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牛馬처럼 걷는 부산+경남 여행

(경남 진주) 남강변 촉석루(矗石樓)와 논개(論介) 그리고 의암(義巖)

 

남강변 촉석루(矗石樓)와 논개(論介) 그리고 의암(義巖)

사적 제118호

 

 

 

언제 : 2016년 1월 3일 일요일

 

평양 부벽루, 밀양 영남루와 더불어 우리나라 3대 누각으로 이름을 떨쳐온 촉석루는

진주성을 찾는 길손이 가장 먼저 찾는 곳이다.

 

 35년 전에 본 진주라는 중소도시를 생각하고 남해안 고속도로를 벗어나니

그 사이

몰라보게 곳곳에 신시가지가 들어서 쉽게 도착하리라던 진주성을 찾아가는데 혼란스러웠다.

 

촉석루와 의암은 그대로인데

남강 강물 수량이 많아졌고, 촉석루에서 바라본 남강의 푸른 물줄기와 반영은 정말 아름다웠고,

특히

결혼기념일 이곳을 찾아 더욱 의미가 깊다.

 

돌아오는 길에

진주하면 냉면과 비빔밥이 유명하다기에 진주에서 맛집으로 이름난 식당을 찾아

줄을 서서 대기여 물냉면과 비빔밥으로 점심을 들었다.

 

 

 

 

 

촉석루(矗石樓)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 8호

촉석루는 진주의 상징으로 영남 제일의 명승으로 꼽힌다.

이곳은 고려 고종 28년(1241) 진주 목사 김지대(1190~1266)가 창건한 이후 지금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 고쳐 지었다.

전쟁 때는 장수의 지휘소로 쓰였고, 평상시에는 선비들이 풍퓨를 즐기던 명소였다.

 촉석루는 강가에 바위가 우뜩우뚝 솟아 있다고 하는 데에서 그 이름이 유래되었으며 일명 남장대(南將臺) 또는 장원루(壯元樓)라

 부르기도 한다.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광해군 10년(1618) 병사 남이흉(1576~1627)이 전보다 웅장한 건물로 고쳐

지어 1948년에 국보로 지정되었으나 1950년 6.25 전쟁으로 불탔다.

지금의 건물은 1960년에 진주고적보존회가 국비, 도비, 시비와 시민의 성금으로 고쳐 지은 것으로 건물 구조는 정면 5칸,측면 4칸

팔작지붕 형태로 되어 있다. 예로부터 남으로는 진주 촉석루, 북으로는 평양 부벽루라 할 만큼 풍광이 아름다워

수많은 시인 묵객들의 글과 그림이 전해져 오고 있다.

현재 촉석루에는 하륜(河崙, 1347~1419)의 촉석루기를 비롯한 많은 글이 걸려 있다.

 

 

 

 

 

 

 

 

 

 

 

 

의기사(義妓祠)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7호

의기사는 임진왜란 당시(1593년) 왜장을 껴안고 남강에 투신한 논개의 영정과 신위를 모신 사당이다.

논개는 진주성이 함락되자 성민과 나라의 원한을 갚기 위해 왜장을 촉석루 아래 의암으로 유인한 후 함께 남강에 몸을 던져

순국하였다. 의기사는 그 의로운 충절을 기리기 위해 영조 16년(1740)에 경상우병사 남덕하(1688~1742)가 창건한 이래  두 차례에

걸쳐 중건하였으며, 지금의 건물은 1956년 의기창열회(義妓彰烈會)가 시민의 성금을 모아 중건한 것이다.

건물구조는 정면3칸, 측면2칸, 맛배 지붕의 기와집이다.

 

 

 

논개는 전라북도 장수군 계내면 대곡리 주촌 출생으로,

1593년 최경회가 경상우도(慶尙右道) 병마절도사로 임명되어 동행하였으나, 진주성이 함락되고 최경회가 순국하자

논개는 왜장들이 촉석루에서 연회를 벌이고 있을 때 왜장 게야무라 로쿠스케(毛谷村六助)를 유인하여

남강(南江)에 투신하여 순국(殉國) 하였다.

 

 

 

 

 

 

 

 

 

 

 

 

 

 

의암(義巖)

의암은 논개가 왜장을 끌어안고 순국한 바위다.

조선 선조 26년(1593) 6월 29일  임진왜란 2차 진주성 싸움에서 진주성이 함락되고 7만 민.관.군이 순절하자

논개는 나라의 원수를 갚기위해 왜장을 이 바위로 유인하여 순국하였다.

이에 논개의 순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이 바위를 의암이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인조 7년(1629) 진주의 선비 정대륭(1599~1661)은

바위의 서쪽 벽면에는 전서체로 의암이라는 글을 새겼고 남쪽 벽면에는 한몽삼(1598~1662)이 쓴것으로 전하는

해서체로 된 의암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의암의 바닥넓이는 3.5mX3.3m이다.

 

 

 

 

 

 

△ 

 

 

 

 

 

 

 

 

 

 

 

 

촉석루는 왜 국보도 보물도 아닌 문화재 자료인가?

 

정면 5칸, 측면 4칸의 웅대한 촉석루는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8호라는 상당히 초라한 위상에 머물러 있다.

촉석루는 1241년(고려 고종 28)에 처음 지어졌다고도 하고, 1365년(공민왕 14)에 창건됐다고도 하는데,

마지막 중수는 1725년(영조 1)에 이뤄졌다.

하지만 지금 남아 있는 촉석루는 한국전쟁 와중에 전소되는 비운을 맞고 말았다.


지금의 촉석루는 1960년 진주고적보존회가 시민의 성금을 모아 재건한 누각으로 60년도 채 되지 않았다.

문화재 지정은 보통 역사적·예술적·학술적 가치가 있으면서 동시에 100년 이상 지난 건축·그림·서적 등을 대상으로 한다.

그렇게 보면,

본래 국보였던 촉석루가 그 이후 보물로도, 유형문화재로도 지정받지 못했지만 문화재자료로나마 이름을 올린 것은

자신에 깃들어 있는 임진왜란의 역사와 이름값 덕분일 것이다.

 

 

촉석루와 의암

 

 

 

 

 

 

 

남강변을 걸으며 촉석루의 반영을 담았다.

 

 

 

남강변의 반영

 

 

 

 

 

 

 

정약용 '촉석루 회고(矗石樓 懷古)'

오랑캐의 바다를 동으로 바라보니 긴 세월이 흘렀구나 (蠻海東嗟日月多)
붉은 누각은 우뚝 솟아 산하를 베고 있네 (朱樓迢遞沉山河)
꽃 피어난 물에 해 비치니 가인이 춤을 추고 (花潭日照佳人舞)
단청 매긴 기둥엔 장사의 노래가 깃들어 있네 (畵棟長留壯士歌)
전장터 봄바람 초목을 휘어감고 (戰地春風回草木)
폐허가 된 성엔 밤비 내려 안개 낀 물살 이네 (荒城夜雨漲烟波)
아직 남아 있는 사당에는 영령이 계시는 듯 (只今遺廟英靈在)
삼경에 촛불 밝히고 강신제를 올리네 (銀燭三更酹酒過)

 

 

 

진주성의 지반

 

 

 

진주성벽

 

 

 

이제 진주성과 촉석루를 두고 떠나야 할 시간이다.

남강의 풍경

 

 

 

 

 

 

 

 

진주성을 나오면서 진주성 관리하시는 분께 진주 음식 맛집 중 냉면과 비빔밥으로 유명한 식당을 소개받아

그곳에서 약 30분 대기하여 맛깔스러운 물냉면과 비빔밥으로 점심을 들고

 다시 순천으로 돌아와

이번 여행 마지막 코스인 순천 선암사를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