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牛馬처럼 걷는 경기 여행

(경기 광주) 사적 제57호 남한산성의 가을

 

사적 제57호

남한산성의 가을

 

 

 

 

언제 : 2015년 10월 3일 토요일

어디 :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일원

 

참으로 날 좋다.

휴무일은 대체로 명소를 찾아가지 않는데,

남한산성 구불구불 산길을 달리는 버스따라 움직이지 않아 굳었던 내 몸도 오랜만에 이리 비틀 저리 비틀하며

절로 웃음이 나온다.

남문에 내려

 노란 들국화 핀 성벽 비탈길을 올라 확 트인 곳에서 서울을 한눈에 볼 수 있어 좋다.

 

대문의 사진은 남한산성의 서문인 우익문(右翼門)으로 1636년 병자호란의 치욕을 피할 수 없는 곳으로,

1637년 1월 30일 청나라에 항복하러 인조가 소복을 입고 이 문을 통해 삼전도로 나갔다.

 

 

 

하늘에서 본 남한산성 전경

 

남한산성(南漢山城)은 경기도 광주시, 성남시, 하남시에 걸쳐 있는,

주봉인 해발 497.9m의 청량산을 중심으로 하는 산성으로 병자호란 때 조선의 왕 인조가 청나라에 대항한 곳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북쪽으로는 연주봉(467.6m), 동쪽으로는 망월봉(502m)과 벌봉(515m), 남쪽으로도 여러 봉우리를 연결하여 성벽을 쌓았다.

 

성벽의 바깥쪽은 서고동저의 기복을 형성하며,

서쪽은 대체로 경사가 급하고 험하지만, 내부의 평지를 지나 동남쪽으로 내려가는 길은 대체로 완만한 편으로

성벽과 결합하여 단단한 자연 방어선을 이루어 방어에 유리하면서도 공격자의 입장에서 굉장히 공략하기 어려운 천혜의 전략적

요충지로 봉암성(蜂巖城), 한봉성(漢峰城), 신남성(新南城) 등 3개 외성과 5개 옹성도 함께 연결되어 견고한 방어망을 구축하였다.

 

성벽과 성 안에는 많은 시설물과 건물이 있었지만,

지금은 동·서·남문루와 장대(將臺)·돈대(墩臺)·보(堡)·누(壘)·암문·우물 등의 방어 시설과 관청, 군사훈련 시설 등이 남아 있는

우리나라 산성 가운데 가장 시설이 잘 완비된 산성으로

남한산성의 역사·문화적 가치가 높게 인정되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남한산성-안내도[한글영문혼합]최종(6월)1800

 

남한산성 전도

 

 

 

 

 

 

 

남문 : 지화문(至和門)

 

 

 

1636년 병자년 겨울

청의 대군은 압록강을 건너 서울로 진격해 오고, 조선 조정은 길이 끊겨 남한산성으로 들 수밖에 없었다.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 갇힌 무기력한 인조 앞에서 벌어진 주전파와 주화파의 다툼,

1636년 12월 14일부터 1637년 1월 30일까지 47일 동안 고립무원의 성에서 벌어진 말과 말의 싸움,

'죽어서도 살 것인가, 살아서 죽을 것인가.'

 

 결사항쟁을 고집한 척화파 김상헌, 화친을 주장한 주화파 최명길,

그 둘 사이에서 번민을 거듭하며 결단을 미루는 임금 인조. 그리고 전시총사령관인 영의정 김류의 복심을 숨긴 좌고우면,

산성의 방어를 책임진 수어사 이시백의 기상은 남한산성의 아수라를 한층 비극적으로 형상화한다.
(소설 : 남한산성에서/김훈 작)

 

 

남한산성은 동쪽을 제외하고는 서 남 북향이 모두 경사진 산으로 형성되어 천혜의 요새이다.

 

 

 

남문 방향에서 본 성남시 도심지로 옅은 안개가 아쉽다.

 

 

 

 

 

 

 

 

 

 

 

제6암문(서암문 : 西암문)

암문은 적의 관측이 어려운 곳에 설치한 성문으로 일종의 비밀 통로이기 때문에 크기도 작고, 적에게 쉽게 식별될 수 있는

시설도 설치하지 않았다. 이 암문은 성벽의 흐름방향과 달리 입구가 북서쪽을 향하고 있어 외부에서 쉽게 관측되지 않도록 하였다.

또한 북동쪽의 성벽을 돌출하여 암문으로 접근하는 적을 측면에서 효과적으로 공격할 수 있도록 하였다.

 

원성에 설치된 12개 암문의 외측 개구부(개구부)는 대부분 홍예식이지만 제2암문과 더불어 이 암문의 개구부는 평거식이다.

인조 15년(1637) 1월 23일, 한밤중에 습격해온 청병을 크게 물리친 곳이라 하여 이 암문 부근을

'서암문 파적지'라 부른다.

 

 

 

 

 

 

 

하늘에서 본 수어장대와 청량당

 

 

 

청량당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호

청량당에는 이회와 그의 처첩에 관한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이회는 조선시대 남한산성을 축성 할 때, 동남쪽 부분을 맡았는데 경비를 탕진하고 공사에 힘쓰지 않아 기일 내에 공사를 마치지

못하였다는 억울한 모함을 받게 되어 처형당한다.

그의 처첩도 남편의 성을 쌓는 일을 돕기 위해 삼남지방에서 축성자금을 마련하여 돌아오는 길에 남편의 소식을 듣고 한강물에 투신

자살하였는데

이희는 죽을 때, 자신의 죄가 없으면 매 한 마리가 날아올 것이라 예언흥 했는데 과연 매가 날아와

그이 죽음을 지켜보았다고 한다. 후에 누명이 벗겨지고 그가 맡은 공사가 가장 잘된 것으로 알여지자 사당을 지어

초상을 안치하고 넋을 기렸다. 원래의 청량당은 6.25 전쟁때 소실되어 다시 지었다.

서장대가 있는 산 이름이 청량산이므로 청량당이라 이름 지었다.

 

 

 수어장대

1892~1893 경기도 박물관 소장

이 사진은 1892~1893년 사이 이폴리트 프랑뎅(Hippolyte Frandin)이 찍은 수어장대 모습으로,

1900년 4월 14일부터 11월 12일까지 열린 파리 만국박람회의 공식 엽서 이미지로 사용되기도 했다.

 

 

수어장대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호

장대란 지휘관이 올라서서 군대를 지휘하도록 높은 곳에 지은 건축물이다.

수어장대는 남한산성의 서쪽에 자리하고 있는 장대로서 남한산성에 세워졌던 5개 장대 중 현존하는 유일한 건물이며,

남아있는 건물 중에서 가장 화려하고 웅장하다.

 

 

인조 2년(1624) 남한산성 축성 때 단층으로 지어 서장대라 불리던 것을 영조 27년(1751) 유수 이기진이 왕명을 받아

 2층으로 다시 짓고 '수어장대'라는 편액을 달았다.

수어장대 2층 내부에는 '무망루'라는 편액이 달려 있었는데, 병자호란 때 인조가 겪은 시련과 8년간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다가

귀국하여 북별을 이루지 못하고 승하한 효종의 원한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영조가 지은 것이다.

현재 무망루 편액은 수어장대 오른편에 1989년 보호각을 지어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보관하고 있다.

 

 

 

 

 

 

이승만 대통령 방문비

뒷면에는 단기 4286년(서기 1953년) 이승만 대통령이 80세 되던 해 방문해 전나무를 기념 식수했단다.

 

 

무망루 비각과 리승만 대통령 방문 기념비와 전나무

 

 

 

무망루

조선 영조27년 (1751) 광주유수 이기진이 증축한 수어장대 2층의 내편 문루로서 그 편액이 2층누각에 있어

1989년 전각을 건립하고 이 안에 현판을 새로 설치 일반인이 볼 수있게 하였다.

 

무망루는 병자호란 때 인조가 겪은 시련과 8년간 청나라 심양에 볼모로 잡혀갔다가 귀국 후 북별을 꾀하다 승하한

효종의 원한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영조가 이름 지은 것이다.

 

 

매바위

수어장대 우측에 있는 바위로 수어서대(守禦西臺)란 암각문이 있으며,

이회장군(청량당 참조)이 참수 당할 때 매가 날아와 앉아 슬피 울다간 바위로 바위에는 매발자욱이 선명히 남아 있단다.

 

수어서대(守禦西臺)

암각문은 박종경(朴宗慶 1765~1817) 筆.

누이는 순조(조선 23대)의 생모인 수빈(綬嬪)으로 도승지, 여주목사, 호조판서

 

 

 

 

 

 

곡선의 남한산성이 참 아름답고, 뒤로 멀리 불암산이 보인다.

 

 

 

들국화가 성 밖이 궁금한지 꼰지발로 키 재기를 한다.

 

 

 

한강에서 남산이 솟아 인왕산을 타고 북한산까지, 서울이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멀리 좌측 청계산과 중앙의 관악산

 

 

 

좌측 건물군 타워펠리스 - 중앙 건물군 여의도 - 우측 무역센터 

 

 

 

여의도 고층건물들을 당겨보니 바로 앞에 한강 인도교가 보이고,

건물들 뒤로는 인천 계양산이며 옆의 능선은 내가 자주 다니는 철마산이다.

 

 

좌측 건물들이 여의도 이고 남산과 한강 그리고 롯데월드타워( Lotte World Tower)

 

 

 

 롯데월드타워( Lotte World Tower)

2009년에 기공을 시작하여 2016년 말에 완공될 예정으로,

 이 건물은 현재 국내 최고층 빌딩인 송도동북아무역타워(305m)를 제치고 국내 최고높이의 건물이 되며, 완공 시

 세계에서 6번째(555m)로 높은 빌딩이 된다.(서울 N타워 480M, 63빌딩 249M)

최상층인 123층, 해발 500m 지점에 전망대가 가설되어, 완공 시 중국 상하이타워(610m높이 121층에 설치)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높은 전망대가 된다.

 

 

뒤로 북한산과 도봉산이 성처럼 솟았고 가운데 한강이 흐르며, 우측 워커힐이 있는 아차산과 광나루 지역

 

 

 

북한산 정상인 백운대와 기세 좋은 인수봉 그리고 고개를 내밀고 있는 노적봉

 

 

 

하남시와 한강

 

 

 

들국화 향기를 보낼 수 있다면 보내고 싶은 사람이 있다.

 

 

 

서문 : 우익문(右翼門)

인조가 세자 등과 함께 청나라에 항복하러 삼전도로 나갈 때, 이 문을 지났다.

 

1627년(인조 5년)에 발발한 정묘호란 이후 후금이 조선에 대해 무리한 요구를 한데 대해서 조선이 대항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후금은 조선의 왕자를 보내고 사죄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조선은 이를 거절하였고 이에 따라 청 태종 황태극이 12만명의 군사를 이끌고 조선을 침공하였다.

침공 직전 청으로 국호를 개칭한 황태극은 12월 9일 압록강을 건넌 후 한양을 향해 진군하였다.

 

이에 조선은 먼저 봉림대군, 인평대군 등의 왕자를 먼저 강화도로 피신하게 하고, 조정 또한 강화도로 피난하려 했으나,

청군의 선발대가 이미 강화도로 가는 길목을 가로막으면서 강화도를 포기하고 남한산성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당시 성 안에는

1만 3천여명의 군사가 방어를 하고 있었고, 양곡 1만 4300여 석과 소금 90여 석이 있어 겨우 50일 분의 식량이 비축되어 있었다.

청군은 큰 저항을 받지 않은 채 남한산성에 당도에 산성 밑의 탄천 부근에 포진하였다.

 

이에 전국의 구원병들이 출병하였지만, 모두 남한산성에 당도하기 전에 궤멸되었다. 구원병이

 별로 도움을 주지 못하자 성안의 조정에서는 강화론이 제기 되었다. 주화파와 주전파 사이에 여러차례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지만

이듬해 1월 22일 강화도가 청군에 함락당하고 강화도에 피신해 있던 왕자와 군신들의 처자 200여 명이 청군의 포로로 잡히면서

 대세는 강화 쪽으로 기울게 되었다. 그 이후 청군은 화포를 쏘아대어 성벽의 일부를 무너뜨리는 등 압박을 가하였다.

1월 26일 조선의 사신이 협상을 위해 청 진영에 도착했을때 청군은 강화에서 포로가 된 왕자를 대면시켰다.

이에 조선은 더 이상 버틸 힘을 상실하고,

1월 30일 인조가 45일 만에 식량 부족으로 성문을 열고 나가 삼전도에서 항복의 예를 갖게 되었다.

 이 곳에서 인조는 소복을 입고 청나라 황제 황태극은 높은 단상에 앉아서 삼궤구고두의 예를 받았다.

 

 

 

서문은 산성의 동북쪽 모서리 부분의 해발 450m 지점에 위치하며 개구부와 문루로 구성되었다.

개구부는 내외면이 반원형의 홍예식이다. 외면 홍예 안쪽에는 2짝의 목재판문을 설치하였다. 판문의 문짝에는

방형 철엽을 서로 겹치도록 부착하였다. 대문을 지탱하는 문지두리는

석재로 위, 아래에서 지탱하도록 되어있고, 양측벽에는 장군목을 끼워 빗장을 지를 수 있도록 장방형 흠을 파놓았다.

서쪽 사면의 경사가 급해 이곳에서 물자를 이송하기는 어렵지만 광나루나 송파나루 방면에서

 산성으로 진입하는 가장 빠른 길이다.

서문은 산성의 초축시기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정조 3년 개축하여 우익문이라 칭하였다.

 

 

 

 

 

 

제5암문(연주봉옹성 암문)

이 암문은 연주봉옹성으로 연결되는 통로로 서쪽에는 성벽에서 2m 정도 돌출된 치가 있고, 북쪽으로는 직선길이 150m 정도의

연주봉옹성이 연결된다. 개구부 외부는 홍예식이고 내부는 평거식이다.

통로의 길이는 5m 정도로 천장은 장대석 5매로 덮여 있다.

 

하늘에서 본 연주봉 옹성

 

 

 

 

 

북문 : 전승문(戰勝門)

남한산성에는 동. 서. 남. 북에 4개의 대문이 있는데, 북문은 병자호란 당시 성문을 열고나가 기습공격을

감행햇던 문이다. 싸움에 패하지 않고 모두 승리한다는 뜻에서 '전승문'이라고도 하였다.

 

당시 영의정 김류의 주장에 의해 군사 300여 명이 북문을 열고 나가 청나라 군을 공격하였으나, 적의 계략에 빠져 전멸하고 말았다.

이를 '법화골 전투'라 하는데,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서 있었던 최대의 전투이자 최대의 참패였다.

정조 3년(1779) 성곽을 개보수할 때 성문을 개축하고 이름을 붙여 전승문(전승문)이라 한 것은 그 때의 패전을 잊지 말자는

뜻이었을 것이다. 선조 때 기록을 보면 산성 내에 동문, 남문, 수구문 총 3개의 문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북문은 인조 2년(1624)에 신축된 성문이라고 생각된다.

 

 

 

 

 

 

 

동문 :좌익문(左翼門)

남한산성에서 유일하게 평지와 우마가 다닐 수 있어 가장 사용빈도가 많았던 문으로,

행궁을 중심으로 국왕이 남쪽을 바라보며 국정을 살피니, 동문이 좌측이 되므로 좌익문이라 한 것이다.

 

 

남한산성 행궁(南漢山城行宮) : 사적 제80호

인조는 1624년부터 1626년까지 2년간 남한산성을 증개축하고, 1626년 6월 총융사 이서에 의해 행궁이 완성되었다.

조선 시대의 남한산성 행궁은 유사시 왕이 피난할 수 있도록 준비된 예비 궁궐이다.

 

하늘에서 본 남한산성 행궁과 산성마을

 △

 

1637년 1월 30일 눈이 펄펄 날리던 날,

1636년 12월 14일부터 1637년 1월 30일까지 47일 동안 청 태종 황태극과 12만의 청나라 군사와 남한산성에서 대치하다

대세가 기울자 식량부족이란 이유로 인조가 세자 등과 함께 서문인 우익문을 통해 소복을 입고 삼전도에 나가

청나라 황제 황태극을 높은 단상에 앉히고 삼궤구고두의 예를 올린 치욕의 현장이다.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은 결코 함락되지 않았으나,

인조가 성에서 내려온 것은

이듬해 1월 22일 강화도가 청군에 함락당하고 강화도에 피신해 있던 왕자와 군신들의 처자 200여 명이 청군의 포로로 잡히면서

 대세가 기울었고, 겨울이라 양식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삼궤구고두(三跪九叩頭)

 행하는 방식은 “궤”(跪)의 명령을 듣고 무릎을 꿇는다.

“일고두”(一叩頭), “재고두”(再叩頭), “삼고두”(三叩頭)의 호령에 따라 양 손을 땅에 댄 다음에 이마가 땅에 닿을 듯 머리를 조아리는

 행동을 3차례 하고, “기”(起)의 호령에 따라 일어선다. 이와 같은 행동을 3회 반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