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牛馬처럼 걷는 서울 여행

(남양주) 수락산 내원암(水落山 內院庵)


수락산 내원암(水落山  內院庵)





언제 : 2020년 4월 26일 일요일

어디 :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면 청학리 103번지



지난 4월 22일

수락산에 올랐으나 강풍과 눈발이 흩날려 기차 바위를 통과하지 못한 아쉬움에

오늘은 수락산 동쪽 남양주시 별내면 청학 계곡에서 내원암으로 올라 기차 바위를 타고 

장암역으로 하산할 목적으로 집을 나선다.


06:45

집을 나서

07:20

주안역 출발

09:10

당고개역 도착

버스로 청학 계곡 입구로 이동하려고 길을 건너 버스 정류장에서 어느 중년에게 이곳에서 청학 계곡행 버스

타느냐고 물으니 그렇단다.

 어디서 왔냐고 물어 인천에서 왔다고 하니 멀리서 오셨다며

자기도 그곳에 가니 함께 버스 타면 된단다.


버스 33번이 오니 버스를 타야 한단다.

자기가 잘 안다며 버스를 타고 한참을 가는데 수락산 방향이 아니라 불암산 방향이라

버스 기사분에게 물으니 33-1을 타야 했다며 간혹 이런 일이 있다며

내려서 반대편에서 다시 당고개역으로 나가란다.


2시간 30분을 걸려 당고개역까지 왔는데,

이런 일이라니 은근히 울화가 치미는데, 그 중년이 내려서 내게 사과를 한다.

자기는 53세로 뇌졸중으로 몸과 언어장애가 있었는데, 재활 치료를 잘하여 몸과 언어는 좋아졌는데,

방향 감각이 떨어진다며 죄송하다네.


약 1시간을 허비했으나

몸이 성치 못한 사람이라 함께 다시 버스를 타고 청학 계곡 입구에 내려

그 중년은 천천히 오기로 하고 생전 처음 가는 곳이라 떨리는 마음으로 내원암을 향해 걷는다.

일요일이라

수락산을 오르는 사람이 많다.





청학 계곡 들어서니

계곡엔 물이 마르고 곳곳엔 공사하거나 중단하여 정리되지 못했다.

옥류 폭포도

 흐르는 물도 없고 주변 공사를 하다가 중단하여 사진 담기도 좋지 않아 통과한 후 고개를 드니

널따란 암반이 봉우리를 덮고 있다. 


수락산 서쪽에는 암봉들이 많더만

동쪽에는 널따란 암반들이 수락산을 꾸미고 있다.









수락산은 물이 떨어지는 크고 작은 폭포가 많아서 생긴 이름이다.

수락산에는 위로부터

금류(金流)폭포, 은류(銀流)폭포 옥류(玉流)폭포라는 이름이 붙은 세 개의 폭포가 있다


옥류 폭포는 주변 공사로 사진을 담을 수 없었다.




은류폭포(銀流瀑布)

수락산 내원암 올라가기 전 좌측에 있다.

내원암 아래에는 금류동. 은류동. 옥류동이 있었다고 한다. 구전에 의하면 "해가 동쪽에서 뜰 때

폭포의 물이 은빛을 난다." 고 붙여진 이름이다.

겨울철에는 빙벽타기가 유명하단다.



주말이라 많은 대학생 단체가 수락산을 찾는다.



금류폭포(金流瀑布)

수량이 많았다면 정말 멋진 풍광이었을 터인데, 아쉽네



돌계단

내원암과 금류(金流)폭포 사이에는 228개 돌계단이라는데,

확인하지 못했지만,

올려다보면 까마득하여 여간한 불심이 아니면 계단을 올라 내원암에 닿기 쉽지 않다.



금류동천(金流洞天)

금류폭포의 꼭대기 바위에는  ‘金流洞天’이라는 큰 글씨의 암각문이 있는데,

 동천은 산천으로 둘러싸인 경치 좋은 곳이라는 의미다.


그러나

금류폭포 상단에는

 남양주시의 철거령에도 살아남은 가게가 불공에 소용되는 물품과 함께 막걸리와 전을 판다.

불자와 풍류객들을 위해 하나쯤 남겨둔 것일까?


이곳은 매월당집(梅月堂集)의 기록에 의하면

매월당 김시습(梅月堂 金時習)이 세조의 왕위찬탈을 게기로 방랑하던 중 10년간 머물렀던 곳이다.

호곡 남용익(壺谷 南龍翼)의 간폭정기(看瀑亭己)에 의하면

"수락산 옥류동에 있는 옥류폭포 옆에 간폭정(看瀑亭)을 지었는데,

그 5리 위에 매월당구지(梅月堂舊地)가 있다" 고 하였다.


금류폭포에는 "금류동천(金流洞天)" 이라는암각문이 있는데,

 해서체로 새겨진 이 암각문에는 글자의 필획의 힘이 놀랄 만하다.

끝부분에 "道光 丁酉五月" 이라 쓰여진 것으로 보아 1873년(헌종3년)에 새긴 것으로 보인다.

전체 크기는가로 610cm, 세로 140cm이고, 자획크기는 가로 130cm, 세로 140cm이다.




청학 계곡 입구부터 사방은 골짜기 하늘만 보인다.

은류폭포를 지나 202개 돌계단을 올라 금류폭포 상단에 서면 전방이 확 트이며

 멀리 산. 산. 산들이 밀물처럼 몰려온다.



향로봉







매화말발도리꽃



내원암(內院庵)

신라시대에 창건되었다고 하나 창건자는 미상이다.

도솔천 내원궁에서 이름을 따온 내원암은 수락산 중턱에서 더 올라간 비교적 높은 곳에 위치해 있다.

조선시대 경기 북부의 중심 사찰이었던 봉선사(奉先寺)의 말사이다.


전해지는 설화에 의하면

영조(英祖)의 계비 정순왕후(貞純王后)가 왕손을 얻고자 내원암에 있는 용파(龍坡)대사로 하여금

300일 기도를 드리게 했단다.

그 결과 정조(正祖)의 후궁인 수빈 박씨로부터 순조(純祖)가 탄생했다고 전해진다.


선원사 도솔암 내원궁과는 다르지만 그곳이 생각났다.










내원암 연등

4월 30일이 석가탄신일이라 소박하지만 연등이 곱다.



대웅보전



 



내원암 이곳저곳을 다녀보고 싶지만,

요즘 코로나 19로 외부인이 절 내부를 다니는 것은 실례가 되어 마애미륵입상도 보지 못하고

발길을 돌린다.










약 100m 오르니

높다란 계단 끝 내가 보아도 터가 좋은 곳에 삼성보전이 있다.


삼성보전(三聖寶殿)

칠성여래삼존상과 그 권속상, 산신상, 독성상을 모셨다.



김시습(金時習, 1435년~1493년)

조선 초기의 문인, 학자이자 불교 승려이며, 생육신의 한 사람이다.


자(字)는 열경(悅卿), 호는 매월당(梅月堂)·동봉(東峰)·벽산청은(碧山淸隱)·췌세옹(贅世翁),

불교 법명은 설잠(雪岑)이다.

충순위(忠順衛)를 지낸 김일성(金日省)의 아들이다.


 수양대군이 자행한 단종에 대한 왕위 찬탈에 불만을 품고 은둔생활을 하다 승려가 되었으며,

벼슬길에 오르지 않았다.

1493년 충청도 홍산군 무량사에서 병사하였다


어린시절 세종대왕이 그의 천재성을 듣고 5세의 김시습을 불러다가 글을 짓게 하자 바로 글을 지었다.

그 내용에 감동한 세종대왕이 문학에 재능이 있는 그에게 칭찬하며 비단을 선물하자,

그 비단들을 끝을 묶어서 가져갔다는 이야기가 있다.


삼각산 중흥사에서 독서를 하다

 세조의 왕위 찬탈 소식을 듣고 3일 동안 문을 듣고 번민한 끝에 통곡을 하고 책을 불살랐다고 알려져 있다.

 머리를 깎고 21세에 방랑의 길에 들어서,

경기도 양주(楊州)의 수락(水落), 수춘(壽春)의 사탄(史呑), 해상(海上)의 설악(雪岳), 월성(月城)의 금오(金鰲)

등지를 두루 방랑하면서 글을 지어 세상의 허무함을 읊었다.

그는 관서·관동·삼남지방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백성들의 삶을 직접 체험했는데,

〈매월당시사유록 每月堂詩四遊錄〉에 그때의 시편들이 수록되어 있다.


1472년에는 경기도 양주의 시골에 정자를 세우고 조그만 화전을 일구면서 시와 저술에 전념하였다.

언젠가 서강(西江)을 여행하다가 한명회(韓明澮)의 시를 보고 운을 바꾸어 조롱하기도 했다.


한명회의 시

        靑春扶社稷(청춘부사직) / 젊어서는 사직을 붙잡고

         白首臥江湖(백수와강호)  / 늙어서는 강호에 묻힌다.


김시습의 시

       靑春亡社稷(청춘망사직) / 젊어서는 나라를 망치고

           白首汚江湖(백수오강호)  / 늙어서는 세상을 더럽힌다.


수락산장에서 본 풍경

저 멀리 우뚝 솟은 산은 아마도 용문산 정도 되지 않을까?



수락산장

다른 산 산장은 반듯하더만, 왜 수락산장은 저렇게 흉물스럽게 지었을까?



수락산 정상

주말이라 사람이 많아 혼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