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여름 끝자락의 월미도 풍경 - 2
월미도(月尾島,)는 월미산을 중심으로 남북으로 긴 삼각형 모양을 이루었으나
지금은 간척되어 육지가 된 인천 앞바다의 육계도이다.
1989년 7월 문화의 거리가 조성된 이래
인천 바닷가의 유명 관광지 중 하나로 떠올랐다. 썰물 때도 갯벌이 드러나지 않아 언제나 바닷물을 볼 수 있다.
월미산에 둘레길이 조성되고, 한국전통정원, 전통문화체험관, 한국이민사박물관 등이 설립된 데다가,
다양한 놀이동산까지 들어서면서, 월미도는 인천 명소의 위상을 되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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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분수대
18:00 분수 공연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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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미도는 면적이 0.7㎢밖에 되지 않는 작은 섬이었지만
제물포(지금의 인천항) 앞에 딱 버티고 서서,
파도와 바람으로부터 제물포에 정박한 배들을 지켜주기 때문에 항구 역할을 제대로 하는데 큰 공헌을 했다.
병자호란 때 몽골 기마병이 바람처럼 달려와 강화도로 피난하는 길을 막아버려
남한산성으로 피신해야만 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조선이 1656년(효종 7)에 제 2의 피난길을 개척할 때 기착지로서
월미도에 월미행궁이 지어지기도 했다.
제 2 피난길의 경로는 다음과 같았다.
서울-영등포-인천도호부-월미도-영종도-강화도
월미도를 지나지 않고서는 인천항을 통해 서울로 갈 수 없었기 때문에
월미도는 개화기부터 한국전쟁 때까지, 외국 군대에게 점령되어 군사 요충지로 쓰이는 운명을 맞아야만 했다.
병인양요, 신미양요, 운요호 사건 때는 한양으로 들어가는 뱃길을 찾으러 인천에 접근한 이양선들이
입항 전 한 차례 머무르는 섬이었으며,
일. 청. 러가 조차 경쟁을 벌일 때는 조정의 허락도 없이 일제 해군의 석탄 창고가 설치되는 수모를 겪었다.
러일 전생의 첫 포성이 울린 제물포 해전은 월미도 앞바다(월미해협)에서 벌어졌고,
일제가 승리하고 나서는 병참기지화되었다.
1920년대 후반-1930년대 일제 강점기에는
일제가 소위 '조선 제일의 유원지'라는 명목으로
월미조탕을 비롯한 유원지, 숙박시설을 지어 부유한 자들에게만 호화로운 인공낙원을 제공하였다.
한국전쟁의 판도를 뒤바꾼 인천상륙작전 당시에는
미군에게서 네이팜탄 폭격을 당하고 인천으로 가는 길을 터 주게 되었다.
이 폭격으로 약 120가구 600여 명이 살던 마을이 불바다가 되고 월미도민 100여 명과 월미도에 파견된
육지의 노무자 상당수가 죽었다.
전쟁이 끝나고
피란에서 돌아온 월미도민들은 월미도로 귀향하여 사라진 마을을 재건하려 하였으나,
휴전 후에 미군부대가 계속 주둔해서, 미군 부대가 물러가자마자 바로 한국군이 들어와 해군 기지를 세워서,
국방부와 인천시가 도민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월미도를 사고팔아서,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도민들은 '귀향대책위원회'를 꾸려 배상과 귀향을 요구하였고,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는 국가가 월미도민들에게 배상을 해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으나
아직도 배상이 되지 않고 있다.
1989년 7월 문화의 거리가 조성된 이래
인천 바닷가의 유명 관광지 중 하나로 떠올랐다. 썰물 때도 갯벌이 드러나지 않아 언제나 바닷물을 볼 수 있다.
월미산에 둘레길이 조성되고,
한국전통정원, 전통문화체험관, 한국이민사박물관등이 설립된 데다가, 다양한 놀이동산까지 들어서면서,
월미도는 인천 명소의 위상을 되찾고 있다.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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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북항과 영종대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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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미도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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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미도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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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미도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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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미도 유람선 선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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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미테마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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