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牛馬처럼 걷는 전남 여행

(고흥) 거금대교와 절이도(折爾島) 해전 승전탑

 

거금대교와 절이도(折爾島) 해전 승전탑

 

 

 

 

거금도는 조선 시대엔 절이도(折爾島)라 불린

고흥 녹동에서 배를 타면 30여 분이 소요되는 낙도였다.

 

그러나 지금은

녹동에서 소록도까지 소록대교가 놓였고 2011년도에 다시 소록도에서 거금도까지 거금대교(2,028m)가 개통되어

고흥반도와 연결된 아름다운 섬으로,

조선 중기 문헌에 큰 금맥이 있어 섬 이름도 거금도라 불리었다.

 

소록도를 돌아보고

해 지는 거금대교를 건너니 조명등이 켜지기 시작하는 거금대교 휴게소가 있다.

 

이왕 늦은 시간이라 커피도 마실 겸 휴게소 앞에 주차하는데,

거금대교 앞에 거대한 상(像)이 보이고,

그 뒤로 "절이도 해전 승전탑"이라는 다소 낯선 조형물이 있다.

 

  

 

여자만(汝自灣)

고흥반도와 여수반도 사이의 灣 

전라남도 여수 여자도를 중심으로 보성군·순천시·여수시·고흥군으로 둘러싸여 있는 내해

 

 

 

아주 친한 친구가 벌교에 있어

고흥 들어가기 전에 미리 만나기로 전화로 약속하여 친구를 만나 점심을 들고

바닷가를 거닐며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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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교읍 대포리 

 

 

 

 

 

 

 

 

 

 

 

겨울의 진미 꼬막 작업장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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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막의 고장 벌교 대포리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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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교 대포리에서 본 고흥 팔영산

 

 

거금대교(居金大橋)

 

 전라남도 고흥군 금산면 거금도와 도양읍 소록도를 잇는 다리로

 총 연장 2천28m(사장교 1천116m, 접속교 912m)로, 중앙 부분에 167.5m에 이르는 다이아몬드 모양의

주탑 2개를 케이블로 연결한 사장교다.

국내 해상 교량 가운데 처음으로 자전거ㆍ보행자 도로(1층)와 차도(2층)를 구분한 복층 교량으로,

 2002년 12월 착공해 총 사업비 2천732억원을 들여 2011년 12월 16일 개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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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금대교 기념탑

 

 

 

거금도휴게소

 

 

 

 

 

 

거금대교

 

 

거금도에서 본 소록도

 

 

 

 

절이도(折爾島) 해전 승전탑

 

임진왜란의 이순신 장군 3대 해전은 한산도해전, 명량해전, 노량해전으로만 알고 있어

다른 해전은 관심을 두지 못했는데, 다시 공부할 수 있어 감사하다.

 

절이도 해전

 1592년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탐욕으로 발발한 임진왜란이 1596년 불안정한 강화조약으로
왜병이 철수하여 전란이 끝난듯하자
조선 조정은 이순신장군을 역적으로 몰아 고문을 가하고 백의종군하게 하다가
1597년 일본과의 강화조약이 결렬되면서 정유재란으로 왜군이 조선 산하를 또 다시 침략해
거제도 칠전량 해전(1597년 7월 15일 발생)에서 삼군수군통제사인 원균이 왜군에게 전멸을 하자 
조정에서는 이순신 장군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복귀시킨다.

 

통제사로 복귀한 장군께서는 전라도의 마지막 방어선인 해남과 진도 사이 
명량(울돌목)에서 마지막 남은 전선 12척으로 200여척의 왜선을 격퇴하면서 전라도의 최후 방어선을 지켜내고
왜병을 부산쪽으로 몰아가기 시작한다.


명량해전 승리후 장군께서는

지휘본부를 완도군 고금도로 옮겨 벌교 부근에 주둔한 왜군과 대치 중이었는데
1598년 7월 18일 왜선 100여척이

절이도 쪽으로 이동 중이라는 척후선의 보고를 받고 함대를 금당도로 옮겨 왜선의 이동을 주시하다가

  다음날 새벽(1598년 7월 19일) 녹동과 절이도를

통과하는 왜선 100여척의 함대 중 50여척을 수장시켜 버리는 대승전을 거둔다. 
 

 절이도 해전은

임진왜란 7년 전쟁 중 최초로 조선과 명나라 수군이 연합하여 벌인 해전으로 역사적인 승전이며,

조선 수군은 남해안 서쪽 해역 주도권을 장악하고,  칠천량 전투 이후로 궤멸되다시피한

조선 수군의 재건을 알리는 전투로 평가할 수 있다.

또한 조·명연합군의 결성은

순천왜교성전투(1597년 9월 20일~10월 4일 발생)과 노량해전(1597년 11월 19일)에서의

대승리를 거둔 배경이 되었다.

 

 

 

 

 

 

 

 

 

 

 

 

 

 

 

 

 

 

 

 

 

 

 

 

 

 

 

 

 

거금도 출신 박치기 왕 김일

 

1929년 고흥군 거금도에서 태어난 김일은

 어려서부터 남달리 두뇌가 명석하고 힘이 장사였다. 아직 어린 나이인 16세에 씨름판에서 성인들을 제치고

황소를 타는 등 호남의 씨름판을 휘어잡는다.

그러나 이에 만족하지 않고 더 큰 포부를 가지고 프로레슬링 선수가 되고자

28세 되던 해인 1958년

역도산을 찾아 일본으로 밀항하였으나 체포되어 1년간 감옥생활을 하다 역도산의 도움으로 출옥하여

 그의 제자가 되어 "호랑이를 떼려잡는 사나이"란 이름을 역도산으로 부터

물려 받고 온갖 차별과 시련을 겪으면서도 일본 레슬링계를 평정한다.

 

184Cm - 120Kg 거구의 김일은

1965년 6월 일본에서 귀국하여 대한민국 프로레슬링 제1세대로서

"박치기 왕"으로 1960~1970년대 중반까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스포츠인으로 사랑을 받았다.

2000년 3월 72세로 은퇴를 하고 2006년 타계를 하셨다.

 

그러나

금산면 소재지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밤이 되어 김일 기념 체육관을 두고도

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