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차이나타운 삼국지(三國志) 거리의 봄
아마
이 글을 볼 즈음이면
코로나 19가 어느 정도 진정되어 사회적 거리는 유지하지만,
자유롭게 외출도 하고 여행도 다닐 수 있게 되면 좋겠다.
삼국지
위·촉·오의 3국이 정립한 시기부터 진이 중국을 통일한 시기까지의 역사를 기록해놓은 역사소설로,
조조, 손권, 유비 세 사람의 영웅담은
의리와 배신, 파괴와 건설, 사랑과 미움의 대서사시로 동서고금의 찬사를 받고 있다.
요즘처럼
먼 곳 여행을 다니기 어려워 이번엔 집에서 가까운 차이나타운에 들러
한중 문화교류의 상징으로 조성된
인천 차이나타운 삼국지 벽화 거리와 초한지 벽화 거리를 담아 보았다.
▲
인천 차이나타운 약도
▲
삼국지
▼
▲
삼국지 거리
▲
2. 도원결의(桃園結義)
황건이 난을 일으키자. 조정에서는 의병을 모았다.
이 때 탁현(현재의 북경 부근)에 살고 있던 유비는 관우, 장비와 함께 장비의 별장 뒤뜰 복숭아밭에서
의형제를 맺고, 황건을 토벌해 세상을 바로 잡겠다고 맹세 한다.
▲
9. 호뢰관(虎牢關)
연합군이 쳐들어오자 동탁은 여포에게 호뢰관으로 가서 그들을 막으라고 지시하고,
자신은 장안으로 도망 칠 궁리를 한다. 회뢰관에서 여포는 수많은 연합군 장수들을 격파한다. 한편 유비 삼형제가
공손찬을 따라 참전해 여포와 일진일퇴를 거듭하자.
마침내 여포는 호뢰관 안으로 도망쳐 들어간다.
▲
21. 자주논영웅(煮酒論英雄)
허도의 조조는 유비가 영웅의 그릇임을 알아보고어느 날 자기 집 후원으로 청해 술을 마시다가
때마침 용이 승천하듯 구름이 일어나자 천하의 영웅에 대해서 설파하며 유비의 속마음을 알고자 한다.
이 때 유비는 자신의 속마음을 들켰다고 여겨 수저를 떨어뜨리는데,
때마침 선개 치는 소리에 놀랐다는 듯이 둘러대 조조의 예리한 눈빛에서 벗어난다.
▲
34. 장판교(長板橋)
유비의 군사는 겅의 전멸 당했다.
그 때 장비가 혼자서 장팔사모를 꼬차 쥐고 장판교 다리 위에서
"덤비려면 덤벼라!'하고 호통을 치자,
그 소리가 마치 우뢰처럼 울려 조조의 장수들과 십만 대군이 겁을 집어 먹고 추격을 중단하고 되돌아갔다.
장비가 홀로 십만 대군을 상대했다는 유명한 이야기이다.
▲
공명차전(孔明借箭)
영문도 모르는 조조 진영에서 활을 마구 쏴 화살 10만 개를 거져 얻는다.
유비는 제갈 량을 손권 진영에 보내 동맹을 맺고, 조조는 형주군을 흡수하여 십여만 대병력으로
장장 적벽에 거대한 수채를 만든다.
손권에게 항복하지 않으면 쳐들어가겠다고 협박한다. 이 때 제갈 량이 주유에게서 화살 10만 개를 부닥 받자
배에 짚단을 가득 실은 후 밤중에 북을 치며 습격하는 척하자,
영문도 모르는 조조 진영에서 활을 마구 쏴 화살 10만 개를 거져 얻는다.
▲
30 삼고초려(三顧草廬)
유비는 관우, 장비의 불만을 누르고 세 차례나 제갈량을 찾아간다.
제랄량을 휘하의 군사(軍師)로 맞아들인다. 이를 삼고초려라 한다. 주군이 좋은 신하를 맞이하기 위해
지극 정성을 다한 사례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이후 유비는 제갈량의 도움을 받아
천하 쟁패에 나선다.
▲
37. 고육계(苦肉計)
손권군의 노장 황개는 주유에게 조조군의 거대한 수채를 공격하는 방법은 화공뿐이라고하면서
고육계를진언한다. 즉 주유가 작은 트집을 잡아 황개를 심하게 처벌하고,
황개가 거짓 투항서를 조조 진영에 보낸다. 그러면 이를 믿게 될 테니 투항하기로 약속한 날에
불타기 쉬운 물질을 배에 가득 싣고 조조 진영으로 가서 불을 지른다.
▲
39 .적벽대전(赤碧大戰)
고육계가 성공하여 조조 진영에서는 황개의 투항을 기다리게 되고,
마침 동남풍이 불자 황개는 조조 진영으로 가 배에 불을 질러 수채 속으로 밀어 넣는다.
이리하여 조조의 수채는 거대한 불기둥에 휩싸이고, 불길은 육지에도 번져 조조군은 거의 전멸하다시피 한다.
이른바 주유의 대승으로 기록된 적벽대전이다.
▲
50. 괄곡요독(刮唃療毒)
형주 총사령관 관우는 허도를 공략할 작정으로 먼저 조조군이 지키는 번성을 공격한다.
관우는 이 싸움에서 승리했지만 적이 쏜 독화살에 맞아 중상을 입는다.
명의 화타가 대수술을 하는데, 그는 안색 하나 찌푸리지 않고 마량과 바둑을 두면서 수술을 받는
인내심을 보여 준다.
▲
55. 칠보시
태자 계승의 경쟁 상대인 동생 조식을 항상 경계하였던 조비는 위왕이 되자 그를 불러
"일곱 걸음을 걷는 동안에 시를 지으라."하고 "그렇게 하지 못하면 죽이겠다." 고 위협했다.
이에 조식은 그 유명한 콩과 콩깍지를 예로 들어 시를 지었다.
콩을 가지고서 국을 끓이니
받치고 걸러서 즙을 만든다
콩깍지는 가마솥 밑에서 타고
콩은 가마솥 안에서 우는도다
본디 같은 뿌리에서 태어났건만
서로 삶아 대는 것이 어찌 이다지도 급한가
▲
57. 위속대통(位續大統)
조비가 황제에 올랐다는 소식을 들은 유비는 헌제를 위해 통곡하고 한나라를 이어야 한다는
제갈량 등 신하들의 주장에 못 이겨 황제에 오른다.
나라이름을 촉한이라고 정했는데 이는 한나라의 법통을 잇는다는 의미였다.
이후 촉한을 정통으로 인정하자는 주장의 근거가 되었다.
▲
58. 장비우해(張飛遇害)
황제가 된 유비는 도원결의를 맺은 의형제 관우의 복수전을 결심하고 장비에게 출진명령을 내렸다.
장비는 관우 형님의 복수전이므로 전군에 흰 상복을 입으라고 지시했다.
이에 어려움을 호소하는 부하들을 심하게 매질했는데,
그들이 몰래 숨어 들어와 장비를 죽인다.
▲
62. 백제성(白帝城)
육손에게 대패하고 도망친 유비는 현재의 장강 상류에 있는 백제성이란 곳에서 겨우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유비는 패전의 부끄러움을 보여주기 싫어 이곳에 머물렀는데 병을 얻어 죽게 되었다.
유비는 제갈량을 불러 아들 유선을 잘 보살펴 달라고 부탁하고 숨을 거둔다.
▲
63. 칠종칠금(七縱七擒)
유비가 죽고 촉한을 다스리게 된 제갈 량은
남쪽 경계지대인 남만을 평정하여 장차 북벌을 위한 준비에 착수한다.
남만에 진격한 제갈 량은
그곳의 추장 맹획을 일곱 번 붙잡아 일곱 번 풀어줌으로써 진심에서 우러나온 항복을 받고
성도로 돌아온다.
▲
72.추풍오장원 秋風五丈原
위수 강가에 평지보다 오장이 높은 고원지대에서
수비일변도로 나가는 사마 의의 진영을 바라보는 제갈 량의 마음은 착잡했다.
벌써 가을바람이 불어오고 자신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감회는 어떠했을까.
북벌의 꿈을 접어야 하는 이 불세출의 전략가 눈에 이슬이 맺혔으리라.
▲
73.공명귀천 孔明歸天
마침내 제갈 량이 쓰러졌다. 운명의 시간이 된 것이다.
그는 강유를 불러 평소에 적어 두었던 병법서를 비롯해 사마 의를 격파하는 전략, 병사를 훈련시키는 법 등
평생의 유작을 넘겨주고 자신이 죽은 뒤 퇴각하는 요령까지 알려준다.
이 계책으로 죽은 공명이 산 중달을 쫓았다는 고사가 나온다.
▲
77.삼국귀진 三國歸晉
최후의 통일을 이룩한 것은 사마 의의 손자가 세운 진나라.
황건의 난으로 천하가 분열된 지 꼭 98년 만이었다. 쓰러져 간 영웅호걸들 그리고 한 세기에 가까운 난세 속에
명멸한 온갖 지략과 인생사의 삼국지 시대는 막을 내린다.
▲
대불호텔
1880년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호텔이다.
일본식 2층 목조건물에 문을 연 이 호텔은 영업이 호황을 누리자 지상 3층의 벽돌 건물을 새로 건립하였다.
영어로 손님을 맞고 서양 음식을 제공하였으며,
처음으로 커피를 팔았으리라 추정한다. 1918년 중국인이 매입하여 중화루라는 식당으로 개업한 후
1978년 6월 철거될 때까지 정통 북경요리 식당으로 유명했다.
▼
▲
최근 복원한 대불호텔
▼
▲
내동예배당과 영화학당
우리나라 최초의 감리교 예배당과 근대식 초등학교
현재 내리교회인 내동예배당은 1891년 11월에 준공한 우리나라 기독교 감리교회의 최초의 예배당이었다.
헨리 아펜젤러 목사의 선교를 시작으로 신축한 내도예배당은 그 외벽은 회반죽으로 발랐고
지붕은 일본식 기와로 치장했다.
1892년에는 이곳에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초등교육기관인 영화학당이 설립되었다.
▲
세창양행 사택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주택
세창양행 사택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주택이다.
1884년경 독일 함부르크 상인들이 운영하던 무역회사인 세창양행 직원의 숙소로 사용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후 독일이 패망하면서 일본에 몰수되어 청광각으로 사용되었고,
1922년 인천부청이 이 건물을 매입하여 인천부립도서관으로 사용하였다.
건물은 1950년 6.25 한국전쟁 때 폭격으로 소실되었다.
▲
1910년대 인천역전의 풍경
경인철도는 1897년 3월 인천 우각현에서 기공식을 거행하고 공사에 착수하여
1899년 9월 개통된 한국 최초의 철도이다.
개통 당시 경인선은 7개 역에 33.2km 구간을 1시간 30분에 달렸으며, 소사와 영등포에만 정거하는
급행열차와 용산역을 거치는 완행열차도 있었다.
'牛馬처럼 걷는 인천 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강화) 마니산 계단로에서 정수사 가는 암릉길 (0) | 2020.05.27 |
---|---|
(인천) 인천 차이나타운 초한지(楚漢志) 거리 (0) | 2020.05.15 |
(강화) 염하를 따라 월곶 돈대에서 갑곶 돈대까지 도보여행 (0) | 2020.04.24 |
(강화) 유형문화재 제24호 : 연미정(燕尾亭)과 월곶돈대(月串墩臺) (0) | 2020.04.22 |
(강화) 사적 제225호 : 초지진(草芝鎭)과 호국돈대길 제2코스(덕진진~초지진) (0) | 2020.04.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