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계 박연이 즐겨 찾던 옥계폭포(玉溪瀑布)
언제 : 2018년 6월 6일 수요일
어디 : 충청북도 영동군 심천면 고당리 산75-1
옥천 IC로 벗어나 넓은 들을 달려 구불구불 흘러온 금강을 따라 가다
깊은 골짜기 들어서니 어디선가 뻐꾸기 울음 소리 들린다.
옥천 정지용 시인 생가를 찾아가다 갑자기 행선지를 바꿔 찾아간 옥계폭포
폭포도 남자폭포(양폭)가 있고 여자폭포(음폭)가 있다는데,
옥계폭포는 여자폭포란다.
난계 박연 선생이 이곳에서 피리를 불다가 바위틈 난초를 보고 난초 난과 시내 계로 난계라는 호를 쓰신
많은 시인묵객이 찾아들었던 곳이다.
가물어
말라 비틀어진 폭포를 보려나 걱정했는데, 다행스럽게 황소 오줌 줄기처럼 가는 물줄기가
20여 미터를 떨어져 졸졸 계곡을 적시고 있다.
욕심이야
폭포수가 차고 넘치게 떨어져 그 소리가 계곡을 울렸으면 좋겠지만
황소 오줌줄기만이라도 내리니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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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계폭포(玉溪瀑布) 또는 박연폭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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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내도를 보니 옥계폭포에서 난계 사당인 난계사와 난계국악박물관이 가까이 있다
난계 박연
특히 적(笛)의 명 연주가였으며
조선 초 미비한 궁정 음악을 정비하여 고구려의 왕산악(王山岳), 신라의 우륵(于勒)과 함께
3대 악성(樂聖)으로 불린다.
박연은 1378년(고려 우왕 4년) 지금의 충청북도 영동군 심천면 고당리 308에서 태어났다.
1405년(태종 5년)에 생원시에 급제하고 1411년 문과에 제1위(장원)로 등과하여
세종이 대군 시절 세자시강원 문학으로 세종을 가르쳤다.
세종이 즉위한 뒤 악학별좌(樂學別坐)에 임명되어 음악에 관한 일을 맡아 보았다.
세종실록 1428년 2월 20일 조 기사에는 세종으로부터 세상일에 통달한 학자라는 평을 얻었다.
1453년10월10일(단종 1) 계유정난 때
집현전 한림학사이었던 셋째 아들 박계우가 교형되었으나
악학도제조인 수양대군이 악학제조인 박연이 4조(三朝)에 걸친 원로임을 인정하여
3족을 멸하는 죽음을 면하였으나
자손들의 안위를 위하여 1458년 2월 2일까지 고산에 자원 안치되었다가 풀려나
49일만인 1458년 3월 23일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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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계폭포에서 내린 물이 흘러 옥계저수지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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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계저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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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서 보이는 옥계폭포 나무에 가려 상단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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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계폭포와 주차장
인천에서 06:15 출발 - 천안휴게소에서 아침을 들고 - 09:30 옥계폭포 도착
계곡 입구에서 폭포까지는 약 1km
소원을 이루어 주는 영동 옥계폭포(玉溪瀑布)
영동은 우리나라 국토의 중심이고 충북 맨 끝자락 전라도와 경상도를 접하고 있는 과일의 성지이며
국악의 고장으로 난계(蘭溪) 박연 선생의 천년 혼이 살아 숨 쉬는 곳이다.
소백산맥과 노령산맥이 분가되는 곳에 자리잡아
아름다운 산들로 에워쌓여 있으며 월이산(순우리말로 달이산 - 달이 떠오르는 산이라는 뜻)의 주봉과 서봉에서
내달리는 산등성이 아래 옥계폭포가 있다.
옥계폭포(玉溪瀑布)의 옥(玉)은 여자를 뜻하는 말이다.
폭포를 바라보면 여자가 누워있는 형상을 하고 있으며 높이가 20여 미터가 되는 폭포는 비단자락을 드리운 듯
곱고 신비스럽기까지 하다.
어느 날
옥계폭포를 찾은 난계 박연 선생은 오색영롱한 폭포수 밑에서 피리를 연주할 때 바위틈에 피어난 난초에 매료되어
난초의 난(蘭)에 흐르는 시내 계(溪)를 써서 호를 난계(蘭溪)라고 하였다
이 폭포은 박연 선생을 비롯한 많은 묵객들의 혼을 빼앗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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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계폭포 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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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계폭포(玉溪瀑布)
폭포도 여자와 남자가 있다는 것 아시나요?
옥계폭포는 음폭으로 바로 여자폭포라는데 직접 보니 희안하긴 희안하다.
그런데 언제 생겨났는지
폭포가 내리꽃히는 웅덩이 안에 우뚝 솟은 양바위가 생겨났다.
어느 날 마을 사람들이 물 한가운데 우뚝 솟은 양바위가 폭포의 경관을 해친다 하여 멀리 옮겨 버렸단다.
그때부터 이 마을에는 희귀한 일들이 벌어져 젊은 사람이나 늙은 사람 가릴 것 없이 남자들은 객사를 하거나
사고로 죽기 시작했다.
그날 이후 몇몇 사람이 모여
양바위를 옮겨 벌어진 일이라 생각하고 양바위를 다시 제자리에 옮겨 놓아 음폭과 양바위의 음양은
조화를 이루게 되었다.
그러자 거짓말같이 마을은 예전처럼 평온해졌다는 전설이 있고
또한,
옥계폭포 위에는 용이 살았다는 전설이 있는 애저수가 있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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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다리와 전망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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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계폭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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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계폭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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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계폭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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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저수
영동군에는 크고작은 폭포 몇군데 있는데 그 대표적인 곳이 바로 심천면 옥계리의 옥계폭포다.
이 폭포는 옛 선인들에게도 잘 알려져 왔던 곳으로 오랜 역사를 통해 뭇 시인과 유람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아
영동의 어느 곳보다도 널리 알려진 명소이다.
이 폭포의 윗쪽에는 애저수라 불리는 바위로 된 깊은 소(沼)가 있는데
폭포수는 바로 이 소에서 고인 물이 흘러내리면서 이루어진 곳이다.
옛날에는 이 소에 용이 살았다고 전해지는데,
오목단지처럼 깊이 파인 이 소는 아무리 장마가 져도 결코 메워지지 않으며 가물 때에도 마르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 깊이 또한 측량할 수 없이 깊어 명주꾸리 하나를 다 넣어도 끝이 닿지 않을 정도였다고 한다.
따라서 사람들은 이 소 밑에는 윗쪽의 산을 넘어 이월면으로 굴이 뚫려 있을 것이라고 까지 믿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해 극심한 가뭄으로 이 소의 물이 다소 줄어들게 되자
인근 마을 청년들이 호기심에서 소 밑바닥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물을 퍼내 보았다.
그런데 차츰 바닥이 보이기 시작하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말로만 전해지던 용이 물 속에서 어렴풋이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귀는 짚신만하고 몸 길이는 폭포 밑까지 내려갈 정도로 큰 용이었다. 사람들은 혼비백산해 도망가고 말았는데,
그때 용이 사람 눈에 뛴 이후부터는 웬일인지 소가 차츰 메워져 지금은 바닥이 보일 정도로 얕아 졌다고 한다.
이런 용이 살았다는 전설 외에도 옥계폭포엔 또다른 얘기가 전해지고 있다.
옛날 폭포 위 벼랑에 계수나무 한그루가 서있었는데,
어느날 한쌍의 연인이 그곳에 그네를 매고 놀다가 그만 실족하여 폭포 밑으로 떨어져 사랑을 다 꽃피우지 못한 채
애절하게 죽고 말았다.
그뒤 이승에서 못다한 사랑을 이루려함인지 죽은 영혼은 곧 한쌍의 새가 되어 어디론지 날아갔다.
그리고 매년 봄이 되면 그때 그네를 탔던 이곳을 다시 찾아와 폭포 주위에서 놀다가 날아가버리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 새를 보며 이승에서 이루지못한 사랑이 안타까워 매년 날아온다고 생각해
이곳을 '애저수'로 불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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