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牛馬처럼 걷는 충남 여행

(충남 공주) 사적 제12호 공주 공산성(公山城)

여유롭게 공산성(公山城) 한 바퀴 돌기

사적 제12호

 

 

언제 : 2015년 1월 22일 목요일

어디 : 충청남도 공주시

 

공산성은 웅진백제시기(475~538)를 대표하는 왕성으로 백제의 대표적인 고대 성곽이다.

 

비단결 금강이 감싸흐르는 공산성은

백제 문주왕 원년(475) 고구려 장수왕의 남진정책으로 공격을 받아

한성에서 공주로 도읍을 옮겨 성왕 16년(538)에 사비(부여)로 도읍을 옮길 때까지 64년 간 백제의 왕성이었다.

 

해발 110m의 공산성은 북쪽에서 보면 마치 한자의 귀인공(公)자와 같다하여 공산이라 이름했으며,

백제시대 토성 400m, 조선시대 석성 2,200m, 총둘레 2,660m의 포곡형 산성이다.

 

오랜만에

여유있는 공산성 한 바퀴를 도는 여행길에 나섰다.

 

 

금서루 입구 비석군

공주와 관련된 인물의 행적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비석들

 

 

제민천교 영세비(濟民川橋永世碑)

공주시 향토문화유적 기념물 제20호

1817년(순조17) 제민천이 대홍수로 범람하고 제민천교가 붕괴되자 이를 재 건립한 사실을 기리는 비석으로,

비문에는 1817년 여름 홍수로 다리와 둑이 무너지자, 다리의 복구를 8월에 마치고 하천의 둑을 고쳐쌓은 일, 이듬해인

1818년 4월에 모두 완료했다고 기록됐다. 또한 사업 자금의 조달방법 및 자금 지원한 10여명의 백성 이름도 적혀 있다.

 

 

공산성은

 

백제시대에는 토성이었으나 조선시대에 석성으로 다시 쌓았다.

성의 이름은 웅진성(熊津城)으로 불렀다가 고려에는 공산성, 조선 인조 이후에는 쌍수산성(雙樹山城)으로 불렀다.

 

백제 멸망 직후 의자왕이 일시적으로 머물렀고, 조선 후기에는 충청감영이 설치되기도 하였고,

 이괄의 난(1624)때에는 인조가 이 성으로 피난하였다.

 

 

성 안에는 백제시대 추정 왕궁터를 비롯하여

금서루, 진남루, 공북루, 영동루, 쌍수정, 쌍수정사적비, 명국삼장비,

영은사, 연지 및 만하루, 임류각 등 백제시대에서 조선시대에 이르는 다양한 유적들이 남아 있다.

특히

쌍수정은 이괄의 난을 피해 인조가 머물렀으며, 영은사는 임진왜란 때 승병을 훈련시켰던 곳이며,

임류각은 백제건축양식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금서루(錦西樓)

공산성 4개의 성문 가운데 서쪽에 위치한 조선시대 문루이다.

 

 

인조는 이괄의 난을 피해 1624년 잠시 이곳에 피난 온 적이 있었다.

피난 중에 우성면 목천리 근처 임씨 댁에서 콩고물에 무친 떡을 진상했는데, 시장한 인조는 몇 개를 연거푸 먹더니

"떡이 맛있는데 이 떡 이름이 무엇이오?" 물었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떡 이름이 있을 터인데, 아무도 모르니 이 떡은 어느 집에서 만들어 왔소?" 라고 물으니

"임씨 댁에서 진상했습니다." 인조왕은 한참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임씨라.... 그것 참 절미로다." 그리하여 임씨가 진상했다고 하여 이때부터 임절미(任絶味)라고 부르게 되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임절미"는 "인절미"로 바뀌고 공주사람들의 입으로 전해져 "공주떡"이 되었다.

 

 

쌍수정(雙樹亭) 문화재자료 제49호

1734년(영조 10)에 관찰사 이수항이 인조를 기리기 위해 세운 정자이다.

 

이괄의 반란(1624)을 피하여 공주로 피난을 와 6일간 공산성에 머물렀는데, 인조는 이곳에 서있던 두 그르의 나무 밑에서

반란이 진압되기를 기다렸다고 한다.

 

난이 평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한 인조는 자신이 기대고 있었던 쌍수에 정삼품 작위를 내리고,

한양으로 돌아갔다. 이때부터 공산성을 "쌍수산성" 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수항이 관찰사로 부임하여 나무가 늙어 없어진 자리에 삼가정(三架亭)을 건립했는데, 이 건물이 쌍수정이다.

 

 

 

 

 

 

추정 왕궁지(推定 王宮址)

백제가 한성에서 웅진으로 수도를 옮긴 475년 이후에 세워진 왕궁터로 추정되는 곳으로 쌍수정 아래에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임류각은 궁의 동쪽에 건립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어 1980년에 조사된 임류각지에서 서쪽으로

 왕궁이 입지할 수 있는 위치는 이 곳 밖에 없다는 논거로 1985~1986년에 걸쳐 조사되었으며, 왕궁지 가능성이 높았단다.

그러나

내 눈으로 보니 왕궁의 위치로는 의심(?)의 여지가 있어 보였다.

 

 

쌍수정 사적비(史跡碑) 유형문화재 제35호

인조가 이괄의 난을 피해 공산성에 머물렀던 일을 기록하여 세운 비이다.

 

비문에는 이괄의 반란, 인조가 난을 피하게 된 사실, 공산성에 머물렀던 6일 간 행적, 공산성의 모습 등이 적혀 있다.

1708년(숙종 34)에 세웠으며 인조 때 영의정을 지낸 신흠이 비문을 짓고, 숙종 때 영의정을 지낸 남구만이

글씨를 썼다. 비는 거북 모양의 받침 위에 비몸을 세우고, 목조 건축의 지붕을 모방한

머릿돌을 갖춘 조선시대의 일반적인 양식이다.

 

 

진남루(鎭南樓) 문화재자료 제48호

공산성의 남문으로 조선시대에는 삼남(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의 관문이었다.

 

 

공산성과 진남루

 

 

 

임류각지(臨流閣址)

 

백제 동성왕 22년(500)에 세운 임류각이 있었던 곳이다.

삼국사기 기록에 의하면 왕이 궁의 동쪽에 임류각을 지었는데, 높이가 5장(약 15m)에 이르는 고층 누각이었다고 한다.

1980년 발굴 조사를 통해 임류각 터를 확인, 현재 남아 있는 주춧돌은 동성왕 당시에 사용된 것이며,

42개 가운데 9개는 없어졌다. 발굴 과정에서 "류(流)" 자가 새겨진 기와와 백제 토기 등이 많이 나왔다.

지금까지 발견된 백제 건물터로는 가장 오래된 것 중의 하나로 학술적 가치가 크다.

 

 

임류각(臨流閣)

 

백제 제24대 동성왕 22년(500)에 왕궁 동쪽에 지은 건물이다. 높이가 15m에 이르는 고층으로 왕과 신하들의 연회 장소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1980년 공산성 발굴 조사 과정에서 임류각 터를 발견하고, 1993년에 문헌 기록 및 발굴 조사결과를

근거로 2층 누각으로 복원하였다.

 

 

 

 

 

 

영동루 채 가기 전부터 토성이다.

 

 

 

영동루(迎東樓)

공산성 4개 성문 가운데 동쪽에 설치된 문이다.

 

 

 

 

 

 

광복루(光復樓) 문화재자료 제50호

공산성 동쪽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2층 누각으로, 공산성 안에 주둔한 군대를 지휘하던 중군영(中軍營) 문이었다.

 

원래 공산성의 북문인 공북루 옆에 있던 것을 일제 강점기에 지금의 위치로 옮기고 웅심각(웅심각)으로 불렀는데,

1946년 4월 김구 선생과 이시영 선생이 와서 나라를 다시 찾았음을 기리고자 "광복" 이란 이름을

붙이게 됨으로써 누각 명칭이 광복루로 바뀌었다.

 

 

광복루에서 본 공주 시내

 

 

 

 

 

 

금강

 

 

 

 

 

 

영은사(靈隱寺) 전통사찰 제2호

조선 세조4년(1458)에 세워진 사찰로, 묘은사로 불렀다가 이괄의 난 때에 이 절에 피신한 인조가 은적사라 하였다가

다시 영은사로 고쳤다.

 

광해군 8년(1616)에는 이곳에 승장(僧將)을 두어 전국의 사찰을 관할하였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에는 승병의 합숙소롤 사용, 여기서 훈련된 승병은 영규대사의 인솔 아래 금산전투에 참여하였다.

 

 

영은사 스님이 걸어가는 모습

 

 

 

광복루 방향에서 내려오며 본 연지와 만하루

 

 

연지(蓮池)와 만하루(挽河樓) 기념물 제42호

백제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장방형의 연못이며,

만하루는 조선 영조(1724~1776)대에 건립된 누각으로 금강과 연지 사이에 자리한 누각은 공산성을 방어하는 기능과

평소 경치를 관람하는 역할을 하던 곳이다.

 

 

공북루 방향으로 가는 길에 본 연지와 만하루

 

 

잠종냉장고(蠶種冷藏庫)

1915년 길이 11.67m, 폭 과 높이 2m의 철근 구조물로

충청남도에 있는 잠업 농가에 누에씨를 보급하기 위해 만든 지하 저장시설이다.

 

 

좌측에 공북루와 뒤로 공산정이 있고 우측엔 금강

 

 

 

멀리 우측에 보이는 누각이 공산성을 한 바퀴 돌 때 처음 접한 금서루이다.

공산성 안에서 가장 넓은 공간인데, 발굴 중인 모양이다.

 

 

공북루(拱北樓)

공산성 4개 문 가운데 북쪽의 누각으로 금강과 마주 하고 있다.

 

 

흔적

 

여보시오

나이 들었다고 슬퍼하지 마오

 

가슴 펴고

기상 좋게

우뚝 서고 싶겠지만

 

욕심,

부질없는 욕심이오

 

그대도

한때에는

보란 듯 힘자랑했을 터

 

주름지고

꺾이이고

 

병들고

썩는것

 

흐르는 세월에 장사 없다잖소

 

그래도

내 눈에는

 

그대가

이곳에서 가장 아름다운데

 

그대

어찌 알까만.

 

우촌(雨村)

2015. 1.26.

 

 

공산정(公山亭)

 

 

공산성은(475~538) 

백제의 문주왕이 한성에서 웅진으로 천도하여 성왕이 사비로 천도하기까지 64년 간 왕궁터로 추정되는 곳으로,

주변의 험한 산세와 금강이 가로막아 남진하는 고구려군을 방어하기엔 좋았지만, 

실추된 왕권과 국력을 강화하지 못하여

 결국 문주왕을 비롯해, 삼근왕, 동성왕까지 세 명의 왕이 모두 유력 귀족에 의해 피살되고 말았다.

 

41세 늦은 나이에 왕위에 오른 무령왕은,

신구 귀족세력들의 균형유지에 힘쓰며, 지방에 대한 통제력도 강화하여 백성과 왕실은 안정을 되찾아가고 있었으나, 

늘어나는 인구와 좁은 땅,

금강의 범람으로 인한 피해 그리고 왕실의 위신을 회복하기 위해선 새로운 땅이 필요했다.

그래서 무령왕의 아들 성왕은 아버지의 뜻을 따라 사비로 천도를 단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