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정문학촌과 장대 소낙비
언제 : 2018년 8월 15일 수요일
어디 : 강원도 춘천시 신동면 증리 실레마을
내일이 말복.
말복이 지나면 열대야는 사라지고,
조석 간 기운은 시원하나 곡식 결실을 위해 한낮 햇볕은 따가울 것이다.
오늘은 가평 명지산 명지계곡 도보여행을 하려고 소설가 후배와 함께 승용차 이용
07:00
집을 나서
북한강 변에서 샌드위치와 커피로 아침을 들고
10:00
명지계곡 가는 곳곳에는
막바지 피서를 하느라 사람은 넘쳐나고 조무락계곡까지 주차할 곳을 찾을 수 없다.
어쩔 수 없이
명지계곡 도보여행은 포기하고
맛난 점심을 들기 위해 춘천으로 달려 숯불 닭갈비와 막국수로 배를 채우고,
김유정문학촌을 찾았다.
△
구 김유정역
한국 철도 사상 최초로 특정 인물의 이름을 따서 지은 역명이다.
1939년 역이 개설되던 당시 역의 이름은 신남역(新南驛)이었으나
2002년 인근 마을에 김유정문학촌과 기념관, 생가 등이 복원되면서 2004년 김유정역으로 개칭되었으며,
2010년 신역사를 짓고
구 김유정역은 준철도기념물로 관리 보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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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여름처럼 푹푹 삶는데도 꿋꿋하게 자라 꽃을 피운 해바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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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정문학촌 안내도와 주변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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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정 단편소설 솟=솥의 마지막 장면의 조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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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정 생가와 문학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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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가 앞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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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정 생가
생가는 산골 집으로는 제법 큰 ㅁ자 형태이며 아래 사진은 생가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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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가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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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가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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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허謙虛
겸허謙虛는 스스로 자신을 낮추고 비우는 태도 - 남을 존중하고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 겸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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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가 한편 연못에는 연꽃이 어여쁘게 피어 정자에 앉아 연꽃을 감상하며
더위를 식혀갈 수 있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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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관과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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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가의 설명을 듣는데,
술술 막힘이 없이 구수하게 풀어가는 설명이 타고난 해설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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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정의 작품 포인트
김유정이 살았던 농촌에서는
일본의 식민통치 초기부터 1910년 [토지조사사업]과 1920년 [산미증식계획]의 명목으로
침략전쟁의 뒷바라지와 차질 없는 식량공급을 강요해왔다.
1920년 경제공항의 돌파구를 찾기 위해
일본은 [만주사변(1931)]과 [중일전쟁(1937)], [태평양전쟁(1941)]등으로 침략전쟁을 확대시켜
한국을 더욱 강압적으로 약탈하고 상품시장으로 만들었다.
당시의 농촌 모습을 알기 위해서는 지주와 마름, 그리고 소작농민에 대하여 알아야 한다.
“번이 마름이란 욕 잘하고 사람 잘치고 그리고 생김생기길 호박개 같애야 쓰는거지만 장인님은 외양이 똑됐다.
작인이 닭마리라 좀 보내지 않는다든가 애벌논때 품을 좀 안 준다든가 하면
그해 가을에는 영낙없이 땅이 뚝뚝 떨어진다.
그러면 미리부터 돈도 먹이고 술도 먹이고 안달재신으로 돌아치든 놈이 그 땅을 슬쩍 돌아안느다.
이 바람에 장인님집 외양간에는 눈깔 커다란 황소 한놈이 절로 엉금엉금 기여들고 동리사람은 그 욕을
다 먹어가면서도 그래도 굽신굽신 하는게 아닌가 ”
-봄봄 중에서, 김유정 전집. 1987-
소설 '봄‥봄'에는 읍내 사는 배참봉댁 마름인 봉필영감이 등장한다.
그리고 '봄·봄'과 '동백꽃' 이 외에 작품에서도 마름과 소작인의 관계가 드러난다.
지주는 토지 소유자로 농지가 없는 소작농민에게 토지를 빌려주고, 심복이라 할 수 있는 마름을 시켜
소작 농민을 감독하고, 소작료를 징수했다.
그런 과정에서 마름은 소작농민을 노예처럼 함부로 다루었고, 지주와는 별개로 수탈을 하기도 했다.
당시 지주는 수리조합비·비료대 등의 각종 부담까지 소작농민에게 전가하여 80%의 소작료를 수탈하였다.
소작료 이외에 노력봉사·경조사 비용 등 각종 명목을 소작농민에게 부담시켰다.
소작농민은 지주에게 신분적, 경제적으로 예속되어 노예나 다름없었다.
이에 따라 조선인 빈농 약 29만 9천명이 토지를 상실하고 북간도로 이주하였다.
관념적 피상적 농촌소설과 달리 김유정은 실감나는 농촌소설을 썼다.
그것은 체험과 관계가 깊다. 그는 서민적인 것을 좋아했다.
또 소박하면서도 황소고집이었다. 그것은 산골에서 직접 살며 농촌 분위기를 가까이 접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김유정 시대의 가난한 농촌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 김유정문학촌 홈페이지에서-
△
이야기관 입구
매우 인상적인 것은 책을 쌓아 입구 아취를 만들었다.
........저에게 원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제가 어려서 잃어버린 그 어머님이 보고 싶사외다.
그리고 그 품에 안기어 저의 기운이 다 할 때까지 한껏 울어보고 싶사외다.......
-미완성 장편소설 '생의 반려' 중에서
김유정이 일곱 살이 되던 해,
어머니를 여읜 슬픔은 그의 자전적 소설 '생의 반려' 속에 잘 나타난다.
매일매일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살던 김유정은 휘문고보를 졸업하던 해에 어머니를 닮은 한 여자를 만난다.
그가 바로 김유정의 첫사랑 박녹주이다.
그때부터 김유정은 박녹주에게 2년여 동안 광적인 구애를 했으나,
그의 애절한 마음은 끝내 받아들여지지않는다.
당대의 유명한 명창이자 기생이었던 박녹주가 네 살 연하의 김유정의 마음을 알아줄 리 없었다.
......어디 사람이 동이 낫다구 거리에서 한번 흘낏 스쳐본, 그나마 잘 낫으면 이어니와, 쭈그렁 밤송이같은
기생에게 정신이 팔린 나도 나렷다.
그럿두 서루 눈이 맞아서 달떳다면야 누가 뭐래랴 마는 저쪽에선 나의 존재를 그리 대단히 너겨주지 않으려는데
나만 몸이 달아서 답장 못받는 엽서를 매일같이 석달동안 썼다.......
-소설 '두꺼비' 중에서
그래도 김유정은 끊임없이 "벌거숭이 알몸으로 가시밭에 둥그러저 그님 한 번 보고지고"를 외쳤다.
우리는 구인회 동인지 [시와 소설]속에 실렸던 소설 '두꺼비'를 통해 김유정과 박녹주의
그런 관계를 짐작할 수 있다.
박녹주와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자,
김유정은 실의에 빠지게 되고, 고향인 춘천 실레마을로 돌아오게 된다.
이산 저산이 어머니 품처럼 포근히 마을을 감싸고 있는 고향마을에서 김유정은 마음의 안정을 찾게 된다.
고향에서도 김유정은 나이 많은 들병이들과 같이 어울리며, 마을 사람들과 정을 나눈다.
이런 것들이 바탕이 되어 '봄봄', '솥', '산골나그네', '총각과 맹꽁이'등 12편의 작품이
고향을 배경으로 쓰여졌다.
― 김유정문학촌 홈페이지에서 ―
△
이야기관 내부
김유정의 소설 「동백꽃」에 나오는 동백꽃은
남쪽 해안에 피는 상록교목의 붉은 동백꽃이 아니라 생강나무의 꽃이다.
강원도 사람들은 생강나무 꽃을 동백꽃 혹은 산동백이라고 불러왔다.
「정선아리랑」의 ‘아우라지 뱃사공아 배 좀 건너주게 / 싸릿골 올동박이 다 떨어진다’의 올동박이
바로 생강나무 노란 꽃이나 까만 열매를 의미한다.
대중가요「소양강처녀」의 ‘동백꽃 피고 지는 계절이 오면 / 돌아와 주신다고 맹세하고 떠나셨죠’에
나오는 동백꽃도 생강나무 꽃이다.
김유정은 소설에서, 붉은 동백꽃과 구별이라도 하려는 듯이 ‘노란 동백꽃’이라 표현하고 있다.
당시 강원도의 동백꽃이 생강나무라는 것을 알 턱이 없었을 것인데 ‘알싸한’ 그리고 향깃한 그 내음새‘라고
꽃 냄새를 절묘하게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
생강나무 꽃 = 김유정의 동백꽃
참으로 아이러니한 것은
김유정 소설 동백꽃은 노란 생강나무 꽃인데,
1940년 동백꽃 소설집 표지의 그림은 빨간 동백꽃으로 표현했다.
△
안회남의 김유정전 겸허 중에서
김유정은 "겸허"를 좌우명으로 삼았던 듯싶다.
김유정 생가 방에도 겸허의 액자가 있었고, 전시관에도 겸허라는 글이 몇 군데 있었는데
이곳에는 아예 판 액자로 걸려 있다.
작품명 | 탈고일 | 발표지 | 발표일 | |
---|---|---|---|---|
산 ㅅ골나그내 | 1933.1.13 | 第一線 | 1933.3 | |
총각과 맹꽁이 | 1933.8.6 | 新女性 | 1933.9 | |
소낙비 | 朝鮮日報 | 1935.1.29~2.4 | ||
金따는 콩밧 | 開闢 | 1935.3 | ||
노다지 | 1933.1.13 | 朝鮮中央日報 | 1935.3.2~9 | |
금 | 1935.1.10 | 映畵時代 | 1935.3 | |
떡 | 1935.4.25 | 中央 | 1935.6 | |
산골 | 1935.6.15 | 朝鮮文壇 | 1935.7 | |
만무방 | 1934.9.10 | 朝鮮日報 | 1935. 7.17~30 | |
솟 | 每日申報 | 1935.9.3~14 | ||
홍길동전 | 新兒童 | 1935.10 | ||
봄.봄 | 朝光 | 1935.12 | ||
안해 | 1935.10.15 | 四海公論 | 1935.12 | |
심청 | 1932.6.15 | 中央 | 1936.1 | |
봄과 따라지 | 1935.11.1 | 新人文學 | 1936.1 | |
가을 | 1935.11.8 | 四海公論 | 1936.1 | |
두꺼비 | 詩와 小說 | 1936.3 | ||
봄밤 | 1936.2.10 | 女性 | 1936.4 | |
이런音樂會 | 中央 | 1936.4 | ||
동백꽃 | 1936.3.24 | 朝光 | 1936.5 | |
夜櫻 | 1936.4.8 | 朝光 | 1936.7 | |
옥토끼 | 1936.5.15 | 女性 | 1936.7 | |
生의 伴侶 | 中央 | 1936.8~9 | ||
貞操 | 1936.5.20 | 朝光 | 1936.10 | |
슬픈이야기 | 女性 | 1936.12 | ||
따라지 | 1935.11.30 | 朝光 | 1937. 2 | |
땡볕 | 女性 | 1937. 2 | ||
연기 | 蒼空 | 1937. 3 | ||
정분 | 1934.8.16 | 朝光 | 1937. 5 | |
두포전 | 少年 | 1939.1~5 | ||
兄 | 鑛業朝鮮 | 1939.11 | ||
애기 | 1934.12.10 | 文章 | 1939.12 |
|
- 김유정문학촌 홈페이지에서 -
김유정 생가와 전시관 그리고 이야기 관을 돌아보며
오늘도 변함없이 후덥지근한 날씨라 땀 흘리며 에어컨 아래에서 땀을 식히고 밖으로 나오는데
이게 웬일이람!
천지가 어두워지며 하늘에서 우두둑 물방울 몇 개 내리더니
느닷없이
장대 소낙비로 돌변한다.
얼마나 기다렸던 비인가!
아무도 없는 곳이었다면 홀딱 벗고 비 맞으며 춤이라도 추고 싶은
반가움.
지난 7월 15일 이후 7월 19일 소나기 내린 것 보았고, 오늘 두 번째로 보는 소나기이다.
올여름은 여름이 아니다
사람이 태어나 자라며 그 지역 기후와 환경에 맞게 신체 리듬은 적응하며 살아가는데,
올여름 무더위는 종말론적 날씨라면 틀린 말일까?
여름은 여름다워야 한다는 말을 넘어선 또 다른 계절이었다.
한 시간이라도 내리면 좋겠는데, 번갯불에 콩 구워 먹 듯 하늘이 열린다.
하지만
이것도 감사할 일이지
.....
처음 김유정문학촌에 도착해서 본 해바라기는 갈증을 느끼는 듯 보였는데
한차례 소낙비를 맞고 나니
더욱 싱그럽고 빙긋이 웃는 듯하다.
오늘 원래 계획은 경기도 가평 명지산 계곡 도보여행을 하려다가 넘치는 사람과 주차할 공간이 없어
춘천으로 나와
맛난 점심과 김유정문학촌을 돌아보았는데
덕분에
귀하디귀한 장대 소낙비 내림을 볼 수 있음이 기쁨이다.
내일이 말복이라
오늘 수고한 후배에게 삼계탕을 대접하려고 춘천에서 출발하여 인천에 잘한다고 이름난 삼계탕집에 가
줄 서서 기다리는데,
재료가 다 떨어졌다며 죄송하다네.
어쩔 수 없이 두 번째로 맛나게 잘하는 삼계탕집으로 가서 저녁으로 삼계탕을 대접했더니
맛난 황도 복숭아 두 상자를 후배가 사 둘이 나누니
이 또한 행복이고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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