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牛馬처럼 걷는 강원 여행

(강원 강릉) 보물 제165호 오죽헌(烏竹軒)

 

오죽헌(烏竹軒) - 보물 제165호

 

 

 

이번 속초 강릉 3박 4일 여행의 마지막은 강릉 오죽헌이다.

내가 신사임당과 율곡 이이를 좋아하기 때문에 자주는 아니지만, 몇 년만에 다시 찾아온 것이다.

 

율곡 이이는 1536년 강릉부 죽헌동에 있는 외가인 오죽헌에서,

덕수 이씨 통덕랑 사헌부감찰 이원수와 평산 신씨 신사임당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오죽헌 별채에서 태어났는데,

신사임당이 태기를 느끼게 된 계기가 흑룡이 바다에서 하늘로 오르는 꿈이었기 때문에, 그가 태어난 방은 몽룡실(夢龍室)이라

일렀고, 아이 때의 이름은‘현룡(見龍)’이라 지었다가 뒤에 이(珥)로 바꾸었다.

이후 경기도 파주에 자리한 본가로 와서 생활하였다.

 

사적 제525호 이이의 유적지가 경기도 파주에 있으며, 2013년 9월 26일 본 블로그에 올려져 있으니 참고 바란다.

 

 

오죽헌 전경

 

 

 

 

 

 

 

 

 

 

 

 

 

 

 

 

1. 자경문  2. 유적정화기념비  3. 문성사  4. 오죽헌(몽룡실)  5. 바깥채  6. 안채  7. 어제각 

8. 율곡기념관  9. 입지문

 

 

 

자경문

 

 

 

 

 

 

 

오천원권 촬영지점

 

 

 

 

 

 

 

문성사(文成祠)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다. 이 자리에는 원래 어제각(御製閣)이 있었는데 1975년 오죽헌 정화사업 때

서쪽으로 옮기고 문성사를 지었다. '문성(文成)'은 1624년 인조임금이 율곡에게 내린 시호로, "도덕과 학문을 널리 들어

막힘이 없이 통했으며 백성의 안정된 삶을 위하여 정사의 근본을 세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문성사의 현판은 박정희 대통령이 썼다.

 

 

 

 

 

 

율곡송(栗谷松)

소나무는 선비의 지조를 상징하는 군자식물이다.

곧은 덕과 굳센 절개에 대하여 옛사람들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 소나무의 기이한 형상을 보니 천공의 오묘한 조화를

빼앗았다. 한참을 바라 보노라면 청아한 운치를 느낄 것이다.

 

소나무가 사람을 즐겁게 하는데 어찌 사람이즐겨할 줄 몰라서야 되겠는가

 

- 율곡 이이의 소나무 예찬에서 -

 

 

 

사임당 배롱나무

강릉시의 시화로 꽃 피는 기간이 100일이나 된다고 하여 백일홍이라고도 한다.

 

이 배롱나무는 고사한 원줄기에서 돋아난 새싹이 자란 것이므로 나이를 합치면 600여년이 넘는다.

사임당과 율곡 모자(母子)가 어루만졌을 이 배롱 나무는 율곡송(栗谷松), 율곡매(栗谷梅)와 함께 오늘날 오죽헌을 지켜주는

수호목으로서의 역할을 해오고 있다.

 

 

 

 

오죽헌(烏竹軒)

조선초기에 지어진 별당건물로, 당시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는 대표적인 주택이다.

이 건물은 주심포양식에서 익공양식으로 변해가는 건축과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건물로 평가받아

1963년 보물 제165호로 지정되었다.

 

왼쪽 마루방은 율곡이 여섯 살 때까지 공부하던 곳이며, 오른쪽 방은 1536년 신사임당이 용이 문머리에 서려 있는 꿈을 꾹고

율곡을 낳은 곳이다.

몽룡실(夢龍室)이라 부르고 있는 이 방에는 신사임당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몽룡실(夢龍室)

 

 

 

 

 

 

 

마루방

율곡이 여섯 살 때까지 공부했던 마루

 

 

 

 

 

 

측면과 후면에서 본 오죽헌

 

 

 

 

 

오죽헌 율곡매 - 천연기념물 제484호

이 나무는 1400년경 이조참판을 지낸 최치운이 오죽헌을 건립하고 별당 후원에 심었다고 하며, 신사임당과 율곡이 직접

가꾸었다고 전한다.

 

사임당은 모매도, 묵매도 등 여러 매화그림을 그렸고 맏딸의 이름을 매창이라고 지을 만큼 매화를 사랑하였다.

사임당 당시 율곡매는 상당히 굵었을 것으로 보이며, 본 줄기는 고사하고 곁가지가 자란 아들나무로 짐작된다.

율곡매는 꽃 색깔이 연분홍인 홍매종류이며, 열매는 다른 나무에 비하여 훨씬 알이 굻은 것이 특징이다.

 

 

 

오죽

 

 

 

 

 

 

안채와 바깥채

조선초기에 지어진 오죽헌 내의 건물들은 1505년 병조참판을 지낸 최응현에 의해 전승되어 오다가, 오죽헌 정화사업으로

오죽헌(별당)과 바깥채를 제외하고 모두 철거되었다. 현재의 모습은 1996년 정부의 문화재 복원 계획에 따라

 

옛 모습대로 복원한 것이다. 안채는 안주인이 생활하던 곳이고 바깥채는 바깥주인이 거처하던 곳이다.

바깥채의 툇마루 기둥에 걸려 있는 주련은 추사 김정희의 글씨를 새겨 놓은 것이다.

 

 

 

안채

 

 

 

사랑채

기둥의 주련(柱聯)은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선생 필적이다.

 

 

 

 

 

 

 

어제각(御製閣)

율곡 이이의 저서 《격몽요결(擊蒙要訣)》과 어린시절 사용하였던 벼루를 보관하기 위하여 지은 것이다.

1788년 정조임금은 율곡이 어렸을 때 쓰던 벼루와 친필로 쓴 《격몽요결》이 오죽헌에 보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듣고,

그것을 궁궐로 가지고 오게 하여 친히 본 다음, 벼루 뒷면에는 율곡의 위대함을 찬양한 글을 새기고,

 

책에는 머릿글을 지어 잘 보관하라며 돌려 보냈다. 당시 임금의 명을 받은 강원도관찰사 김재찬이 이를 보관할 수 있는

집을 지었는데, 그것이 어제각이다.

 

 

 

1788년 정조 임금은 율곡 선생이 쓴 《격몽요결》과 어렸을 때 사용하던 벼루를 직접 보고 격몽요결 서문과 벼루 뒷면에

글씨를 써서 돌려보내며 별도의 집을 지어 보관 하도록 하였다.

어명(御命)으로 지었다고 해서 어제각(御製閣)이라고 부르며 벼루 뒷면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어제(御製) 어필(御筆)

무원 주자의 못에 적셔 내어

공자의 도를 본받아

 

널리 베품이여

율곡은 동천으로 돌아갔건만

구름은 먹에 뿌려

학문은 여기 남아 있구려

오천원권 지폐에 오죽헌과 벼루가 도안되어 있다.

 

 

 

격몽요결

 

 

 

율곡기념관

 

 

 

 

 

 

 

율곡친필 암석각자

 

 

 

 

율곡전서

 

 

 

율곡선생집

 

 

 

벼루

조선 -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0호

이이가 어렸을 때 사용하던 벼루다. 1788년 정조대왕이 친히 보고 이이를 찬양한 글을 지어 벼루 뒷면에 새기게 하였다.

 

 

 

이이 수고본 격몽요결

조선(1577년) - 보물 제602

이이가 초학자들에게 학문의 방향을 제시해 주기 위하여 저술한 유학 입문서다.

 입지(立志), 혁구습(革舊習), 지신(持身), 독서(讀書), 사친(事親), 상제(喪制), 제례(祭禮), 거가(拒家), 접인(接人), 처세(處世) 등

10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이가 직접 쓴 것으로 그의 친필을 감정하는 데 표본이 된다.

 

 

 

토지양여서

조선(1579년) -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0호

이이가 외조모로부터 특별히 물려받은 토지를 이종사촌인 권처균에게 야여한 문서다. 전답 시세에 해당하는 직물과 나락의

수량이 표시되어 있어 당시의 전답 시세를 유추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양여문서의 양식을  살펴볼 수 있다.

이이의 친필

 

 

 

 

 

 

 

 

이렇게 3박 4일 속초와 강릉 여행을 마친다.

생각 같아선 동해안을 따라 내려가고 싶지만, 다음에 할 일을 남겨 두는 것도 좋을 일이다.

 

젊었을 적,

후포에서 시작하여 걷고 버스타며 통일전망대까지 여행했는데, 이젠 그런 용기도 없다.

8월즈음

다시 강릉에서 동해안을 따라 여행을 할 것이다.

 

 덥고 짜증나기도 했지만, 두 다리가 이번 여행을 무사히 마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