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 제198호
서오릉(西五陵) - 숙종과 인현왕후가 잠든 명릉(明陵)
우리나라 역사 인물 중에서 사극의 주인공으로 가장 많이 등장한 여인은
숙종의 후궁 장희빈일 것이다.
장희빈은 궁녀로 입궐하여 숙종의 후궁이었다가 왕비가 되고 다시 폐위되는 과정에 인현왕후가 있는데,
숙종의 사랑을 얻기 위한 얽히고설킨 애증의 두 여인, 장희빈과 인현왕후
숙종의 여인들이 묻힌 곳이 서오릉이다.
서오릉 경내의
경릉은 숙종의 원비 인경왕후 김씨(1661~1680)의 능이며, 희빈 장씨의 묘인 대비묘가 있으며
숙종과 인현왕후 그리고 계비 인원왕후의 능이 있는 명릉이 있다.
고등학생 때 이곳으로 봄 소풍을 왔었는데,
50여 년의 세월이 흐른 뒤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어디에서 모여 오락시간을 가졌는지, 점심은 어디서 먹었는지
기억나는 것이 없다.
조선왕릉 주요 상설
조선왕릉에는 각 공간적 성격에 부합하는 건축물과 조형물이 왕릉의 전체적인 조경과 조화를 이루며
조성되어 있다.
명릉
우측 쌍능이 숙종과 인현왕후의 능이며, 왼쪽 위에 자리한 인원왕후의 능이다.
명릉(明陵)
명릉은 조선 제19대 임금인 숙종(肅宗, 1661~1720. 재위 1674~1720)과 계비 인현왕후 민씨(仁顯王后 閔氏 1667~1701)
그리고 둘째 계비인 인원왕후 김씨(仁元王后 金氏 1687~1757)의 능이다.
정자각 뒤편이 숙종과 인현왕후의 능이며, 왼쪽 뒤편이 인원왕후의 능이다.
인현왕후는 세자 책봉 문제로 희빈 장씨(禧嬪 張氏)와 갈등을 빚어 폐위되었다가 복위되었다.
사치를 경계하는 숙종의 뜻에 따라 명릉의 석물을 축소하고 장명등도 8각에서 4각으로 간소화했다.
인현왕후 민씨(仁顯王后)
조선 제 19대 임금인 숙종의 2번째 왕후(王后)이다.
옥정(장희빈)이 궁궐로 들어갈 무렵,
숙종은 첫 번째 부인인 인경왕후를 잃고 외로움에 빠졌을 때, 숙종의 눈에 우연히 들어온 여인네가 있었으니,
그녀가 장옥정이다.
숙종은 새로 궁궐에 들어온 옥정의 아리따운 자태에 반해 밤마다 옥정의 처소를 찾았다.
경신환국 이후 나라를 이끌던 서인은 정권의 장기적 안정을 위하여 새 왕비만큼은 서인 집안에서 물색하였는데,
고른 여자가 민유중의 딸이었다. 서인의 선택에 숙종의 어머니인 명성왕후도 찬성을 하여
숙종은 자기 의지와는 다르게 민씨를 왕비(1681년, 인현왕후)로 맞이했다.
숙종의 마음은 온통 옥정에게 가 있어 새 왕비가 된 민씨는 숙종과 깊은 정을 나눌 수 없어,
명성왕후에 의해 장옥정은 출궁되었다가
명성왕후가 죽은 후, 숙종은 장옥정을 환궁시켜 후궁으로 삼아 총애하였는데,
1688년 후궁 장씨(소의 장씨)가 아들(후일의 경종)을 낳는다.
기사환국(1689년)
1688년 후궁 장씨(소의 장씨)가 아들(후일의 경종)을 낳자 숙종은 이 왕자를 원자를 정하고자 했으나,
당시 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서인들은 원자정호를 뒤로 미룰 것을 주장했고,
원자 정호 문제로 1689년 서인들이 쫓겨나고 다시 남인들이 집권하였고 인현왕후는 폐서인되어 안국동 사가로 쫓겨난
기사환국으로 이어져 졌다.
▽
갑술환국
인현왕후가 폐출된 지 5년이 지난 1694년 4월 1일,
남인들의 횡포에 숙종이 남인들을 몰아내고 서인(노론)들을 기용하여 정권을 교체하였는데 이를 갑술환국이라 하며,
1694년 갑술환국의 여파로 정계로 복귀한 노론과 숙종의 새로운 총희(寵姬)인 숙빈 최씨(당시 숙원)의 지지로
폐출되었던 민씨는 4월 12일 왕비 복위령이 내려졌고, 왕비였던 장씨는 국모가 둘일 수 없다는 이유로 왕비의 아래 지위인
빈으로 강등되어 본래의 희빈의 작호를 돌려 받았다.
민씨는 복위된 지 8년 만인 1701년 음력 8월 14일에 35세로 서거한다.
장희빈은 이제야말로 숙종을 독점할 줄 알았으나 희빈의 인현왕후 죽이기 작전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숙종 귀에까지 들어가고 말았다.
숙종은 장희빈의 악독함에 치를 떨며 사약을 내렸고, 희빈은 아들인 세자를 방패막이 삼아 죽음을 면하려 했지만,
인현왕후가 사망하고 2개월 정도가 지난 음력 10월 8일 숙종은 왕세자의 생모 희빈 장씨에게
자진을 명한다.
역사의 Tip
※ 조선 제20대 임금인 경종은 1688년(숙종 14) 숙종과 희빈 장씨의 첫째 아들로 1720년 6월에 숙종이 병으로 죽자
장희빈의 아들인 경종은 나이 33세로 왕위에 올랐으나, 37세의 젊은 나이에 비극적 삶을 마감한다.
경종의 능은 서울시 석관동에 위치한 의릉(懿陵)이다.
※ 조선 제21대 임금인 영조는 인현왕후가 왕비로 복위되는데 힘을 쓴 숙빈 최씨가 생모로
숙빈 최씨는 무수리로 궁에 입골하여 영조의 생모가 되었다.
2015년에 개봉된 영화 '사도'에서 영조의 생모가 무수리에서 시작한 궁녀라는 것에 출생의 열등감과 경종의 독살에 대한
컴플렉스를 가졌던 영조,
그런 연유로 형성된 괴팍한 성격과 당파의 눈치를 보는 면을 볼 수 있었다.
▽
조선국 숙종대왕 명릉 - 인현왕후 부좌
조선국 인원왕후 우강
명릉은 조선 제19대 숙종과 두 번째 왕비 인현왕후 민씨와 세 번째 왕비 인원왕후 김씨의 능이다.
숙종은 재위 기간 동안 붕당을 이용하여 강력한 왕권을 확립하였다. 인현왕후는 원자 책봉 문제로 폐위되었다가
복위도기도 하였으며, 인원왕후는 인현왕후가 세상을 떠난 후 왕비로 책봉되었다가 대왕대비의 신분으로 세상을 떠났다.
1701년(숙종27)에 인현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현재의 자리에 능을 조성하고 능의 이름을 명릉이라 하였다.
그 뒤 1720년 숙종이 세상을 떠나자 인현왕후 능 옆에 쌍릉으로 모셨고, 1757년(영조 33)에 인원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오른쪽 언덕(右岡)에 능을 조성하면서 동원이강르으로 조성된 쌍릉과 단릉의 형태로 되었다.
능의 석물은 실물에 가깝도록 작게 조각하였고, 이후에 조성한 왕릉에서도 영향을 끼쳤다.
사료가 밝히는 사실과는 거리가 있지만,
숙종과 인원왕후의 능이 이곳으로 정해진 연유와 관련한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숙종이 하루는 평상복을 입고 민심을 살피기 위해 궐을 벗어나 어느 냇가를 지나가고 있었다. 그 때 냇가에서 한 젊은이가
울고 있는 것이 보여 연유를 물으니, 갈처사라는 유명한 지관이 이곳에 무덤을 쓰면 좋다고 해서 땅을 파는데,
아무리 파도 물이 고이니 어쩔 줄을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숙종은 그 지관이 장난을 쳤다고 여기고, 젊은이를 불쌍히 여겨 관청에 가서 쌀 300석을 받아올 수 있도록
적은 서신을 쥐어주었다.
그리고는 지관이 살고 있는 허름한 오두막집을 찾아가 청년의 일을 따져 물었다.
그러자 지관은 “모르면 잠자코 계시오. 저 땅은 무덤자리로 들어가기도 전에 쌀 300석을 받고 명당자리로 들어가는 자리라오!”라며
따져 묻는 숙종에게 오히려 핀잔을 주었다.
그의 신통함에 놀라 자신이 국왕인 것을 밝히고, 훗날 숙종이 묻힐 묘자리를 골라달라고 부탁하였다.
전해지는 일화에 따르면, 지금의 명릉 자리가 바로 신통한 지관 갈처사가 택한 입지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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