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종애사(端宗哀史)
9. 장릉(莊陵): 단종의 무덤 - 사적 제196호
세계 유산
언제 : 2018년 9월 26일 수요일
어디 :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 산131-1
1547년 6월 21일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창덕궁 돈화문을 떠나 청계천 영도교에서 사랑하는 정순왕후 송씨와 이별하고,
아버지 문종의 묘에 이별을 고한 후,
한양에서 마지막 밤은 살곶이 다리를 건너 화양정에서 지낸 후,
6월 22일
광나루에서 뱃길로 여주 이포나루에 도착.
1547년 6월 28일
강원도 영월 청령포에 유배되었다가, 홍수로 인해 관풍헌으로 옮겨 지내던 중
경상도 순흥에서 금성대군의 왕위 복위 운동마저 사전에 발각되어 노산군은 서인으로 강등되어
1457년 10월 24일
17세 나이에 영월 관풍헌에서 사약을 받고 숨을 거두고
장릉에 묻히었다.
△
재실
이 건물의 처음 건립연대는 숙종25년(1699)이고, 1932녀에 중건하였다.
이곳에는 능을 지키는 참봉 1인과 수호군 9인이 기거하였으며 매년 단종제향을 지낼 때 이곳에서
제물을 준비하고 제기를 비롯한 각종 사용 기구를 보관해오던 곳이다.
1997~1998년 재실지붕 및 배수로를 보수정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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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홍도 정여간
이 비각은 엄홍도의 충절을 후세에 알리기 위하여 영조 2년(1726)에 세운 것이다.
충신 엄홍도가 영월호장으로 있을 때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봉 유배되어 관풍헌에서 1457년 10월 24일
사약을 받고 승하하여 그 옥체가 강물에 버려지자
단종의 시신을 거두는 자는 삼족을 멸한다는 어명에도 불구하고 가족과 함께 단종의 시신을 암장하여
충신으로 추앙 받고 있다.
순조 33년(1833)에 공조판서로 추증되었고, 고종 13년(1876)에 충의공이란 시호를 받았다.
△
장판옥(藏版屋)
이 건물은 정조 15년(1791)에 건립한 것으로 단종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
충신위(忠臣位) 32인, 조사위(朝士位) 186인, 환자군노(宦者軍奴) 44인, 여인위(女人位) 6인을 합하여
268인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
배식단(配食壇)
이곳은 단종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 충신위, 조사위, 환자군노위, 여인위의 영령을 추모하기 위하여
매년 단종제향과 함께 제사를 지내는 제단.
조선 후기 정조 때 시작한 배식단의 충신제향은 조선왕릉 중에서 유일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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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릉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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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 비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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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려각
장릉은 정려각과 바르게 있지 않고, 산 위에 다른 방향을 보고 있다.
△
장릉(莊陵)
조선 제6대 단종의 능
▽
단종이라는 묘호와 단종의 묘가 장릉이라는 능호를 받은 것은 단종 사후 241년만인
숙종 때였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그 날이 1698년으로 숙종 24년 11월 6일(양력 12월 8일)이었다.
하지만
그 이전인 중종 11년(1516) 단종 사후 59년이 되던 해 중종은 우승지 신상을 노산군 묘에 보내어
제사를 지내게 했다.
신상이 돌아와서 결과를 보고하면서,
눈물을 흘리며 자신이 본 초라한 단종의 단종의 무덤에 관한 묘사를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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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 능에서 바라 본 장릉 경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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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령송
왕비인 정순왕후 송씨의 능인 사릉에서 가져온 소나무
▽
단종애사 - 단종의 유배길을 마감하며
단종에 대한 모든 이야기는 정설을 우선으로 했으나, 나의 생각도 포함되었을 것이다.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사랑하는 정순왕후와 함께 창덕궁 돈화문을 나서 청계천 영도교에서 이별한 후
다시는 이승에서 만나지 못하고 영월 땅에 묻힌 장릉까지
단종애사 - 단종의 유배길이란 테마로 3일 간에 걸쳐 단종이 걸었던 길을 걷거나 승용차를 이용하여
장릉까지 왔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결국 사라진다.
영원이라는 것은 영원이란 단어 외엔 존재하지 않다고들 말한다.
이제
끝을 맺으며
수양대군의 심정을 잠깐 돌이켜 본다.
수양대군의 할아버지 이방원(태종)이 왕자의 난으로 권력을 잡아 확실하지 않던 개국 초기의
왕실을 확고히 만들어 세종대왕을 만들었다.
세종과 소헌왕후(昭憲王后) 사이에 출생한 적자(嫡子)는
문종 외에도 수양(首陽)·안평(安平)·임영(臨瀛)·광평(廣平)·금성(錦城)·평원(平原)·영응(永膺)의
일곱 대군이 있었다.
그러나
세종이 죽고,
문종이 허약하다 보니 왕권은 약해지고 신권은 강한 형세였다.
수양대군의 형님인 문종은 건강이 좋지 않아 단종을 낳고 3일 만에 죽은 현덕왕후 이후
세자빈을 들이지 않아 더는 후손이 없는 데다,
단종이 12살 되던 해,
문종이 병으로 죽자, 12살 어린 왕세자가 왕위에 오르니 그가 단종이다.
평소
수양대군의 심성을 아는 문종은
김종서와 황보인 등을 불러 어린 왕을 부탁했기에 모든 정치적 권력은
문종의 유명을 받은 이른바 고명대신(顧命大臣) 황보 인(皇甫仁)·김종서(金宗瑞) 등이 잡았다.
왕실의 어른인 수양대군은
신하들에 의해 조카 단종의 왕권이 결국 그들에게 돌아갈까 염려에 이들이 세력을 더 굳히기 전에
제거할 계획을 추진하여
결국
1453년(단종1년) 음력 10월 10일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켜 김종서와 황보인 등을 제거하고
형제인 대군들을 귀양보내고 1455년 스스로 왕 되니
그가 조선 제7대 왕 세조이다.
그는
왕권의 추락과 신권의 막강함과 사회 혼란을 이유로 들어 정변의 당위성을 역설하였으나
조카인 단종을 몰아내고 자기가 왕권을 잡은 일도 잘못된 일이고,
어린 조카를 귀양 보내 낯선 땅에서 사약을 내린 일도 잘못된 일이기에 아무리 세조가
백성을 위해 선정을 펼쳤다 해도
오늘날까지 단종에 대한 국민적 정서는 나와 같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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