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유산
사적 제150호 익산 미륵사지와 국보 제11호 미륵사지석탑
언제 : 2019년 4월 7일 일요일
어디 : 전북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 32-2
남부지방은 비 예보가 있음에도
국보 제11호 미륵사지서석탑 복원에 대해 1999년 문화재위원회의 해체∙수리 결정 이후
20년에 걸쳐 해체 보수를 완료하고
2019년 3월 23일부터 일반에 공개되자마자 복원 작업의 결과가 ‘석탑 원형(原形) 상실’이라는 원형복원에 대한
감사원과 문화재청과 논란이 된
미세먼지와 흐린 날씨로 시계는 좋지 않았으나
비는 내리지 않아
미륵사지를 잘 볼 수 있었다.
미륵사(彌勒寺)는 백제 무왕 때
왕비인 사택왕후의 발원으로 지어진 무왕(武王)과 선화공주(善花公主)의 설화로 유명한 사찰이다.
639년에 미륵사를 창건한 것으로 기록돼 있으며,
미륵사지 당간지주가 있다.
전북 익산 미륵사지 석탑의 복원 전후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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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사지 가람배치도
가운데 높은 목탑을 배치하고 좌우에 석탑을 배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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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산과 미륵사지
백제시대의 사찰지 규모는
강당에서 중문지까지 134m이며, 폭은 동원과 서원의 외곽 기준 172m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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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사지 석탑과 같이 좌 우에 연지가 두 개
뒤쪽 미륵산에서 발원한 물길은 가람의 네 면에 걸쳐 인공 물길로 정리되었고,
가람의 남쪽 정면에 큰 연못을 조성했던 흔적도 나타났다.
또한 강당 북쪽에는 두 개의 다리가 있어서 인공 물길을 건너 뒤편의 후원(後園)지역으로 연결되었다.
원래 습지였던 곳이어서 각별히 치밀하게 배수 처리를 한 점과 아울러,
각 원의 금당도 특별한 구조로 습기를 예방하였다.
금당 바닥에는 지대석(地臺石)을 깔고 그 위에 1m 정도 높이의 주춧돌을 마름모꼴로 놓았으며,
초석 위에 귀틀목을 걸친 흔적이 있다.
따라서 금당 바닥에 빈 공간을 만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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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람 배치도
이렇듯 백제는 1탑 1금당의 사찰구조를 바탕으로
불교의 미륵신앙을 구현하기 위해 <3탑-3금당>이라는 독특한 사찰구조로 미륵사를 만들었다.
백제인들은 이 미륵사를 통하여 누구나 평등한 삶을 염원했던 미륵하생의 꿈을 이룩하려 하였고,
이로써 모든 백성들의 구원을 이루려는 간절한 염원이 반영되어 만들어진,
고대 백제인들의 신념의 결정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본래 미륵사에는 3기의 탑이 있었다.
중원(中院)에는 목탑이, 동원(東院)과 서원(西院)에는 각각 석탑이 있었다.
중원의 목탑이 언제 소실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동·서원의 석탑 중 동원의 석탑은 발굴 당시 완전히 무너져 내려 석탑에 이용된 석재들이 주변에 흩어지고
그 중 일부는 외부로 유출되어 복원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서원의 석탑은 최근까지 불안하게나마 그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고, 많은 부분이 훼손된 채
동북 측면으로만 6층까지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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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제236호인 당간지주와 동원 구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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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에는 4개의 문과 통로가 있으며 사진과 같이 가운데 기둥이 있다.
안에서 바깥을 본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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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원 구층석탑(동탑)과 국보 제11호 미륵사지 석탑(서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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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사지 가장 윗부분에서 본 미륵사지 두 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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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사 배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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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쪽에서 본 국보 제11호 미륵사지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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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쪽에서 본 국보 제11호 미륵사지 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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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쪽에서 본 국보 제11호 미륵사지 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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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탑도 동탑처럼 탑에는 4개의 문과 통로가 있으며 가운데 기둥이 있다.
출입금지 지역이라 동탑처럼 들어가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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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쪽에서 본 국보 제11호 미륵사지 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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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제236호 당간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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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사지석탑은 발굴 조사 때
동탑지에서 노반석(露盤石)과 없어졌던 지붕돌이 출토되었는데,
이를 서탑과의 비례를 바탕으로 컴퓨터로 계산하여 복원한 결과 9층탑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와 같은 결론에 따라 1992년 미륵사지 동원에 석탑을 복원하였는데, 복원된 높이는 총 24m다.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신라의 석탑 중 가장 높은 경주 감은사지석탑이 13m인 점으로 미루어 볼 때
미륵사지석탑은 그 두 배에 가까운 규모가 되는 셈이다.
한편 2009년 서원의 석탑에 대한 1층 해체조사를 진행하던 중 심주석 상면 중앙에서 사리공이 발견되었고,
사리공 주변에는 십자(十字) 먹선과 석회로 밀봉한 흔적이 남아있었다.
사리장엄은 사리공 안에 안치되어 있었는데 사리호, 금제사리봉영기, 은제관식, 청동합 등
다양한 공양품이 일괄로 출토되었다.
사리봉영기의 판독 결과 석탑은 639년 사리를 안치하면서 건립되었다는 것이 밝혀졌는데,
미륵사가 백제 무왕 집권시대에 창건되었다는
역사 기록이 정확함을 입증해 준 보기 드문 사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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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무왕 때 석조물 아래 핀 민들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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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사 흔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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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사 흔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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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여름
사진에 보이는 미륵산 너머 제2 하사관학교에서 2개월 보병 교육을 받고,
광주 상무대 포병학교 입교하여 4개월 포병 군사 교육을 이수한 후, 1974년 2월 눈이 펄펄 내리던 날
강원도 화천 사방거리에서 35개월 군 생활을 마쳤다.
이번 미륵사지를 찾아가는 길에
지금의 육군 부사관학교(육군 제2 하사관학교)를 지나며
46년 전 무덥던 여름,
연무대에서 단기하사로 차출되어 "인간 재생창"이라는 악명 높은 지독한 보병 훈련을 받았던
미륵산을 다시 바라보니
영영 찾아가지 못할 고향을 찾아온 듯 반갑고
지나간 내 청춘과 내 젊음을 잠시나마 돌아볼 수 있어 감사한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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