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牛馬처럼 걷는 부산+경남 여행

(통영) 국보 제305호 세병관(洗兵館)과 삼군수군통제영

 

국보 제305호 세병관(洗兵館)과 삼군수군통제영

 

 

 


언제 : 2018년 4월 3일 화요일

어디 :  경상남도 통영시 문화동 62-1

 

 

조선후기 삼도수군의 본영이었던 통제영을 복원·보전하기 위하여 통제영지(統制營址)가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통영시 문화동 62번지에 있는 통제영시대의 객사(客舍) 세병관을 중심으로

주위의 통영초등학교(9필지, 1만3,199㎡), 창원지방법원 통영지원·창원지방검찰청 통영지청(5,745㎡),

충렬여상·충렬여중학교(5필지, 9,846㎡), 통영세무서(1,782㎡)와 현 세병관 경역을 포함하는 총29필지,

4만1,022㎡(1만2,409평)에 이르는 넓은 구역이다.


통영시는 관아 30여동과 12공방을 이곳에 복원하였다.
법원·검찰청사 터에는 운주당 (運籌堂)·경무당(景武堂)·내아(內衙)·병고(兵庫) 등을 복원하고

통영초 등학교 부지에는 백화당(百和堂)과 12공방(工房) 등을,

통영세무서 자리에 는 중영(中營)·중영내아(中營內衙) 등을 복원하였다.

 

그리하여 조선 후기 약 300년 동안 삼남(三南)을 호령하던 남해의 관방(關防) 통제영의 위용을 재현함으로써

역사와 전통과 문화가 명미한 자연풍광과 함께 어우러지게 통영의 면모를 가다듬고

21세기를 향한 웅비의 발판을 마련하려는 것이다.

통제영은 삼도수군통제영의 약칭으로

삼도수군통제사가 경상·전라·충청 3도의 수군을 지휘·통할하던 본영을 이른다.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연전연패하던 육군과는 달리

전라좌수사 이순신 장군의 함대는 연전연승하여 왜군의 소위 [수륙병진작전(水陸竝進作戰)]을 무산시킴으로써

존망의 위기에 처해 있던 나라를 구한다. 이에 선조는 이듬해에 당시 직제에도 없던

[삼도수군통제사]라는 직함(職銜)을 만들어

이순신 장군에게 내리고 장군으로 하여금 삼도수군을 통할하게 한다.


초대 통제사로 제수된 이순신 장군은 한산도에다 새로이 진영을 개설하고 장기전에 임했으니

이때의 한산진영이 최초의 통제영이다.

정유재란으로 한산진영이 폐허가 되자 통제영은 전세따라 이리저리 떠돌아 다녔고

전란이 끝난 후에도

거제도 오아포(烏兒浦), 고성현 춘원포(春元浦) 등지로 옮겨다니며 제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을 때,

선조 37년(1604) 9월 9일 윤허를 받은 이경준(李慶濬) 제6대 통제사가

이 고장 두룡포(頭龍浦)에 통제영을 이설하면서부터 통영의 역사가 열리게 된다.


선조 38년(1605) 7월 14일, 여황산 남쪽 기슭에 객사 세병관을 창건하고 차례로 통제영 관아(官衙)를 지으니

통영은 이렇게 조선조 유일한 [계획군사도시]로 출발하는 것이다.

 

 

통영의 아침풍경



 



 

 세병관(洗兵館)과 삼군수군통제영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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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일루(望日樓)

광해군 3년 (1611) 제10대 우치적(禹致積) 통제사가 세웠으며, 영조 45년(1769) 제 128대 통제사가

화재로 소실된 것을 다시 지었다.

일명 세병문이라고도 하며, 통행금지와 해제를 알리는 커다란 종이 있어 종루라고도 하였다.

소실되었던 것을 2000년에 다시 중건하였다.

 

 

 

 

 

 

 

 

 

 

수항루(受降樓)

수항루는 2층 누각으로 통영성 남문 밖에 위치하였는데, 임진왜란의 승전을 길이 기념하기 위하여

숙종 3년(1677) 제58대 윤천뢰(尹天賚) 통제가가 건립하였다.

수항루는 봄가을 군점(수조)때에 모의 왜병으로부터 항복 받는 행사를 거행해 왔다. 해안매립으로 인해

선착장 원래의 모습을 잃어버려 1986년 현재의 위치로 이전 중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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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청(左廳)

 군관과 사병이 대기하던 건물로 대변좌청(待變左廳)이라고도 하며, 제54대 신여철(申汝哲) 통제사가

1689년에 좌청과 우청으로 분청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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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성청(山城廳)

 통영성을 지키는 산성중군 등이 근무했던 곳으로, 숙조 44년(1718) 제83대 오중주(吳重周) 통제사 때

건립하였으나 소실되었던것을 발굴 유구와 문헌에 의해 최근에 중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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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제사비군(統制使碑群)

통제사비군은 역대 통제사들의 공덕을 기리는 비석이 시내 일원에 흩어져 있던 것을 현 위치에 모아서

동향(東向)으로 58기를 4줄로 나란히 세워 놓은 것을 말한다.

이 통제사비군은 통제사가 부임하여 임기를 마치고 퇴임한 후에 이 지방 군(軍). 관(官). 민(民)이 세운

일종의 숭덕비인데, 표제도 송덕비(頌德碑) . 추사비(追思碑)> 거사비(去思碑). 사적비(事蹟碑). 불망비(不忘碑).

타루비(墮淚碑). 유애비(遺愛碑). 선정비(善政碑) 등으로 다양하다.

 

 

 

 

 

 

 

 

 

 

 

 

 

 

 




 

 

세병관은

이경준(李慶濬) 제6대 통제사가 두릉포에서 통제영을 이곳으로 옮긴 이듬해인 조선 선조 37년(1604)에

완공한 통제영의 중심건물이다.


이 건물은 창건 후 약 290년 동안

3도(경상·전라·충청도) 수군을 총 지휘했던 곳으로 그 후 몇 차례의 보수를 거치긴 했지만

아직도 멀리 남해를 바라보며 당시의 위용을 자랑하고 있는 지방관아 건물로서는 최고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앞면 9칸·옆면 6칸 규모의 웅장한 건물로,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건물 내부 바닥에는 우물마루를 깔았는데,

중앙 뒷면에 약 45㎝ 정도 높은 단을 설치하여 궐패(闕牌)를 모시는 공간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그 위로 홍살을 세웠고,

후면 내진주열 중방 하부에는 머름을 설치하여 분합문을 달고 중방 위로는 판벽으로 마감하여 무인도(武人圖)를

그렸으며 천장은 소란반자를 설치하였다.


세병관은

17세기 초에 건립된 목조단층 건물로 경복궁경회루(국보 제224호), 여수진남관(국보 제304호)과 더불어

우리나라에서 가장 규모가 큰 건물에 속하고,

여수 진남관과 더불어 그 역사성과 학술적·예술적 가치가 충분하다.



측면에서 본 세병관


 

석인(石人)

숙종 27년(1701) 제77대 류성추(柳星樞) 통제사 때 세병관 뜰에 액막이로 만든 석인으로 추측되며,

세병관 앞 장대석 석축 해체 과정에서 석인 5기가 발굴되어 현재의 위치에 설치하였다.


 





기삽석통(旗揷石桶)

세병관 앞뜰에 영기와 장군기를 세우기 위해 깃대를 고정하는 커다란 두 개의 돌기둥으로

정조 10년(1786) 제142대 류진항(柳鎭恒) 통제사가 세웠다.

원래는 세병관 뜰앞 좌우 양편으로 2기가 있었으나, 현재 세병관 앞뜰 담장 부근에 서쪽 1기만 남아 있다.


 





세병관을 좌 우 후면에서 본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