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牛馬처럼 걷는 충북 여행

노수신적소 수월정- 충청북도 시도기념물 제74호


노수신적소 수월정

충청북도 시도기념물 제74호



어디 : 충북 괴산군 칠성면 사은리 245

 


산막이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아담한 기와집 한채가 괴산댐 푸른물을 바라보고 있다.

이곳은

1515(중종 10)∼1590(선조 23). 자는 과회(寡悔), 호는 소재(蘇齋).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이며

선조에선 영의정에 오른 노수신이 귀양살이하던 곳이다. 


노수신은

인종 즉위 초에 정언이 되어 대윤(大尹)의 편에 서서 이기(李芑)를 탄핵하여 파직시켰으나,

1545년명종이 즉위하고, 소윤(小尹)윤원형(尹元衡)이 을사사화를 일으키자 이조좌랑의 직위에서 파직되어

1547년(명종 2) 순천으로 유배되었다.


그 후 “여왕이 집정하고 간신 이기 등이 권세에 능하여 나라가 망하려 하니 이를 보고만 있을 것인가”라는 뜻의

주서로 된 벽서가 발견된 이른바 양재역 벽서사건(良才驛 壁書事件)에 연루되어

죄가 가중됨으로써 진도로 이배되었고, 진도에서 19년간 귀양살이를 하였다.


1565년(명종 20)에 충청북도 괴산군 칠성면 사은리로 다시 옮겨졌다가,

1567년 선조 즉위 후에야 귀양에서 풀려났다.

 

 

 







 

 







 

 △

1994년에 세운 노수신 유적비

이곳은 연하구곡으로 알려진 경치 좋은 곳이다. 강의 한 가운데 섬이 있고, 그곳에 초옥이 하나 있었다.

초옥의 이름은 수월정이며 괴산댐 건설로 수몰되어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노수신 선생의 애환이 깃든 이 수월정은 후손들이 어렵게 보존하였다.

다행히

1987년 충북 기념물 제74호가 되어 문화재로 보호받고 있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1칸반 홑처마 팔작지붕 목조기와집으로

중앙에 우물마루를 깐 대청 1칸이 있고, 좌우에 온돌방 각 1칸이 있으며, 앞면에 툇마루를 둔 간소한 형태로서

“수월정(水月亭)”이라 쓴 편액이 걸려 있다.





 



 




 


1567년선조가 즉위하자

풀려나와 교리(校理)에 기용되고, 이어서 대사간·부제학·대사헌·이조판서·대제학 등을 지냈고,

1573년(선조 6) 우의정, 1578년 좌의정을 거쳐 1585년에는 영의정에 이르렀다.


1588년 영의정을 사임하고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가 되었으나, 이듬해 10월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으로 기축옥사가 일어나자

과거에 정여립을 천거했다는 이유로 대간(臺諫)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시호는 문의(文懿)이며, 뒤에 문간(文簡)으로 고쳤다.


노수신은 진도에 있는 19년 동안 진도의 풍속에 예속을 심어 ‘진도개화지조(珍島開化之祖)’로 불린다.

진도에 들어온 지 5년 만에 지산면 안치에 초옥삼간을 지어 ‘소재(蘇齋)’라 이름 짓고 정좌하여 경사를 연구하였다.

또한「옥주이천언(沃州二千言)」을 비롯한 1,023수에 이르는 시를 지었다.

본래의 적소는 그가 이름지은 연하동(煙霞洞)에 있었으나

 칠성수력발전소 댐의 건설로 물에 잠기게 되자 1957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 세웠다.


 



노수신적소 수월정 근처에는 몇 백년이 지난 송림이 우거지고 괴산댐 푸른물과 어우러진 멋진 산책길이 있어

 연인끼리 걷기에 참 좋은 곳이다.















한쌍 오리가 유유히 다니며 데이트를 한다.



 

 




저 멀리 연하협구름다리가 보인다.

시간이 있다면 그곳까지 걷고 싶었으나 되돌아 갈 길이 멀어 다음 기회에 연하협구름다리를 건너

산막이옛길을 걷고 싶다.








괴산군은 산이 많으니 계곡도 많다.

쌍곡과 선유동계곡, 화양동계곡, 갈은계곡 등 대한민국에서 내로라하는 계곡들이 밀집해 있는 곳이 바로 괴산이다.

산이 장막처럼 둘러싸고 있어 막혀 있다는 뜻을 지닌 '산막이' 역시 산이 만들어낸 지명이다.

산으로 막힌 마을로 불리는 산막이마을은

 달천을 가로질러 건너야 들어갈 수 있을 만큼 오지 중 오지였다.

산에서 채취한 버섯, 나물, 약초 등을 강 건너 읍내 장에 내다파는 것이 유일한 외출이었다.

하지만 댐이 건설되면서 물길마저 사라졌고, 마을은 더욱더 오지가 되었다.

그래서 태어난 길이 지금의 산막이옛길이다.

발아래 목숨을 노리는 호수와 벼랑이 버티고 서 있는 굽이굽이 위태로운 길이 그렇게 만들어졌다.

세상과 단절되지 않기 위해, 그리고 살아가기 위해 만든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