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牛馬처럼 걷는 서울 여행

(국립중앙박물관) 동아시아의 호랑이 미술(한.중.일) -2

 

2018 평창동계올림픽 기념 특별전 - 동아시아의 호랑이 미술(한.중.일) -2 

 

 




 

 

 




호랑이무늬 흉배

조선 후기 - 무늬있는 비단에 자수 - 국립중앙박물관

흉배는 조선시대 왕족과 문무관이 상복의 가슴과 등 부분에 달아, 품게를 드러내던 표시다.

기린, 백택, 해치, 공작, 학, 호표 등을 수놓아 품계를 표시하고 의복을 장식했다.

무관의 흉배는 18세기 영조 대까지는 1,2품은 호표, 3품은 웅비였다가 19세기 고종 대에는 당상관은 쌍호랑이,

당하관은 한 마리의 호랑이를 사용했다.

이 흉배는 호랑이 한 마리가 있는 무관 당하관의 것으로, 호랑이의 무늬를 원형의 삼각 모양으로

표범에 가깝게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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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인참사검

조선(1392~1897) - 철에 금. 은 입사 - 국립고궁박물관

이 사인검은 조선시대 왕실에서 사악한 기운을 물리치고자 특별히 제조했던 칼이다.

칼은 예로부터 무기뿐만 아니라 사악한 기운을 끊고 재앙을 막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사인검이

"인(寅)"은 십이지 중에서 호랑이를 의미하고 순양(純陽)의 기운을 가지므로 음의 기운을 물리칠 수 있다고 믿었다.

특히 이러한 기운이 집중되는 인의 해(寅年), 인의 달(寅月), 인의 날(寅日),인의 시(寅時, 새벽 3시~5시),

즉 인이 네 번 겹치는 때에 제작한 사인검이 벽사(벽사)의 가장 강한 기운을 담고 있다고 믿었다.

이 검심의 한쪽에는 "사인참사검(사인참사검)"의 글자와, 다른 한쪽에는 북두칠성의 별자리를 금은으로 새겨 넣었다.

 

 

상서로운 무늬로 장식한 함

조선 - 19세기 후반 -나무,소뿔 - 국립중앙박물관



호랑이와 까치무늬항아리

조선-18세기말~19세기 초- 청화백자- 국립경주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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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무늬 가마덮개

신부가 타고 가는 가마의 지붕을 덮어 잡귀를 쫓아내고 액운을 물리치기 위해 만든 혼례용구다.

시가로 신행하는 길에는 사인교를 탔는데,

사인교의 둘레에는 흰 옷감으로 휘장을 두르고 지붕에는 호랑이 가죽을 얹어 가마덮개로 사용했다.

일제강점기 무차별적인 포획으로 인해 호랑이가 사라지면서 가죽을 구하기 힘들어지자

호랑이 가죽무늬가 있는 모직물로 대체해 사용했다. 


  

호랑이무늬 베갯모


 

 


 

 

용과 호랑이

조선 19세기 - 종이에 먹과 옅은 색 - 221.5x218.0cm(호랑이) - 222.0x217.0cm(용)

국립중앙박물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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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무 아래 호랑이

김양기(1792~1842) - 김홍도의 아들 긍원 김양기가 그린 호랑이 그림


 

호랑이와 까치

신재현(생몰년 미상) - 조선(1392~1897) 

까치호랑이 민화로 그림 오른쪽에

 "갑술원단 신재현사" 글씨에서 설날아침 신재현이 일종의 세화로 그린 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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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무 아래 호랑이

김홍도(1745~1806)


 

대나무 아래 호랑이

"김홍도가 호랑이를 그리고 임희진 노인이 대나무를 그리고 황기천이 평하다."란 말이 쓰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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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중을 노니는 호랑이들

유치봉(1826~1906) - 조선말 선비화가 유치봉 그림

 


 





 


 

 

용과 호랑이를 그린 병풍

17세기 에도시대 - 다와라야 소세쓰가 그린 병풍



용호도






호랑이무늬 전투용 곁옷



용과 호랑이무늬 방화용 겉옷





호랑이 가죽 사생도



바람을 일으키는 호랑이 포효

마루야마 오쿄 - 에도시대 중기 1786년에 그린 그림 

마루야마 오쿄는

당시에 새롭게 서양화법을 익혀 자연의 객관적 묘사를 제일로 하는 사실주의로 눈을 돌렸던 화가이다.

이 그림은 오쿄는 호랑이가 마치 눈앞에서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등의 곡선이나 배의 부드러움 등을 치밀한 필치로

묘사했다. 중국의 그림을 그대로 모방하지 않고 사생한 화풍에 장식적인 효과를 더했다.

호랑이가 포효하며 바람을 일으킨다는 중국의 전통적인 음양오행설의 관념을 그렸다.

 

 

용과 호랑이무늬 손잡이 거울

에도시대 18세기 -  청동 - 도쿄국립박물관

 


매화, 대나무, 호랑이무늬 접시

에도시대 17세기 -채색자기 -높이 3.5cm, 지름 19.5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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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제 덴노가 쓴 글씨

고요제 덴노(재위 1586~1611)- 애도시대- 17세기 - 종이에 먹 - 도쿄국립박물관

고요제 덴노가 "용"과 "호"를 크게 휘호한 작품이다.

고요제 덴노는 용과 호 글씨를 많이 남겼는데, 우열을 가리기 힘든 두 영웅을 뜻하는 이 글자를 즐겨 썼음을

추측할 수 있다. 고요제 덴노는 당시 최고 권력자였던 도요토미 히데요시(1537~1598)가 후원하여

다시 황실을 부흥시켰던 천황으로, 다향한 학문을 섭렵한 인물로 유명하다.

이 글씨에는 중국 서풍의 영향을 받은 강인한 필체로, 헤이안시대 "3대 명피"로 꼽히는

고보대사 구카이(774~835) 서체의 영향도 보인다.


 

 

 

 


 




호랑이무늬 단검

한(기원전 206~서기 220) - 청동- 중국국가박물관

검은 고대 귀족과 전사들이 항상 몸에 차고 다녔던 것으로, 베거나 찌르는 용도의 무기다.

이 단검은 서주(기원저 2045~771)시대 검의 형태를 본떠 제작한 것으로, 손잡이 끝에는 줄을 묶어 몸에 찰 수 있도록

커다란 원형 고리가 있다. 이로 미루어 제기가 아닌 실제 사용한 무기였음을 알 수 있다.

손잡이 부분에는 당시 청동검에서 흔히 발견되는 호랑이무늬를 새겼다. 둥근 눈과 구름 모양 귀를 지닌

호랑이가 입을 크게 벌리고 있으며, 꼬리를 측면으로 말고 다리를 구부린 채 자세를 낮춘 모습이다.


 

백호무늬 와당

한(기원전 206~서기 220)- 토제- 중국국가박물관


 

호랑이 모양 베개

금(1115~1234) - 자기 - 높이 12cm, 길이26cm, 너비 12.5cm - 중국국가박물관



호랑이와 말 모양 허리띠고리

명(1368~1644) - 옥 - 중국국가박물관


  

십이지 중 호랑이

수(581~618) -토제 - 중국국가박물관

십이지 중 호랑이를 사람으로 형상화한 수나라 때 토제 인형이다.

농관을 쓰고 여임 깃과 넓은 소매의 도포를 입고 앉이 있으며, 두 손은 가슴 앞에 가지런히 모아 호랑이 한마리를

받들고 있는 모습이다.



옹동화가 쓴 글씨 "호"

옹동화(1830~1904)-청- 1902년- 종이에 먹 - 중국국가박물관

홍동화는 장수성 창수 출신으로, 청말 동치제(재위 1862~1874)와 광서제(재위 1875~1908)의 스승이었다.

1866년에 장원급제해서 요직을 지낸 관리로 시문과 그림에 능하고 특히 서예가로 명성이 자자했다.

그는 1830년 4월 27일, 즉 경인년 인일, 인시,에 출생하여 평생 호랑이에 대한 애정이 남달라서 "호"자를

많이 썼다고 전한다. 옹동화가 말년에 쓴 이 작품은 대청 중앙에 걸어놓는 큰 규격의 축 형식의 서예 작품이다.

초서채로 단숨에 흘려 쓴 "호"자는 질박하고 힘 있는 필치가 돋보이며 호랑이의 형상과도 묘하게 닮아 있어

거침없는 기상을 보여준다.

 

 

호랑이

지두화(1687~1771) - 청, 1717년 - 지두화, 비단에 색- 중국국가박물관

청대 이세탁이 손가락으로 그린 호랑이 그림이다.

이세탁은 청대 18세기에 부도어사직을 지낸 사람으로, 산수, 인물, 화조에 모두 능했고

청대 정통파의 화풍을 계승했다.

이세탁은 손가락 그림, 일명 지두화에 능했던 숙부 고기패(1662~1734)의 화법에서 영향을 받았다.

백색 눈썹 호랑이가 두 눈을 부릅뜬 채 꼬리를 치켜 올리고 잠시 멈춰 선 모습이며, 산에서 내려오는 움직임을

자연스럽게 묘사했다. 호랑이 형상은 초묵을 사용해 손가락으로 그렸다. 손가락을 지면과 세심하게 마찰시켜

가볍고 ㅁ거움, 깊고 얕음의 정도를 능숙하게 표현했다.



 

 

 







호랑이 장식 꺾창

상(기원전 1600~1046) - 청동 - 중국국가박물관

상나라 때의 무기인 청동 꺾창이다.

횡으로 찍어 갈고리로 당겨 적을 제압하던 상주시대에 흔히 사용했던 무기이다.

꺾창은 본래 긴 자루인 비(秘)에  가로로 끼워 사용하지만, 나무로 만들어진 비는 부식되어 없어지고

주로 청동으로 주조된 과(戈)부분이 남아있다.

이 청동 꺾창의 과 뒷부분은 아래로 굽어 호랑이 머리 모양을 하고 있다.

호랑이 얼굴 부분은 전체적으로 구름무늬가 새겨져 있으며, 크게 벌린 입 사이로 톱니모양의 날카로운 이가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호랑이 머리 부분에 보이는 홈에는 원래 녹송석을 박아 장식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지금은 없어졌다.

이처럼 무기를 호랑이로 장식한 것은 아마도 호랑이의 용맹한 기운을 빌어 스스로를 보호하고가 염원했기

때문일 것이다. 꺾창에 새겨진 호랑이 머리 장식은 바로 상나라 사람들이 호랑이를

토템으로 삼았던 증거라고 볼 수 있다.

 

 

용맹한 호랑이

조선 18세기 - 종이에 먹 - 국립중앙박물관

산에서 위협적인 동세로 걸어나오는 호랑이를 그린 그림이다.

그리 크지 않은 화면에 배경도 없이 호랑이를 꽉 차게 배치해 박진감이 넘친다. 호랑이 동세에 따라 움직이는 털을

한올 한올 가는 붓으로 치밀하게 묘사했다. 위로 솟구친 듯한 빳빳한 수염과 패기 넘치는 눈, 부드러운 동작은

백수의 왕이자 신령스러운 동물인 호랑이의 위엄을 잘 보여준다. 이러한 그림의 양식은 김홍도로 대표되는

조선 후기 화원 양식의 호랑이 그림의 계통으로 볼 수 있다.

"주역"에서는 호랑이가 가을에 털갈이 후 빛나고 융성한 모습으로 일변하는 것에 대인군자가 면목일신하여

훌륭한 면모를 이룬 것을 비유했다. 그래서 은신처에서 나오는 호랑이는 사대부에게

"훌륭한 면모를 이룬 군자" 또는 "숨은 선비가 세상에 나오는 출세"를 의미하기도 했다.

이와같은 산에서 걸어 나오는 호랑이 그림은 출산호도의 형식으로, 중국 북송 때 호랑이 그림으로 유명한

조막창에 의해 그려지기 시작했다.

조선에서는 중기 이후로 김홍도와 같은 화원화가들에 의해 주로 제작되었다.

화면 오른쪽 위에는 심사정(1707~1769)의 호인 "현재(玄齋)" 낙관이 있지만, 화제에 쓰여진 갑오(甲午)의 연도가

1714년 혹은 1774년으로 심사정 연도와 맞지 않아 화제와 낙관은 후대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뮤마거사와 용, 호랑이

가쓰다 지쿠오, 가노 마사노부, 가노 기요노부 - 에도시대 -비단에 먹과 색 - 도쿄국립박물관

에도시대 초기에 활약했던 

어용화가인 기노 나가노부(1577~1654)의 세 아들  각각 그린 유마거사와 용, 호랑이 그림이다.

유마는 "유마경"에 등장하는 고대 인도의 재가신자로 불교 교화에 힘쓴 인물이다.

일본에서 용호도는 중국 남송(1127~1279)의 선승화가인 목계의 용호도가 알본의 선종사원에 유입된 이후

무로마치시대부터 크게 유행했다. 특히 불교 또는 도교의 존상과 용, 호랑이를 결합시킨 3폭의 용호도는

일본 호랑이 미술만의 특징으로, 용과 호랑이가 선종의 가르침을 수호한다는 일본 특유의 사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부와 무용을 상징하기도 했던 호랑이는 무로마치시대 말기부터 에도시대까지 꾸준히 용호도로 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