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비 내리던 남이섬
언제 : 2015년 10월 27일 화요일
어디 : 강원도 춘천시 남산면 남이섬
내 오십 초반에 만나 이젠 그들도 오십 대와 육십 대가 된 인연 여덟 중 한 사람은 강원도 동해로 이사했고,
두 사람은 참석지 못하여 다섯이 작년엔 인천 장봉도로 떠났던 가을 여행을
올해는
세 명이 강원도 춘천 남이섬으로 떠난 날.
지난밤부터 내린 비는 오늘 아침 집 나설 때는 우산을 받아야 했다.
용산역에서 ITX로 이동하며 비 내려 혼잡하진 않을 것이란 기대감은 남이섬 입구에 도착하여 엄청난 인파에 무너졌다.
다행히
비는 그쳤고 구름 사이로 푸른 하늘이 보인다.
10:00
배가 출발하는 나미나라 가평 나루는 경기도 가평군에 속하며, 시끄러운 중국 관광객에 섞여 배에 올라 10 여 분만에 내린
남이섬은 강원도 춘천시 남산면에 속한다.
경기도에서 배 타고 강원도에 내려 단풍 속으로 걸음을 옮긴다.
비 그쳐 우산을 말리고
ITX에서
항상 혼자 떠나는 여행이라 내 사진이 없는데, 이번에는 몇 장 올릴 수 있겠다.
가평나루
나미나라 공화국 입국 장면 - 왕복 10,000원
나미나라공화국으로 가는 배
많은 배가 왔다갔다 끊임없이 관광객을 나르고 있다.
공중에는 짚 와이어를 이용하여 나미나라공화국으로 입국한다.
요금 38,000원
밤새 앓던 하늘이 순식간 구름 걷히고
북한강도 덩달아 푸르러 강가 산에는 오색단풍이 활짝 웃음을 짓는다.
조금 전 출발했던 가평나루와 짚와이어 타는 철제탑이 보인다.
드디어
나미나라공화국(남이섬)에 도착 - 조형물 '사랑과 평화의 등대'
배에서 내리니 '남이섬'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글자(Calligraphy)가 눈길을 끈다.
디자인 전공자인 나미나라 강우현 대표가 쓴 글자로, 옆에 '나는 남이섬에 산다. 남이섬은 오늘이 좋다. 남이섬은 달밤이 좋다'라는
작은 글자도 눈에 들어온다.
남이섬 인어상
밤새 발가벗고 그 사람 기다리느라 비 맞았는데,
날 밝았는데도 여태 그 사람 오지 않아, 발가벗고 차가운 북한강물에 무릎까지 적시며 기다리는가!
어서 나오게나
부족하지만, 그 사람 되어줄 누군가를 내가 데려옴세.
ㅎㅎㅎ
내가 이런 포즈로 사진을 담는군!
남이섬 나루터와 인어상
가을은 산몰랑에서부터 아래로 내려온다는데.
남이섬 가을은 굴뚝을 타고 하늘로 오르나 보다.
초갓집 앞마당에 농악대가 농악놀이를 한다.
남이섬엔 남이장군 묘가 없다.
입구에서 멀지 않는 곳에 젊은 시절 큰 뜻을 품었던 남이장군의 시비가 있고 그 뒤로 홍살문과 남이장군 묘가 있다.
白頭山石磨刀盡 백두산 돌은 칼을 갈아 다 없애고
豆滿江水飮馬無 두만강 물은 말을 먹여 다 없애리.
男兒二十未平國 남자 나이 스물에 나라를 평정하지 못한다면
後世誰稱大丈夫 뒷날 그 누가 대장부라 부르겠소.
그러나 남이장군에 대해 한 번 알아볼 필요가 있다.
남이(1441-1468)는 세조 때인 1467년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공신이었는데,
그 다음 해 유자광의 밀고로 갑자기 역적으로 몰려 비참한 죽음을 당한 비운의 장군이었다.
그 후 그는 역사 속에 묻혀 전설로 남아있을 뿐이었는데,
1818년(순조 18년) 그의 후손 우의정 남공철(南公轍)의 주청으로 강순(康純)과 함께 신원될 수 있었다.
남이의 가문은 할아버지 남휘(南暉)가 태종의 넷째 딸 정선(貞善)공주와 결혼하면서 의산군(宜山君)에 봉해졌다.
아버지 남빈(南份)은 군수를 지냈으며, 남이 역시 당세 세도가인 권람의 딸과 혼인하였다.
이처럼 남이의 집안은 왕실과 당시 세도가와 혼맥으로 연결되었으며, 그는 17세 때인 세조 2년(1457년) 무과에 장원급제하여
무관으로 승승장구한다. 그리고 강순, 어유소(魚有沼) 등과 함께 육진(六鎭)을 개척하면서 촉망받는 젊은 장군으로 이름을 날린다.
남이의 절정기는 1467년 이시애의 난을 평정할 때였다.
그는 강순·어유소와 함께 토벌군 대장이 되어 전공을 세워, 적개공신 1등에 오르고 의산군에 봉해지고,
건주위의 여진족 토벌에 참가해 이등공신이 되어 그해 12월 27일 공조판서가 되고, 세조 14년인 1468년 8월 병조 판서가 된다.
그러나 예종이 즉위하고 그해 10월, 병조참지 유자광의 밀고로 국문을 당해 환열형(轘裂刑)에 처해진다.
환열형이란 두 수레가 양쪽에서 끌어 당겨 사람의 사지를 찢어 죽이는 형벌이며,
그의 목을 7일 동안 저자거리에 효수(梟首)하게 하였다. 효수란 죄인의 목을 높은 곳에 매다는 형벌이다.
사실 반역죄인은 그 후손들이 묘를 만들 수 없었으나 남이장군의 묘는 현재 경기도 화성군 비봉면 남전리 산 145번지에 있다.
남전리는 남이장군의 외가로 남양홍씨의 세거지였다.
그러므로 남이의 시신은 외가 사람들에 의해 수습되어 남전리에 묻힌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그 묘를 공식적으로 밝힐 수 없었고, 그로 인해 여기저기 남이가 묘가 생겨나게 된 것이다.
현재 남이섬에 있는 남이의 묘도 역시 허묘다.
남이섬에는 옛날부터 남이장군 묘라고 전해지는 돌무더기가 있었다고하며 남이섬이라는 이름도 그 때문에 생겨났다는 것이다.
섬의 북쪽 남이나루 근처에 남이장군 묘라고 전해지는 돌무더기가 있었고,
이 돌을 옮기거나 집으로 가져가면 액운이 낀다는 전설이 있었다.
1965년 수재 민병도 선생이 남이섬을 매입한 후 남이장군의 넋을 기리고자 봉분을 만들었다.
그리고 추모비를 세우면서 공식적으로 남이장군 묘라 칭하게 되었다.
묘 앞에 있는 남이장군 추모비의 글은 노산 이은상 선생이 짓고, 글씨는 일중 김충현 선생이 썼다.
2011. 12.20 오마이뉴스에서 옮김
중앙 잣나무길
2007년 6월 잣나무길
가을비에 씻기운 단풍이 더욱 곱다.
노래박물관
노래박물관에서는 동백아가씨 이미자선생의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
▽
유리메타
연못 위를 지나는 다리와 초록병을 이용하여 주변 자연과 함께 멋진 작품이 되었다.
오리 석상
연지(蓮池)
가평 잣막걸리 세 통을 샀는데 내가 사진을 담는 사이 나 대신 들고 온 지인이 막걸리가 무겁다며
족발에 막걸리 한 잔씩 하자며 목이 갈해 더 이상 못 참겠단다.
점심을 들려면 한시간은 더 움직여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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