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牛馬처럼 걷는 부산+경남 여행

(거제) 임진왜란 중 조선 수군이 대패한 칠천량 해전(漆川梁海戰)

 

임진왜란 중 조선 수군이 대패한 칠천량 해전(漆川梁海戰)

 

 

 

 

 

언제 : 2019년 6월 22일 토요일

어디 : 경남 거제시 하청면 연구리

 

  

전쟁에서 패한 곳을 찾아가는 마음은 착잡하다.

임진왜란 중 조선 수군이 왜군에게 유일하게 대패한 전투가 칠천량 해전이라고 한다.


거제도 여행을 왔으니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을 모함하여 감옥으로 보내고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원균은

 어떤 이유로 왜군에게 전함 150여 척과 수천 명의 수군을 잃고 임진왜란 중 유일하게 왜군에 대패하여 

궤멸 상태에 이르게 되었는가?

 

요즘처럼

대일 관계가 좋지 않을 때 칠천량 해전을 알아보는 것도 옳은 일이다.

 

거제시 거제포로수용소 유적지를 출발 거제도 좌해변길을 따라 가덕대교 방향으로  25분 정도 가면

주변 산과 섬들의 초여름 초록빛이 온통 연초록 빛으로 반짝이는 곳이 나타나는데

이곳은 바로 거제 맹종죽 테마공원이다.

 

맹종죽 테마공원에서 4km를 더 가면 왼쪽 바다에 칠천도라는 섬이 있는데

칠천도와 거제도 사이 좁은 해역을 칠천량이라고 하며 이곳에서 임진왜란 중 유일하게 조선 수군이 왜군에

대패한 곳으로

 지금 거제도와 칠천도를 연결하는 칠천대교가 놓였고

칠천도 앞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산 위에 칠천량해전 공원이 조성되었다.


 


맹종죽

호남죽, 죽순죽,일본죽,모죽이라고도 하며,

높이 10~20m, 지름 20cm 정도로 대나무 중 가장 굵은 대나무를 말한다.

 

 

칠천량 해전

임진왜란 중 일본은 명과의 화의가 결렬되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97년 1월 조선을 재침략했다.

이때 이순신이 무고로 하옥되고

대신 원균이 전라좌수사 겸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되었다.


그해 7월 8일 일본 전선 600여 척이 부산앞바다에 정박했다.

원균은 7월 14일 부산의 일본 전선을 급습했으나 일본수군의 교란작전과 풍랑으로 실패하고 거제도 영등포로

 후퇴했다.

조선수군은 영등포에 상륙했다가 일본 복병에게 급습을 당하자
 칠천량으로 후퇴하여 포구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15일 밤 일본수군의 수륙양면기습작전에 말려들어 대패했다.

이 해전으로 원균과 전라우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최호가 전사했으며, 조선의 삼도수군은 일시에 무너지고

일본함대는 서쪽 해상을 향해 쳐들어가 일본군의 남원 및 전주의 공격을 용이하게 했다.


이순신은 다시 전라좌수군절도사 겸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되었다.

[Daum백과] 칠천량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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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천 대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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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파(loquat, 枇杷)

우리나라 남부, 일본, 동남아시아, 중남미 국가 등에서 널리 재배되는 아열대식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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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천 대교(425m)

이 좁은 해역을 칠천량이라고 불린다.



칠천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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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천량

 

칠천량

 

  

칠천량 해전 기념관 

칠천량이 내려다 보이는 얕으막한 산 위에 기념관이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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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옥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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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옥선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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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이 끝난 후

원균은 권율과 이순신과 더불어 선무공신 1등으로 봉해졌다.

그 이유는

선조가 원균을 감싸야 선조의 무능이 덜하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한산의 패배(칠천량) 대하여 원균은 책형(磔刑)을 받아야 하고 다른 장졸(將卒)들은 모두 죄가 없다.
왜냐하면 원균이라는 사람은 원래 거칠고 사나운 하나의 무지한 위인으로서
당초 이순신(李舜臣)과 공로 다툼을 하면서 백방으로 상대를 모함하여 결국 이순신을 몰아내고
자신이 그 자리에 앉았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일격에 적을 섬멸할 듯 큰소리를 쳤으나
지혜가 고갈되어 군사가 패하자 배를 버리고 뭍으로 올라와 사졸들이 모두 어육(魚肉)이 되게 만들었으니
그때 그 죄를 누가 책임져야 할 것인가.
한산에서 한 번 패하자
뒤이어 호남(湖南)이 함몰되었고 호남이 함몰되고서는 나랏일이 다시 어찌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시사를 목도하건대 가슴이 찢어지고 뼈가 녹으려 한다.

《조선왕조실록》 선조 99권, 31년 4월 2일 2번째 기사. 사관의 논평.

칠전량의 책임이 원균에게 크다는 비변사의 말에
선조가 "원균 핑계대지 말라"라고 감싸자 한 사관평이다.


 



칠천량 해전의 배경

원균이 지휘한 조선 수군은 1597년 3월 8일의 기문포해전과 그해 6월 19일의 안골포 및 가덕도해전을 거쳐

7월 8일 조선 수군의 절반이 참여한 절영도외양해전을 수행하였다.

부산 근해까지 출동했던 조선 수군이 귀환할 무렵,

통제사 원균은 도원수 권율로부터 곤양으로 출두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7월 11일에 곤양에 도착한 권율은 원균에게 곤장을 치면서

이번 출정에서 휘하 수사들에게 출동하게 하고 본인이 직접 출동하지 않은 사실을 문책하였다.

권율의 독촉에 대해 원균은 장졸들이 휴식을 취할 필요가 있고,

이미 장마가 시작되어 출항이 용이하지 않았기 때문에 장마가 그치면 출항하겠다는 뜻을 개진했지만,

권율로부터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원균은 분한 마음을 안고 한산도로 돌아와 전 수군 전선을 이끌고 출동하게 되었다.

원균은 7월 12일에 출정을 단행한 것으로 보아진다.

당시 조선 수군의 출정항로는 정확하게 파악되지 않고 있으나,

이곳의 조선시대 항로가

한산도-장목포진-칠천도-이물도-옥포-조라포-천성 가덕-절영도 전양이었던 점을 고려해 볼 때

 7월 4일 출정시의 항로와 비슷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즉 『난중일기』에 의하면

종 세남(世男)이 전한 절영도 외양해전 당시 조선 수군의 출정항로는

한산도-칠천량(7. 5)-옥포(7. 6)-말곶(7. 7)-다대포-부산 절영도 외양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출전 날짜와 경유지를 고려해 볼 때 칠천량해전 당시의 출전일자와 경로를 상정할 수 있다.

 7월 12일에 출동한 조선 수군은 칠천량에서 1박한 후

옥포에 도착하여 밤을 보내고, 14일 새벽에 옥포를 출발하여 부산에 이르렀다.

당시 조선 수군이 부산으로 향하던 중 일본군들은 조선 수군의 움직임을 알고 서로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통제사 원균이 이끈 조선 수군은

 가덕도의 맨 아래 부분인 말곶을 거쳐 다대포를 경유한 후 부산 앞바다에 도착하였다.

이때 마침 일본으로부터 약 1천여 척의 적선이 부산으로 오고 있었는데,

이를 발견한 조선함대는 적 세력을 향해 전진하였다.


이때 일본 군선들은 조선함대와의 접전을 회피한 채 흩어졌다.

원균은 이 틈을 타 일본 군선들을 공격하도록 지시하였다. 조선함대는 일본 군선들을 쫓던 중

조류가 바뀌는 바람에 부산 앞 바다의 물마루[水嶺]를 넘어 외해 쪽으로 떠밀려가게 되었다.


더욱이 여러 배들이 풍랑에 의해 제멋대로 움직여 바른 운항을 할 수 없었다.

위험한 지역에 도달한 사실을 깨달은 원균은 후퇴를 지시하였다.

그 와중에 전라우수영 소속의 배 7척은 조류를 제어할 수 없어서 동해로 표류하고 말았다.


조선 수군은 겨우 전선을 수습하여 회항하면서 밤새도록 노를 저어 15일 아침 무렵 가덕도에 도착하였다.

이때 일본군은 기존에 있던 전선과 새롭게 합류한 전선을 합해 500여 척을 동원하여 추격해 옴으로써

조선 수군은 휴식을 취할 틈도 없이 이동하여 거제도 영등포로 물러나게 되었다.

이때 일본군은 조선 수군이 영등포에 도착하면 반드시 땔감과 물을 구하러 상륙할 것을 예측하고

전날 밤 빠른 배 50여 척을 영등포로 보내 상륙시켜 매복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을 모른 채 영등포에 상륙했던 조선 수군의 군사 400여 명은

매복해 있던 일본군에 의해 참변을 당하고 말았다.

통제사 원균은 갑작스레 당한 일이라 이들을 구할 생각도 못하고 칠천도에 후퇴하여 정박하였다.


해전의 경과

조선함대가 칠천량에 도착할 당시에는 7월 15일 밤 이경(10시 무렵)이었다.

따라서 적선도 많이 도착했지만,

날이 어두워져 피아가 군사를 거두고 상호 엄중히 경계하면서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이때 일본군들의 기습으로 전선 4척이 전소되었는데 대책을 강구하기 어려울 정도로 조선 수군은 지친 상태였다.

 일본군들은 이미 도착하여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이날 밤 원균은 제장들을 소집하여 놓고 죽기를 각오하고 싸울 것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원균의 지시에 대해 경상우수사 배설(裵楔)은

용기를 낼 때와 겁낼 때를 구분하는 것은 병가의 요긴한 계책인데,

오늘에는 겁내어 싸움을 회피하는 전략을 써야 할 것임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원균은 이를 듣지 않았다.

이에 배설은 돌아가서 은밀하게 자신에게 소속된 군사들과 함께 퇴각할 계획을 세웠다.


이러한 와중에 일본 군선 10여 척이 몰래 조선 수군의 허실을 탐지하고 갔고,

병선 5~6척으로 우리 진영의 복병선을 몰래 둘러쌌는데, 조선 수군은 이를 모르고 있었다.

새벽에 일본 군선들에 의해 우리의 복병선들이 분멸되자 원균이 화전을 쏘아 적의 내침사실을 휘하에 알렸다.


그러자 이미 도착해 있던 일본 군선들이 들이닥치면서

그들이 쏘는 조총소리에 조선 수군은 크게 놀라 당황하게 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아침 6시경이 되어

일본 군선들이 가까이 포위해 왔다. 원균은 닻을 내린 가운데 응전하였는데,

적선이 조총을 앞세우고 4면으로 포위하면서 거세게 몰려와 중과부적이었다.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된 후

조선 수군 일부와 일본 수군 간에 격전이 펼쳐져서 양측에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이때 경상우수사 배설은 먼저 기회를 틈타 관하 10여 척과 함께 도주하고 말았다.

결국 조선 수군은

일본 수군의 전면적인 습격을 받아 더 이상 지탱할 수 없게 되자 닻을 올리고 흩어져 달아나기 시작했다.

전라우수사 이억기와 충청수사 최호(崔湖)는 고성방면으로 퇴각하고,

원균의 전라좌수군은 고성땅 추원포 쪽으로 탈주하였다.


흩어진 조선 수군은

인근 거제도· 가덕도와 주변 해안에 상륙한 가운데 육지의 일본군들에 의해 살육당하기도 했다.

그 사이 배설은 견내량을 통과하여 한산도로 향하였다.

당시 칠천량해전에 참전한 일본 수군은

와키사카(脇坂安治)·구키(九鬼嘉隆)·가토(加藤嘉明)·토도(藤堂高虎) 등으로

 일본 수군장 대부분이 연합하여 참전하였다.

 

일본 수군의 전술을 보면 조선의 전선 한 척에 일본 군선 여러 척이 포위한 후

조선의 전선 위에 올라가 백병전을 벌이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특히 이러한 전술은 조선 수군이

흩어져 달아날 때 주로 구사되었다. 또한 일본 수군은 상대적으로 높은 조선의 전선에 오르기 위해

군선의 범주(帆柱)를 눕혀 사다리로 사용한 채 전선에 오른 후 백병을 사용하는

고유의 왜구(倭寇) 전술을 구사하기도 했다. 이러한 전술을 등선백병전이라고 부른다.


한편 원균과 함께 행동했던 선전관 김식의 보고에 의하면

원균이 이끈 조선 함대는 고성 땅 추원포로 후퇴하여 주둔하고 있다가 적과 교전하였다.

그러다가 결국 조선의 전선들은 대부분 불에 타 분멸되었으며,

원균은 선전관 김식, 순천부사 우치적(禹致績)과 함께 육지로 상륙하였지만 뒤따라 온 일본군의 칼날에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정되었다.

한편 고성 땅에 상륙한 조선 수군은 이미 하륙하여 있던 일본군들에 의해 죽음을 당하였다.


전투의 와중에 전라우수사 이억기는 힘껏 분전하여 많은 적을 사살한 후 육지에 내려서 전사하였다.

충청수사 최호는 최후까지 용전하다가 전세가 기울어졌음을 한탄하면서 투신 자결하였다.

반면에 조방장으로 활약한 김완(金浣)은 고군분투하면서 적선 수척을 분멸하였으나 결국 적에게 포로가 되어

일본에 압송되었다.

당시 무적의 전선으로 불리워진 거북선도 초기에는 일본 군선들에 큰 피해를 입히며 선전했으나

결국 중과부적으로 당하지 못하고 일본군에 의해 분멸되고 말았다.

칠천량해전의 상황을 그림으로 표시하면 〈그림1〉과 같다.


칠천량해전 상황도

[그림 1] 칠천량해전 상황도


한편 일본 측에서는 이 해전이 거의 유일한 승전이었기에 관련 기록이 많이 전하고 있다.

이를테면 와키사카의 경우 16척의 조선 전선을 탈취했다고 하였다.

이 전투에서 토도 다카도라의 전과가 가장 크다고 기록하고 있다. 토도는 160여 척의 적선을 나포하고

수천여 명의 군사를 살해했다고 되어 있다.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는 늦게 도착했지만 3,000명의 병력으로

거제도 육지에서 대철포를 쏘면서 전투에 가담한 것으로 나온다.

 가토 요시아키도 상당한 활약을 했음을 밝히고 있다.


이러한 일본의 사료들은 정확성에 의문이 가지만

당시 칠천량해전에 참가한 장수들의 명단을 제시한 데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칠천량해전 초기 한산도로 탈주한 배설은 한산도 진을 소개시키고 군량을 불태운 뒤 남해상을 서진하였다.

한편 조선 수군에 막대한 피해를 입힌 일본 수군은 한산도에 들어와 진막을 불태우고

미처 피신하지 못한 남녀들을 모두 살육하였다.

 


해전의 결과와 교훈

칠천량해전에서 조선 수군은 궤멸적인 피해를 입은 채 패하고 말았다.

전선 160여 척 중 배설이 끌고 간 10여 척을 제외한 나머지 전선이 모두 분멸되었다.

임진년 첫 해전부터 이전까지 한 번도 패하지 않았던 조선 수군이 이렇게 크게 패하게 된 원인은 무엇일까?


기존 해전연구자들의 분석은 대개 다음의 세 가지로 정리한다.

첫째는 수군의 군령권, 즉 작전권이 통제사가 아닌 체찰사와 도원수에게 부여됨으로써 해전을 모르는 문신들에게

수군을 지휘하게 한 데에 있다는 것,

둘째는 수군 세력의 대부분이 적극적인 전투를 하지 않고 ‘도망’했다는 것,

셋째는 통제사 원균의 통솔력 부족을 들고 있다. 아울러 일본 군선의 크기가 대형화한 데서도 찾을 수 있다.


이러한 요인 외에 몇 가지 원인을 추가할 수 있다.

첫째, 조정에서 강압적인 출전 지시를 종용한 데서 찾을 수 있다.

둘째, 수군의 사기 문제도 패배에 큰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본다.

이것은 기존 분석의 첫 번째 이유와 두 번째 이유에 모두 포함되는 부분이다.

셋째, 당시 수군의 지휘부가 상당한 불협화음으로 인해 지휘권이 확립되지 못한 것도 패배의 한 요인이다.


당시 수군 지휘부에서는 이순신이 투옥되고 원균이 통제사로 임명되자

이순신이 투옥된 것은 원균의 모함 때문이라는 인식이 팽배하여 원균의 군령이 제대로 발휘되지 못했다.


어쨌든 칠천량해전에서의 패배는 당시의 전황에 큰 영향을 미쳤다.

무엇보다도 남해상의 제해권을 상실하게 됨으로써 일본의 전라도 침공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이를테면 일본군은 해전 후 경상도 연안을 약탈하면서 한편으로는 전라도 침공 계획을 준비하였다.

그리하여 일본군은 정유재란 시기 최대 공격 목표였던

전라도를 침공하기 위해 침공군을 좌군과 우군으로 나누어 서진하였고, 일본 수군은 좌군과 함께 행동하였다.


일본 수군은 좌군과 함께 경상도 연안을 따라 서진하다가 섬진강 하구 하동 땅의 두치진(豆津)에 상륙하였고,

일부 소형 선박들은 구례까지 이르러 상륙하였다.

이들은 결국 좌군과 합세하여 남원성 공략 작전에 참전함으로써 남원성 함락에 큰 기여를 하였다.

지난 5년간 조선 수군과 의병들이 지켜낸 전라도가 남원성이 함락됨으로써

일본군의 수중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해군사관학교 충무공 이순신 칠천량해전에서 모셔온 글) 



이순신이 1597년 8월 15일에 보성 열선루에서 선조에게 올린 장계이다.
지금 신에게는 아직도 12척의 배가 있나이다.
죽을힘을 다하여 싸우면 적의 진격을 저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 경상우수사 배설이 칠천량전투에서 빠져 나온 12척
그런데 학계는 명량해전에서 왜 13척으로 정리했나?
그것은 이순신의 장계 이후 전라우수사 김억추가 타고 온 배 1척이 추가됐다고 추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