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牛馬처럼 걷는 강원 여행

(강원 강릉) 경포대에서 오죽헌 가는 길의 풍경

 

경포대에서 오죽헌 가는 길의 풍경

 

 

 

 

항상 그러지는 않겠지만,

이번 3박 4일 속초와 강릉 여행에서 아침에 해무가 끼지 않은 날이 없어 일출도 보지 못했고,

정오즈음까지는 먼 곳의 풍경도 볼 수 없었다.

 

해무로 인해 맑은 경포호를 보지 못하고 경포대를 떠나 이번 여행의 마지막 여행지인 오죽헌을 뚜벅뚜벅 걷는다.

마침

초당두부 마을을 지날 때 마침 점심때가 조금 이르지만, 초당 순두부에 사임당 막걸리를 곁들였더니

한낮 햇볕과 막걸리의 얼퀴함이 자주 그늘에 쉬게 한다.

 

 

 

강릉 3.1 독립만세운동기념탑

 

 

 

소녀의 상

 

 

 

강원도는 높은 산이 많아 농토가 없을 줄 알지만,

 강릉 지방은 낮은 산 아래 마을을 이루고, 너른 들에 나락이 풍요로와 보기 좋다.

 올가을 농로는 무척 바쁠 것이다.

 

 

 

 

 

 

초당순두부와 사임당 막걸리

 

 

 

점심에 막걸리를 곁들였기에 얼퀴한 기분으로 밖에 나오니 어여쁜 접시꽃이 

길손을 맞이한다.

 

 

 

우측에는 솟을 대문이 있고, 좌측에는 대문이 아예 없다.

 

 

 

 

 

 

 

현판은 우암 송시열의 글씨

 

 

 

 

 

 

 

 

 

 

 

오죽헌 가는 도로변에

매월당 김시습(梅月堂 金時習) 기념관이 있어 들어가니 점심시간(12:00~13:00)이라 문이 닫혀  

 일정상 기다리지 못하고 돌아 나와 아쉬웠다.

 

 

 

매월당 김시습(梅月堂 金時習)

김시습(金時習, 1435년 ~ 1493년)은 조선 초기의 학자이며, 문인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를 썼다고 전해지며

또한 생육신의 한 사람이다.

 

수양대군의 단종에 대한 왕위 찬탈에 불만을 품고 은둔생활을 하다 승려가 되었으며,

벼슬길에 오르지 않았다.

일설에는 그가

사육신의 시신을 몰래 수습하여 경기도 노량진(현재의 서울 노량진 사육신 공원)에 암장했다고도 한다.

 

 

《금오신화》

금오신화(金鰲新話)

이 목판본 금호신화는 1653년(효종 4) 일본에서 초간되었던 것을 1884년(고종 21) 일본 도쿄에서 재간한 것이며

상. 하 2책으로 되어 있다.

 

《금오신화》는 남녀의 사랑에 대한 유교의 철저한 속박을 빗대어 소설에서 자유연애를 구가한 것으로,

사랑을 주제로 한 최초의 소설이기도 하다.

이들 작품이 중국의 《전등신화》를 모방했다고 하나, 소설 속에 그의 자유분방한 인생관과 불교 · 도교 등 폭넓은 사상이

 짙게 깔려 있음은 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금오신화(金鰲新話)


첫째는 〈만복사저포기(萬福寺樗蒲記)〉이다.

남원 땅 늙은 총각 양생(梁生)은 부처님과 처녀를 얻는 내기놀이를 해서 이겼다.

한편 한 처녀가 부처님께 배필을 점지해달라고 기도했고, 이때 양생이 구애해 허락을 받았다.

두 남녀는 며칠 함께 지내며 사랑을 나누었지만 그 여자는 원통하게 죽은 영혼이었다.

얼마 후 그녀는 인연이 다하였다며 다시 사라졌다. 그러자 양생은 여자의 부모를 만나 재물을 얻고 또 죽은 혼을 위로해주었다.

둘째는 〈이생규장전(李生窺墻傳)〉이다.

개성 땅에 사는 이생은 글도 잘하고 외모도 잘생긴 총각이었고,

또 선죽교 옆에 사는 양반 최씨 집 딸은 아름다움과 손맵시로 소문이 났다. 어느 날 이생이 연모의 시를 써서 던지자,

최씨 처녀는 황혼녘에 만나자고 언약을 했고 그리하여 그날 밤 그들은 가연을 맺었다. 이 일이 발각되어 이생은 울주 땅으로 쫓겨가고

 최씨 딸은 병이 들었다. 이렇게 되자 그들은 결국 혼인을 하게 되었고 행복하게 살았다.

난리 때 이생의 아내가 죽자 이생이 홀로 고향에 돌아왔는데,

아내의 혼이 그에게 찾아와 그들은 다시 몇 년 살다가 이별했다. 그후 얼마 안 있어 이생도 죽었다.

셋째는 〈취유부벽정기(醉遊浮碧亭記)〉이다.

개성 부호인 아들 홍생이 부벽루에 올라 시를 읊조리자, 난데없이 시녀를 거느린 여자가 나타났다.

그 여자는 예전 기자(箕子)의 딸로 천계에 있다가 부왕의 묘를 돌아보고 가는 길에 홍생이 읊는 시를 듣고 반하여 왔다는 것이다.

그들은 서로 사랑의 시를 주고받다가 헤어졌다. 홍생이 그 뒤 병이 들어 누웠는데,

꿈에 한 미인이 나타나서 “우리 아가씨께서 당신을 견우성 아랫자리에 벼슬을 주었으니 속히 가자”고 했다.

이에 이생이 목욕을 하고 자리에 눕자 곧 숨을 거두었다.

끝으로 〈남염부주지(南炎浮洲志)〉와 〈용궁부연록(龍宮赴宴錄)〉이다.

이 소설은 경주 선비 박생이 꿈에 염라대왕과 세상일이나 치도(治道) · 이단 등을 문답한 내용이요,

〈용궁부연록〉은 개성의 한생이 꿈에 용왕에게 극진한 대접을 받은 뒤 꿈에서 깨어났는데

용왕이 준 선물이 실제로 있어 이것을 가지고 명산에 들어가 세상과 인연을 끊었다는 내용이다.

김시습은 이것들을 묶어 《금오신화》라고 이름 지은 뒤 석실(石室)에 간직했단다.

 

 

 

매월당 유필 시비(梅月堂 遺筆 詩碑)

 

一鉢卽生涯(일발즉생애) / 바랑 하나에 생애를 걸고
隨緣度歲華(수연도세화) / 인연 따라 세상을 살아가요
笠重吳天雪(입중오천설) / 삿갓은 오직 하늘의 눈(雪)으로 무겁고
是山皆有寺(시산개유사) / 이 산 어디에나 절이 있을 터이니
何處不爲家(하처부위가) / 어디인들 내 집이 아니겠느냐
他年訪禪室(타년방선실) / 다른 해에 선실(禪室)을 찾을 때에
寧禪路岐사(영선로기사) / 어찌 길이 멀고 험하다고 탓하겠느냐

 

 

 

 

 

 

 

선교장(船橋莊)

효령대군(세종대왕의 형)의 11대손인 가선대부(嘉善大夫) 무경(茂卿) 이내번(李乃蕃)에 의해 처음 지어져

무려 10대에 이르도록 나날이 발전되어 증축 되면서 오늘날에 이르렀다.

99칸의 전형적인 사대부가의 상류주택으로서 1965년 국가지정 중요 민속자료 제 5호로 지정되어 개인소유의 국가 문화재로서

 그 명성을 이어오고 있다. 300여년동안 그 원형이 잘 보존된 아름다운 전통가옥으로 주변의 아름다운 자연미를 활달하게 포용하여

 조화를 이루고 돈후한 인정미를 지닌 후손들이 지금가지 거주하는 살아숨쉬는 공간이다.

 선교장(船橋莊)이란 이름은

예전엔 경포호수를 가로질러 배로 다리를 만들어 건너 다녔다 하여 선교장(船橋莊)이라 명명되었다.

 

 

 

 

 

 

 

 

 

 

 

 

 

 

 

감자밭과 옥수수밭

 

 

 

 

 

 

큰길 건너면 오죽헌 입구이다.

걸어온 길을 돌아보니 먼 길도 아닌데 뙤약볕에 걸어 힘이 들었다.

 

 

 

 

버스를 탔으면 5분이면 도착할 거리를

초당 순두부에 막걸리를 마시고 얼큰한 기분으로 햇살 뜨겁지만, 오죽헌 가는 길 주변 풍경을 보며 쉬엄쉬엄 걷다 보니

거의 한 시간을 걸었다.

 

김시습기념관은 점심시간이라고 문이 닫혔고,

선교장은 걸음이 무거워 돌아보지도 못했다.

 

마지막 목표는 오죽헌.

물론

오죽헌은 내가 율곡 이이를 좋아하기 때문에 한 두번 오는 곳 아니지만, 마음을 가다듬고

 오죽헌으로 들어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