 사건을,

한 교인 생각이 아니고 프랑스 군사력을 끌어들이는 것은 천주교의 신조인 것처럼 몰아세워

보수적인 배외사상(排外思想)을 부추기는데 이용하였다.

(카톨릭대사전에서)

 

 

- 신리 성당 -

 

 

 

 

 

- 신리 성당 종 - 

 

성당의 종소리

 

내 어렸을 적

살던 고향의 천주교회는 한옥 기와집이었다.

일제강점기 조선 사람이 다니던 소학교였다가 천주교회가 되었고,

내가 다녔던 국민학교는 일본인들이 다니던 학교다.

 

내 국민학생 때

한옥 천주교회 옆에 현대식 건물로 천주교회를 지었는데, 지붕이 기와가 아니라 스레트 지붕으로

 처음으로 스레트 지붕을 보았다.

 

학창 시절

방학 때 고향을 찾으면 방죽을 따라 걸으며 사색에 잠기곤 했는데,

너른 들판 강줄기 따라 여자만 갯물이 드나들고 해 질 녘 성당에서 들려오는 종소리는  밀레의 만종을 연상하며

꿈을 키웠다.

 

오늘 이곳 신리성지에서 가슴 시린 추억에 잠기며

어느새 70의 노년이 되어도 아릿힌 그 추억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신리성지 순교 미술관

신리성지에서 가장 높은 건물로 코로나 19로 현재 닫혀 있어 아쉬웠다.

순교 미술관에는 한국화가 일랑 이종상(요셉) 화백이

‘신리의 순교자들과 신자들의 삶’을 주제로 3년에 걸쳐 그린 작품 18점이 전시됐다.

작품에는 신리 교우촌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성직자와 순교자들의 행적을 그린 순교 기록화 13점과

신리성지 출신 순교성인 5위의 영정화를 신리성지에 남겼다.

해당 작품들은 모두 우리나라 전통 채색기법인 장지 기법을 통해 완성됐다.

 

 

 

순교 미술관 입구에서 둘러본 신리성지와 주변 풍경

 

 

 

 

 

 

 

 

 

 

 

 

 

 

성지순례란

라틴어로 peregrinatio이고, 영어로는 pilgrlmage로 표기된다.

가톨릭에서 성지순례는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된 성스러운 땅인 성지와, 순교자들의 유해가 안치된 곳이거나 성인들의 유적지인 성역을 방문하여 경배를 드리는 신심 행위이다.

종교사회학적인 관점에서, 성지나 성역의 순례란 신(神)의 발현이나 위대한 종교적인 인물 때문에 신성시되는 장소를

참배하러 가는 여행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당진의 버그내 순례길은

솔뫼성지 - 합덕 성당 - 합덕제 - 신리성지까지로 약 14km.

한국 천주교회의 초창기부터 이용되었던 순교자들의 길이었으며, 신앙의 선배들이 걸었던 순례길이었다.

내륙 깊숙이 포구가 형성되었던 삽교천의 물줄기를 중심으로,

내포의 사도라 불렸던 이존창 루도비코의 탄생지 및 활동지였으며,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집안의 신앙이

꽃 피웠던 곳이며, 서양의 선교사들이 입국로요 활동무대였던 곳이다.

 

그리하여 주요 성역이 되는

솔뫼성지와 원 시장, 원시보 형제의 탄생지와 활동무대, 신리성지의 다블뤼 주교님과 교우촌, 박해가 끝나고

탄생한 합덕성당 공동체를 잊는 순례코스이다.

 

 

 

 

 

 

 

 

 

15:30

솔뫼성지에서 안개 때문에 버그내 순례길을 걷지 못하고 버스로 신리성지에 왔기 때문에

돌아갈 때는

버그내순례길을 따라 합덕으로 돌아갈 예정이었으나

여전히 안개가 사방을 가려

버그내길을 걷지 못해 아쉽다.

 

16:10 

신리성지 정류장에서 합덕으로 돌아가는 버스로 합덕버스터미널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