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牛馬처럼 걷는 경기 여행

(광주) 유네스코 세계유산 - 사적 제57호 남한산성(南漢山城)

 

유네스코 세계유산 - 사적 제57호 남한산성(南漢山城)

 

 

 

 

언제 : 2018년 2월 26일 월요일

어디 :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남한산성로 784-16 

 

 

요즘

주목을 받는 원주 소금산 출렁다리를 가려고 일찍부터 서둘러 청량리역에 도착하니

 09:40분

10분만 일찍 도착했더라면 원주 소금산 출렁다리를 갈 수 있는 무궁화호 열차를 탈 수 있었는데,

중간 구로역과 용산역에 진입하면서 전철이 서는 바람에 놓쳤다.

 

어디를 갈까 망설이다 몇 번 다녀온 곳이지만,

2017년 영화 "남한산성"이 최고의 인기를 얻었기에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인 남한산성을

 다시 둘러보기로 하였다.

 

남한산성(南漢山城)은 경기도 광주시, 성남시, 하남시에 걸쳐 있는 남한산을 중심으로 하는 산성이다.

병자호란 때 조선의 16대 왕 인조가 청나라에 대항한 곳으로 

병자호란 당시 인조는 이곳에서 40여 일간 항전하였으나 결국 성문을 열고 항복한 곳으로 유명하다.

 

1963년 1월 21일 남한산성의 성벽이 국가 사적 제57호로 지정되었고,

2014년에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전철 산성역에 내려 버스 환승하여 남한산성 남문에 내려 성벽을 따라 걸으려는데,

성벽 가까이는 눈과 얼음이 녹지 않아 아이젠이 없으면 도저히 다닐 수 없어 수어장대로 가는 너른 길을 걸으며

병자호란 때

인조가 남한산성 서문을 나가 무릎을 꿇고 청 태종에게 항복했던 삼전도 지역에 세워진 

롯데월드타워가 미세먼지로 희미하게 보인다.

 

 

성남에 있는 서울 비행장에서 이륙한 비행기가 말썽 많았던 롯데월드타워를 향하고 있다.  

 

 

 

 

남한산성은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쌓은 산성으로, 산 위에서 적의 동태를 살피기 쉽고,

한양과 한강을 내려다볼 수 있으며, 남. 서. 북쪽이 험한 지형이라 적의 침입을 방어하기에 좋은 곳이다.

 


 

 

 

 남한산성 [南漢山城]
서울에서 동남쪽으로 약 24km 떨어진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에 위치한다.
해발 500m가 넘는 곳에 자리 잡은 산성으로 성곽의 전체 길이는 12.4km이다.
1621년 후금의 침입을 막고자 석성으로 개축하기 시작하였으나 준공치 못하고,
후금의 위협이 고조된 1624년부터 축성되어 1626년에 완공되었다.
병자호란 이후 방어력을 높이기 위한 여러 차례의 증축을 거쳐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1971년 3월 17일 경기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2014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병자호란(丙子胡亂)

1636년(병자년) 12월 청 태종이 2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략한 사건이다.

정묘호란의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는 명분으로 침략하였으나 실제로는 명을 공격하기 전 조선을 군사적으로

복종시키는 것이 목적이었다.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하여

적의 포위 속에서 혹한과 싸우며 버텼으나 식량마저 끊어져 청에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1637년 1월 30일 인조가 삼전도에서 청에 항복하는 의식을 치르며 전쟁이 끝났다.

 

비교적 짧은 전쟁 기간에도 불구하고
항복 후 수많은 전쟁 포로가 발생하면서 조선은 막대한 피해를 받았다.

 

 

 

 

정묘호란(丁卯胡亂)

인조반정 후 집권한 서인정권은 친명배금정책을 내세웠다.

이에 후금에서 누르하치의 뒤를 이은 태종은 1627년 1월 3만 명의 병력으로 조선을 침공하게 했다.
후금군은 파죽지세로 남하하여

1월 25일 황주에 이르자 인조를 비롯한 신하들은 강화로, 소현세자는 전주로 피난했다.

한편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 후금군의 배후를 공격했는데, 정봉수·이립 등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후금군은 계속 남하하다가 후방을 공격당할 위험이 있다는 점과,
명을 정벌할 군사를 조선에 오랫동안 묶어둘 수 없다는 점 때문에 강화의사를 표시했고

조선이 이를 받아들여 3월 3일 화의가 성립되었다.

이 화약은 비록 형제의 국을 규정하기는 했지만 후금군을 철수시키기로 한 것과

명과의 외교관계를 그대로 유지한다는 점에서

후금군이 장기적으로 주둔할 수 없다는 약점을 잘 활용한 협상이었다.

이후 1636년 후금은 국호를 '청'이라 고치고 ‘군신의 의’를 요구하자 조선은 이를 거부하고

같은 해 12월 병자호란이 발생했다.

 

 

 

 

 

 

수어장대

 

 

 

 

수어장대 소나무

 

 

 

 

 

 

수어장대에서 본 북문

 

 

 

 

 

 

 

 

 

 

롯데월드타워(Lotte World Tower)

 

 

 

 

 

 

 

 

 

 

일제침략기와 한국전쟁 등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유난히 소나무가 많이 남아있는 곳이 남한산성이다.

그 이유는

성내 주민들이 그러한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소나무 감시원을 두었기 때문이란다.

 

 

 

 

 

 

인조가 삼전도에서 청태종에게 항복하기 남한산성을 나갔던 서문

 

 

 

항복과 강화
모든 정세가 불리해지자 인조는 항복할 결심을 하고

1월 30일 성을 나와 삼전도(三田渡)에서 청태종에게 항복하는 의식을 행했다.

이때 항복의 조건은 다음과 같다.

청나라와 조선은 군신의 의를 맺고,

명의 연호를 버리며 명나라와의 국교를 끊고 명나라에서 받은 고명책인(誥命冊印)을 청나라에 바칠 것,

인조의 장자와 다른 아들 및 대신들의 자제를 인질로 할 것,

청나라의 정삭(正朔)을 받고,

만수·천추·동지·원단과 그밖의 경조사에 조헌의 예를 행하며 사신을 보내어 봉포하되

이들 의절은 명나라에 하던 것과 같이 할 것,

청나라가 명나라를 정벌할 때 원군을 보낼 것이며

청군이 돌아가면서 가도를 정벌할 때 조선은 원병과 병선을 보낼 것,

조선인 포로가 만주에서 도망하면 다시 잡아가며 대신 속환(贖還)할 수 있다는 것,

통혼(通婚)으로 화호(和好)를 굳힐 것,

조선은 성을 보수하거나 쌓지 말 것,

조선 안에 있는 올량합인(兀良哈人)을 쇄환할 것,

조선의 일본과의 무역을 종전대로 하고 일본의 사신을 인도하여 청나라에 내조하게 할 것,

매년 1번씩 청나라에서 정하는 일정한 양의 세폐를 바칠 것 등이다.


이는 정묘호란 때의 조건에 비하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굴욕적이고 가혹한 것이었다.

 

 

서문 = 우익문

 

 

 

 

 

 

날이 따뜻하니 다람쥐 한마리가 북문= 전승문 성벽에 나왔다.

 

북문 = 전승문

 


전후의 대청관계


병자호란 후 조선은 청에 대해서 사대(事大)의 예를 지킴에 따라 조공(朝貢) 관계가 유지되었다.
중국에 가는 사신의 주요임무는

세폐와 방물(方物:황제나 황후에게 따로 보내는 조선의 공물)을 바치는 일이었는데,

이로 인해 조선은 막대한 경제적 손실을 보았다.

사행(使行)의 내왕시 일정한 한도 내에서의 교역이 공인되어 개시와 후시(後市)가 행해졌는데,
이 또한 조선 정부에 경제적 손실을 끼쳤다.

이외에 전쟁 때 청으로 잡혀간 백성들을 데려오는 데 드는 속환가가 비싸서 속환문제 심각했다

 

속환문제 병자호란청나라에 잡혀간 조선인 포로들을 전란이 끝난 뒤 몸값을 주고 데려오는 문제.

 

 이와 같이 조선은 표면적으로 사대의 예를 갖추고 있었으나,

실제로는 숭명배청의 사상이 전쟁 전보다도 굳어져갔다.
그리하여 강화조건에 포함되어 있는 청나라의 출병요구에 대해서는 1639년에 거절한 바 있으며,

이듬해 청나라가 명나라를 공격할 때 임경업에게 전선 120척과 병사 6,000명을 주어 출전하게 하고

군량미 1만 포를 조운하게 했는데, 임경업이 중도에서 일부러 30여 척을 파괴하고 
풍운을 만나 표류한 틈을 타서 명나라에게 청나라의 사정을 알렸다.

 

1643년에는 조선이 명나라와 통교한 사실이 드러나 최명길과 임경업이 선양에 붙잡혀갔다.

이듬해 청은 베이징[北京]으로 천도하고

1645년에 선양에 잡혀갔던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최명길, 척화론자인 김상헌을 돌려보냈다.

그러자 인조는 인평대군을 보내어 사의를 표함으로써

병자호란의 전후처리는 일단락되었고, 종전 직후 무리하게 책정되었던 조공품목들은 조정되었으나

조선에게 불리한 조공관계와 무역은 계속 진행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은 1649년에 즉위한 효종의 주도 아래 강한 배청사상을 근간으로 하는
 북벌론(北伐論)이 대두되었다.


 

 

 

 

 

광주읍내 및 행궁부

1909년 국립중앙박물관 유리원판사진

남한산성행궁. 연무관. 이에 딸린 연병장 등 당시 산성 내의 모습이 잘 남아있다.

 

 

 

 

광주행궁

 

 

영화 "남한산성"

 

명의 쇠퇴와 청으로 이름을 바꾼 후금의 번성, 이어지는 청의 새로운 군신관계 요구와 이에 척화로 맞선 조선.

그로 인해 병자년 12월,

청이 조선을 침략하며 병자호란이 발발한다.

적이 기병을 앞세워 한양 인근까지 빠르게 진격해 오자 조선의 왕과 조정은 남한산성으로 몸을 피하지만,

청의 대군에 둘러싸인 채 성 안에 고립된다. 추위와 굶주림, 적의 거센 압박과 무리한 요구,

그 안에서 선택의 기로에 놓인 채 치열하게 조선의 앞날을 논했던

남한산성에서의 47일(1636년 12월 14일-1637년 1월 30일)이 스크린에 처음으로 그려진다.

<남한산성>은 1636년 인조 14년 병자호란,

나아갈 곳도 물러설 곳도 없는 고립무원의 남한산성 속 조선의 운명이 걸린 가장 치열한

47일간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청의 굴욕적인 제안에

화친(나라와 나라 사이에 다툼 없이 가까이 지냄)과 척화(화친하자는 논의를 배척함)로 나뉘어

첨예하게 맞서는 조정, 참담하게 생존을 모색했던 낱낱의 기록을 담은 김훈 작가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남한산성>은 나라와 백성을 위하는 충심은 같았으나

이를 지키고자 했던 신념이 달랐던 두 신하를 중심으로 한 팽팽한 구도 속 영화적 상상력을 더해

한층 드라마틱하게 완성되었다.

순간의 치욕을 견디고 청과의 화친을 통해 후일을 도모하려 하는 주화파 이조판서 ‘최명길’과

청에 끝까지 맞서 싸워 대의를 지키고자 하는 척화파 예조판서 ‘김상헌’.

두 신하의 날카로운 논쟁과 갈등은 옳고 그름을 넘어서 ‘무엇이 지금 백성을 위한 선택인가’에 대한

고민과 화두를 던지며 380여 년이 흐른 현시대에도 공감할 수 있는 깊은 울림과 메시지를 전한다.

 

여기에 강대국의 압박에 무력한 조정과 고통받는 민초들의 모습을 보듬으며

당시의 절박하고 고단했던 나날 또한 묵묵하게 눌러 담아낸 <남한산성>은 나라의 운명이 갇힌 그곳에서

가장 치열하게 명분과 실리, 신념과 원칙을 논하고 백성과 나라의 앞날과 생존을 진심을 다해 갈구했던

우리의 이야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