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눈
박용래(1925~80)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말집 호롱불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조랑말 발굽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여물 써는 소리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변두리 빈터만 다니며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조랑말 발굽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여물 써는 소리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변두리 빈터만 다니며 붐비다
간명하게 제시된 단 네 문장. 그것도 얼핏 보면 거의 같은 말을 싱겁게 반복한다.
그러나 문장을 일으켜 세워 잘 옷 입어 보면, 같음과 다름을 섬세하게 배합하고 변주하는 고품격의 감각에 찬탄케 된다.
말집 호롱불을 시작으로 조랑말 발굽을 지나 여물 써는 소리를 거쳐 주변 빈터로까지 열리는 동선의 과불급 없음과,
그 정밀한 변화를 하나로 아우르는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에 붐비다’ 기저부의 반복.
이 둘의 대비와 노출이 이룩하는 적절성은 더 뭐라 말할 수가 없다.
올겨울은 눈과 추위가 드물다. 기후변화의 걱정스러운 징후라고도 들린다.
늦은 저녁때 붐비는 눈이 그립고, 우리와 같이 살던 순한 말과 그 ‘푸른 말똥’이 그립다. 조랑말은 서민들의 벗이었다.
요즘의 말은 사정이 좀 다른 듯하다.
<김사인·시인·동덕여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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