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牛馬처럼 걷는 대구+경북 여행

(김천) 고려성 나화랑 형제 노래비

 

 

 

직지사를 둘러보고

뜻하지 않게 직지문화공원 한곳에 있는 고려성. 나화랑 형제노래비가 있음을 알고 반갑게 찾았다.

 

대한민국 중장년 이상인 분들은 확언컨데 모두 알고 있을 "국민애창가요"

"나그네 설움"과 "무너진 사랑탑"의 작사자이며 작곡가인 고려성 . 나화랑 형제이다.

 

나역시 

"비의 탱고"는 

현인선생이 부른 탱고풍 중저음으로

리듬이 경쾌하고, 비 내리는 날 탱고의 스윙을 상상하며 감상할 수 있어 

지금도 술한잔 마시고 기분 울적할 때면 자주 부르는 노래인데

고려성선생께서 작곡했다는 것은 이곳에서 처음 알았다.

 

비가 오도다 비가 오도다
마지막 작별을 고하는 울음과 같이
슬픔에 잠겨 있는 슬픔의 가슴 안고서
가만히 불러 보는 사랑의 탱고

지나간 날에 비 오던 밤에
그대와 마주서서 속삭인 창살 가에는
달콤한 꿈 냄새가 아련히 스며 드는데
비소리 조용하게 사랑의 탱고

 

 

 

 

 

 

 

 

 

 

 

 

 

 

 

1921년 1월 25일(양력인지 여부는 확인되지 않았다) 경상북도 김천에서 태어난 나화랑은,

일본 음악학교 유학을 다녀온 뒤 1942년에 가수로 먼저 데뷔했다가 곧 작곡으로 활동 영역을 옮겼다.

이후 1983년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약 40년 동안 많은 히트작을 발표하며 대중음악 작곡가로 뚜렷한 자취를 남겼다.
 

▲ 1950년대 나화랑 모습

 

가수 이미자가 이름을 알리는 데에 결정적 역할을 한 <열아홉 순정>(데뷔곡은 아니다),

'가요황제' 남인수가 타계 2년 전에 발표한 마지막 인기곡 <무너진 사랑탑>,

내리는 비의 온도까지 알게 해 준 가사 '비가 오도다'로 회자되던 <비의 탱고>,

1960년대 대표 가수 남일해의 <이정표>와 김상희의 <울산 큰애기> 등,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유명 작품만 꼽아도

열 손가락이 금방 모자랄 만큼 나화랑의 음악 이력은 화려하다. 만약 1950~1960년대 대중음악사에서 그의 작품이 모두 사라진다면, 당연히 큰 공백이 느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특정 스타일에 치우침 없이 다양한 곡들을 만든 나화랑이었지만,

그가 선보인 음악에서 특히 주목을 받는 것이 민요 관련 작업이다. 연주에 서양악기를 도입하는 '한양합주'와

새로운 편곡으로 민요 대중화에 많은 성과를 낸 것은 물론, <뽕 따러 가세> 같은 민요풍 대중가요,

즉 신민요를 여럿 히트시키기도 했다. 또한 <도라지 맘보>, <닐니리 맘보>처럼 민요 소재와

라틴 리듬을 엮은 작품으로 한 시절 유행을 이끈 이도 나화랑이었다.
 

▲ 1957년에 발표된 <닐니리 맘보> 음반 딱지


나화랑은 또 손꼽히는 음악가족의 핵심이기도 하다.

<나그네 설움>, <고향에 찾아와도> 등 명작 가사를 남긴 작사가 겸 극작가 고려성이 그의 형,

1960년대에 활약한 가수 유성희는 그의 아내였다.

그리고 형제 음악가로 유명한

조규천·조규만·조규찬이 바로 나화랑의 음악 재능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아들들이다.

 

이 두 형제는 한국 대중가요에 기념비적 업적을 남긴 예술인들이다.

고려성(高麗星)은 일본의 사학 명문 와세다(早稻田) 대학을 졸업했고, 그가 창작한 것 중

널리 알려진 히트곡으로는 '고향에 찾아와도', '어머님 사랑', '남대문을 열어라'(8.15 해방가요 1호) 등이 있다.

그는 전국 콩쿨대회를 김천극장에  유치하였고, 작사가 박영호 가수 백난설 등과 함께 우리민족의 애환을

대변하는 가요를 만들어 널리 보급시켰다.

 

나화랑(羅花郞)은 김천고등학교와 일본 동경중앙음악학교에서 바이올린을 전공했고,

해방 후 김천여고 음악교사와 서울레코드사 전속작곡가로 활동하였다.

'닐리리 맘보', '뽕따러 가세', '청포도 사랑',  '님이라 부르리까', '울산 큰 애기'를 비롯한 대중가요를 작곡 히트시켰다.

또 군가로 유명한 ‘멸공의 횃불’도 그의 작품이다. 그는 일생 500여 편의 가요를 작곡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 외에도 한국 최초의 민요 LP음반을 제작하여 민요 보급에 앞장섰고,

서양의 장르인 맘보 리듬을 우리 가요에 접목시켜 선율의 마술사로 불리기도 하다.

박재란, 남일해 등의 가수를 발굴하여  대중가요 중흥에 씨를 뿌렸고, 이미자의 데뷔곡 '열아홉  순정'으로

오늘날 그를 국민가수가 되게 만든 작곡가이기도 하다.(참고:류세정/여행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