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가득히 내리는 삼부연폭포(三釜淵瀑布)
언제 : 2018년 10월 3일 수요일
어디 : 강원도 철원군 갈말읍 신철원리
대체로
폭포는 깊은 골짜기 높은 절벽에서 내리기에 산을 오르고 내림의 발품을 파아야 하는데,
삼부연폭포는
도로 가까이 있어 다른 폭포에 비해 접근하기가 아주 쉽다.
직탕폭포에서 삼부연폭포는 약 15km 거리에 있으며
명성산과 각흘산에서 시작된 물줄기가 용화동 저수지를 거치기에
비가 오지 않아도 풍부한 양의 물이 한결같은 위용을 자랑하고, 골을 울리는
폭포 소리는
세상에 찌든 영혼을 일깨워준다.
△
아침 자유로를 달려 철원 가는 길에 담은 임진각의 코스모스
△
태봉교
직탕폭포에서 고석정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면 빨간 태봉대교가 보이는데,
이곳은 번지점프를 할 수 있는 곳이다.
△
철원 갈말읍에서 바라본 명성산
△
삼부연폭포
주차장이 따로 있지 않아 도로변에 차를 세우고 처음 본 삼부연폭포의 자태
폭포는 20m 높이에서
세 번의 굽이를 이뤄 장쾌하게 흘러내리며 수묵화를 제 몸으로 그려내고 있는데,
폭포수에 의해 만들어진 물 구덩이 세 개는 위에서부터 노귀탕, 솥탕, 가마탕으로 불려진다.
1,000년 동안 아무리 심한 가뭄에도 물이 말라본 적이 없어 기우제를 지내왔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전설도 있다.
궁예가 철원을 태봉의 도읍으로 삼을 때
소(沼)에 살던 이무기 3마리가 폭포의 바위를 뚫고 승천했다는 것이다.
이때 만들어진 바위의 구덩이 세 개가 가마솥(釜) 모양과 닮아 ‘삼부연(三釜淵)’이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중생대 쥐라기에 마그마가 뚫고 들어간 화강암이 지표에 드러난 이후
흐르는 물에 침식돼 만들어진 것이다.
조선시대 겸재 정선이 금강산을 그리러 가던 길에 이곳을 지나다가
삼부연폭포에 마음을 빼앗긴 절경이다.
겸재는 금강산을 오가는 길에 이 일대에 은거하던 스승 삼연 김창흡을 찾아왔다가
이 폭포의 경관에 반해 진경산수화를 남겼다.
조선 중기 대성리학자 김창흡은
금강산 가는 길에 이 폭포에 반해 자신의 호를 삼연三淵으로 고치고,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여기서 삶을 마감.
그 후 마을의 이름도 용화동(龍簧)이라 했다.
김창흡이 석천사에서 용화동으로 돌아오다가 구첩병(九疊屛) 위에서 시
春鳥聯羣出樹飛
山僧送客拈花歸
南峰瀑布歸迢遞
猶恐餘波拂我衣
十日回筇春盡還
與君申憇此松間
摩挲老幹心千古
非不煙花滿四山
봄날에 새는 무리지어 나무에서 날아오르고
산승(山僧)은 손님 보내고 꽃을 들고 돌아가네.
돌아보니 남쪽 봉우리의 폭포 아득히 멀리 보이는데
아직도 잔물결 내 옷 털어낼 것 같네.
10일 만에 돌아가니 봄날은 모두 지나가고
그대와 여기 소나무 사이에서 쉬고 있네.
앙상한 늙은 가지 매만지며 오랜 옛날 생각하니
온 산에 봄날의 꽃 가득하구나.
*구첩병 : 벽처럼 서 있는 큰 돌병풍.
김창흡(金昌翕)
조선 중기의 학자(1653~1722).
자는 자익(子益). 호는 삼연(三淵). 김수항의 셋째 아들로 성리학에 뛰어나 형 창협과 함께
율곡 이후의 대학자로 이름이 높았다. 저서에 ≪삼연집≫이 있다.
삼부연(三釜淵) _ 면암 최익현(勉菴 崔益鉉)이 금강산 유람 도중
踏遍仙源不假船
窮途壯觀亦由天
九龍瀑下形俱忘
三釜潭中興又牽
선원을 두루 다닐제 배는 소용없네
장관을 모두 구경함은 하늘이 주었지
구룡폭포 아래서는 나마저 잊었고
삼부담에서는 더욱 흥겨웠어라
攀去緣崖難付屐
坐來班草更成筵
却歎淵老淸高節
溪北猶留舊飮泉
벼랑에 오르니 발붙이기 어렵고
풀밭에 앉으니 좋은 자리를 편 듯
문득 연로의 청고한 절의에 탄식하노라니
시내 북쪽에 아직도 옛 샘이 있다네
면암 최익현(勉菴 崔益鉉)
대한제국 때 을사조약의 무효를 선포하고 국권회복에 힘쓴 문신.
본관은 경주, 아명은 기남, 자는 찬경, 호는 면암으로 1855년 급제하여 관직에 오른 이후
대원군의 정책을 비판하는 등 직언을 아끼지 않았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조약의 무효를 국내외에 선포하고 망국조약에 참여한 외부대신 박제순 등 5적을 처단할 것을 주장했다.
〈포고팔도사민〉을 각지에 보내 우리 민족이 당당한 자주민임을 밝히고,
국권회복에 동참할 것을 호소했다. 1895년 8월 명성황후시해사건이 일어나고, 11월에 단발령이 내려지자
포천군 내의 양반들을 모아 국모의 원수를 갚고 단발령에 반대할 것을 꾀했다.
1906년 수백 명의 유림을 모아 의병을 모집했으나
곧 잡혀 쓰시마섬으로 유배되었고, 병을 얻어 순국했다.
삼부연폭포를 떠나며
둘째 매형 고향이 포천인데
삼부연폭포를 자기 고향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 중의 하나라던 어렸을 때 얘기 들은 적이 있다.
그리고
서울에서 요식업을 하시면서 상호가 삼부연이었다.
그런 연유로
나는 삼부연에 대해 어려서부터 알았고, 삼부연폭포를 세 번 찾아왔는데,
찾아올 때마다 폭포의 물이 내려 실망하지 않고 잘 정돈된 아름다운 삼부연폭포를 감상했다.
오늘 일정도 삼부연폭포가 마지막이다.
언제
다시
내가 이곳을 다시 올 수 있을지 모르지만,
다시 찾아오고 싶은 곳이다.
만나면 반갑고 헤어지면 또 아린 것이 삶이 아니던가!
이제 돌아가야 한다.
여행자에게 해 질 녘 돌아가 쉴 곳이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부지런히 달려
도봉산을 넘어가는 해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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