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牛馬처럼 걷는 경기 여행

(의정부) 신록에 묻힌 도봉산 망월사(道峰山望月寺)


신록에 묻힌 도봉산 망월사(道峰山望月寺)





언제 : 2020년 5월 14일 목요일

어디 : 경기도 의정부시 호원동 도봉산



지금까지 온 국민이 육체적 정신적 피로를 감내하고 경제는 위기 상황에 처하면서도

코로나 예방에 힘써

코로나 19가 차츰 진정세로 돌아서는 듯하였는데,

무분별한 몇몇 이태원 클럽 출입자들에 의해 다시 안갯속으로 들어서니 암담하다.

희미하게나마 탈출구가 보여 그 빛 바라보며 사는데,

다시 어둠이 덮치니 솔직히 화가 치민다.


07:00

복잡한 출근 시간을 피해 주안에서 전철 타고

09:00

망월사역 하차

원도봉계곡 가는 길에 아카시아꽃이 피어 깜짝 놀랐다. 이유는 불필요한 외출을 자제하느라 집에 있으니

5월도 중순에 든 지도 잊었던 모양이다.


도봉산 오름길 중 나는 망월사 계곡을 자주 이용하는데,

그 이유는

 우리나라 이름난 절은 스님뿐만 아니라 신도들도 보란듯 신선한 숲길에 승용차를 타고 다니며

자연을 훼손하고 있는데

가파른 도봉산 중턱에 위치한 망월사는 오직 걸어야만 갈 수 있기 때문이다.





누군들 꽃 싫어할까만,

나는 유독 아카시아꽃 보면 옛 군대 시절이 떠오른다.


부대 외곽은 담이 아니라 참나무로 엮은 울타리인데, 군데군데 제법 큰 아카시아나무가 있어

봄이면 봉우리가 아주 큰 아카시아꽃이 피어

삭막한 시절 젊음을 아카시아 향기로 달래곤 했다.  







엄홍길 대장 집터

엄홍길 대장이 3살부터 40살까지 살았던 집터


두꺼비 바위






석굴

두꺼비 바위를 지나 극락교에 이르면 우측 계곡에 아가리를 벌린 석굴이 보인다.


나무아미타불 바위


셀프 거울

특이하게 셀프 거울이 있어 나를 찍어본다.





원도봉 입구에서 망월사까지 오르는 길은 내가 좋아하는 길이다.

물소리 새소리 바람 소리까지 들으며 그야말로 유유자적하며 신록에 묻힌 원도봉 계곡을 걸어

덕재샘에서 목을 축인 뒤 망월사에 올랐다.










지장전

무위당과 망월사 현판

청나라 원세개가 쓴 망월사 현판

망월사는 근현대 고승들이 참나를 찾아 정진했던 조계종 종립 선원이 있었으며
구한말 혼란했던 시대상을 말 없이 품고 있는 천년고찰이다.

 구한말 청나라 사신 원세개는
임오군란 진압 차 조선 원정 1891년 가을 ‘망월사’ 올라 현판 쓰고 자신의 이름 남겨
10여년 간 조선 정치 좌우 청일 전쟁 직전 귀국했다.

주지 스님 집무실 등 요사채가 있는 건물 무위당(無爲堂)에 한자로 망월사(望月寺) 라 쓴 현판이 있다.

현판 내용이 특이하다.

 ‘주한사자원세개(駐韓使者袁世凱) 광서 신미중추지월(光緖 辛未仲秋之月)’이 눈에 들어온다.

광서는 청나라 11대 황제 광서제이니 1891년 가을에 원세개가 썼다는 뜻이다.

 마지막 황제 푸이가 12대이다.


원세개는 청말 북양대신 이홍장의 총애를 받아
23세의 나이로 임오군란을 진압하기 위하여 파견된 청군(淸軍)과 함께 조선에 왔다.
1882년 일어난 임오군란 때 이를 진압하기 위해 들어온 청은 조선에 대한 주권을 갖고자 했다.
청은 명성황후 등 민씨 일파를 동원해 조선 왕실을 좌우하자 이에 불만을 품은 개화파는
일본과 손을 잡고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일본의 세력 확대를 두려워한 청과 아직은 독자적으로 조선을 지배할 힘이 부족했던 일본은
텐진조약을 체결했다.

그 내용이 가관이다.
조선에서의 청·일 양국군 철수, 장래 조선에 변란이나 중대사건이 일어나서 청·일 어느 한쪽이 파병할 경우
그 사실을 상대방에게 알릴 것 등 남의 나라를 놓고 제 멋대로 요리했다.
국운은 다하는데 왕은 무능하고 지배계층은 나뉘어 반목하니 주변 강국이 우습게 여기고 마음 껏 농락한 것이다.
나라가 어지러우면 백성만 힘든 법.
참지 못한 백성들이 일어서 동학농민전쟁을 벌였다.
원세개가 들어오고 10여년이 지난 뒤 역사다. 결국 텐진조약이 동학전쟁을 진압하는 구실로 작용했다.
10여년 간 힘을 기른 일본은 청.일 전쟁에서 승리해
결국
일제강점기의 시초가 되었다. 

원세개는 임오군란부터 청일전쟁 발발까지 혼란했던 19세기 말 조선 정국의 중심에 있었다.
그는 흥선대원군을 납치하여 청나라로 압송, 연금하였으며 임오군란을 일으킨 군인들을 진압하는데 앞섰고
갑신정변이 발발해 고종이 개화파에게 납치되자 일본군과 전투를 벌여 고종을 구출했으며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납치했던 흥선대원군을 복귀시키는 등 한중일 삼국이 어지럽게 돌아가던 정국의 중심에
늘 원세개가 있었다.

1885년 조선주재 총리교섭통산대신이 된 원세개는
서울에 주재하며 내정과 외교를 간섭하고 청의 세력 확장을 꾀했다. 하지만 그는 망해가는 청을 구하지 못했고
동북아의 신흥 강자로 떠오르는 일본을 막지도 못했다.
조선은 원세개를 마지막으로 청의 손아귀에서 벗어났지만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원세개는 쑨원을 강제로 밀어내고 중화제국 황제에 즉위했지만
100일 만에 열강의 반대와 전국에서 번진 반원(反袁) 움직임에 밀려 퇴위한 뒤 실의에 빠져
5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출처 : 불교신문(http://www.ibulgyo.com)


아주 큰 바위 아래에 샘이 있다.



망월사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영산전을 가는 길











문수굴







영산전



통천문

영산전을 오르려면 통천문을 지나는 계단을 통과하는데

기울어 곧 쏟아질 듯하여 쇠막대기 여러 개가 엄청 큰 바위를 지탱한 밑을 지나야 한다.

 솔직히 겁났으나,

이곳에서 죽으면 부처님께서 나 몰라라 하시지 않겠다는

말도 되지 않은 생각으로 오르내렸다. 


통천문 계단과 바위





천중선원과 심검당

통천문 계단을 오르니 망월사에서 보기 힘든 너른 터에 거대한 선원이 자리하고 있다.


영산전

망월사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하며 앞에는 멀리 수락산과 불암산이 보인다.


수락산과 불암산





 망월사 혜거국사 부도(望月寺慧炬國師浮屠) :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22호


영산전에서 약 100m 더 산으로 가면 고려초기 승려인 혜거의 부도로

 높이가 1.8m이며 탑신부를 제외한 나머지 부분은 팔각원당형 구조다.



무위당(無爲堂)과 범종



관음전





영산전

조금 전에 올랐던 영산전 뒤로 도봉산 주봉들(자운봉-만장봉- 선인봉)



망월사 범종


절을 절답게 빛내는 건 그곳에 수행하는 스님들이 있기 때문이다.
풍수가에서는 비산비야(非山非野)에 대혈(大穴)이 있다지만 큰 산엔 큰 스님이 있다.
바로 그 도봉산 정상에서 8부 능선에 있는 망월사(望月寺)는 근세기까지 큰 스님들이 치열한 수행을 했던 곳이라
이를 증명하고도 남는다.

망월사(望月寺)에는
조선이 청나라에 치욕적인 수모를 겪고도 이번에는 조선군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또 청병을 요청해서 온
파병군 사령관인 원세개가 쓴 현판도 화젯거리다.
‘주한사자원세개(駐韓使者袁世凱) 광서 신미중추지월(光緖 辛未仲秋之月)’이 望月寺 현판에 쓰여 있다.
광서는 청나라 11대 황제 광서제를 말하고 1891년 가을에 원세개가 쓰다는 뜻이다.

원세개는 청말 북양대신 이홍장의 총애를 받아 23세의 나이로
조선의 군사 반란인 1882년 임오군란을 진압하기 위해 파견된 청군(淸軍) 사령관으로 왔다.

청나라는 원세개를 앞세워
 명성황후 등 민씨 일파를 동원해 조선 왕실을 좌우했고
이에 불만을 품은 개화파는 일본과 손을 잡고 갑신정변을 일으키는 조선의 파국을 예고한 신호탄이었다.

일본의 세력 확대를 두려워한 청과 아직은 독자적으로 조선을 지배할 힘이 부족했던 일본은
 톈진조약을 체결,
조선에서의 청·일 양국 군 철수, 장래 조선에 변란이나 중대 사건이 일어나서 청·일 어느 한쪽이 파병할 경우
그 사실을 상대방에게 알린다는 그야말로 청나라와 일본이 지금처럼 양분하는 조약을 체결한 것이다.

1885년 조선 주재 총리 교섭 통산 대신이 된 원세개는
 서울에 주재하며 내정과 외교를 간섭하는 동안 망월사에서 북경의 하늘을 바라보며 기도를 한 후
망월사라는 현판을 썼다고 한다.
망월사 기도 덕분인지 원세개는 청나라로 돌아가면서
조선 여인 세 명을 첩으로 삼아 데려간 한 여인 낳은 아들이 바로 노벨물리학상 후보까지 올라간
물리학자로 알려져 있다.

이 같은 숱한 사연이 깃든 망월사를 수행 근본 도량으로 일으켜 세운 용성, 동산, 춘성 스님들의 수행담은
큰 산처럼 전설로 이어지고 있다.

이들 스님은 근현대 한국 불교를 대표하는 수행이란 무엇인가를 망월사에서 정진을 통해 보여줬다.
 일제 강점기에 3·1 독립운동 33명 중 만해 스님과 함께 불교계를 대표했던
백용성 스님이 1905년 선원을 개설한 것을 계기로 여기에서 수행한 제자인 석우, 동산, 고암스님 등 3명은
후에 대한불교조계종 종정으로 추대됐다.

동산 스님은 은사인 백용성 스님이 3·1 만세운동으로 투옥되자
망월사와 종로 대각사를 오가며 스승의 옥바라지를 하면서도 수행자의 사표가 됐다.

이에 뒤질세라 무애와 기행 그리고 자비란 무엇인가를 보여준 춘성 스님도
망월사의 격을 드높인 근현대의 걸출한 스님으로 회자하고 있다.

바로 그 춘성 스님도 스승인 만해 스님이 용성스님과 함께 독립운동으로 인해 서대문 형무소에 투옥되자
동산 스님과 함께 옥바라지하면서 감옥에서 고생하는 스승들을 생각하며
겨울에도 난방하지 않고 지냈다고 한다.

춘성 스님은 아무리 추운 겨울에도 이불이 '부처를 멀리한다(離佛)'라는 뜻이 있다고 하여
평생 이불을 덮지 않고 수행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