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란한 백제 역사를 간직한 무령왕릉(武寧王陵)
사적 제13호
언제 : 2015년 1월 23일 금요일
어디 : 충청남도 공주시 금성동 산5-1
무령왕릉은
송산리 고분군의 제7호 고분으로 구분되었으나
백제 제25대 무령왕(461~523 : 재위 501∼523)의 무덤으로 확인되어 무령왕릉으로 부른다.
젊었을 적 지인들과 어울려 다녀간 무령왕릉을
이번엔 아무도 없이 혼자
웅진백제역사관, 송산리 고분군 그리고 무령왕릉을 자세히 보고 해설가의 해설도 들으며
사진을 담아본다.
백제무령왕릉연문(百濟武寧王陵埏門)
송산리 고분군 배치도
한강에서 시작한 백제가 왜 백마강 유역까지 내려가게 됐던 것인지 알아보자.
백제는 도읍지의 위치에 따라
한성백제 493년 (BC18년~AD475년), 웅진백제 63년(AD475년~ AD538년), 사비백제122년(AD538년~AD660년)으로 나뉜다.
초기 백제는 한강유역을 끼고 있는 한성에 도읍을 정하고
한반도의 가장 풍요로운 지역을 차지하며 국가의 기틀을 마련했다.
특히 4세기 근초고왕의 맹활약을 통해 삼국 중 가장 먼저 전성기를 이룩하며 고대 국가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그러나 AD475년 고구려 장수왕의 침공으로 왕도인 한성이 함락되고 21대 개로왕이 전사하게 되면서 위기를 맞게 된다.
왕도를 빼앗긴 백제는 한성을 버리고 웅진 곧 지금의 공주로 수도를 옮긴다. 500년의 한성시대를 마감하고,
웅진시대를 열게 된 것이다.
주변이 험한 산세로 둘러싸인 웅진은 적을 방어하기에 매우 유리한 곳이었다.
그러나 웅진 천도 후엔 한성시대 만큼 중앙집권적 정치를 펼치지 못했다. 개로왕이 전사한 후 그의 아들 문주가 즉위하여
웅진으로 천도하고 다시금 국방에 힘을 기울였으나 실추된 왕권을 세우고 국력을 강화하는 일이란 쉬운 게 아니었다.
결국 문주왕을 비롯해, 삼근왕, 동성왕까지 세 명의 왕이 모두 유력 귀족에 의해 피살되고 말았다.
웅진시대를 살았던 왕들에게 웅진은 아마도 비극의 땅이었을 것이다.
동성왕 이후 40세 늦은 나이로 즉위한 무령왕은 선대왕들이 귀족에 의해 살해되는 것을 목격해왔다.
그래서 특히 신구 귀족세력들의 균형유지에 힘썼다.
22담로에 왕족을 파견해 지방에 대한 통제력도 강화했다. 백제를 다시 강국으로 만들며
중흥을 이뤄낸 무령왕, 비로소 백성과 왕실은 안정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이때 백제 문화도 꽃피게 된다.
하지만 늘어나는 인구와 좁은 땅, 금강의 범람으로 인한 피해 그리고 왕실의 위신을 회복하기 위해선 새로운 땅이 필요했다.
그래서 무령왕의 아들 성왕은 아버지의 뜻을 따라 사비로 천도를 단행한다.
사비로 천도 후 백제 멸망까지는 블로그 2013년 8월 23일 올려진
부여의 사비궁터를 참고
입장료 1,500원
당연히 관리 유지를 해야 하기에 입장료 내는 것은 옳다. 그러나 입장할 때 어떤 이유로 실제 무령왕릉을 입장할 수 없고
모형관에서 해설가의 해설을 듣는다는 설명이 있었으면 좋았을 터인데, 그것을 말하지 않고 입장료만 받아
정작 무령왕릉에 가니 지반 문제로 입장할 수 없다는 안내판만 덩그러니 놓여있어
왠지 사기를 당한 기분은 감출 수 없다.
송산리 고분군 모형 전시실
송산리 고분군 모형과 무령왕릉 발굴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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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 축조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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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제25대 무령왕(재위 501∼523)
무령왕릉은 송산리 제6호 벽돌무덤 북쪽의 나지막한 구릉지대에 위치한다.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에 송산리고분군이 조사되면서 무령왕릉이 제6호 벽돌무덤의 현무릉(玄武陵)으로 인식되어
처음에는 왕릉으로 주목되지 않았다. 따라서 왕릉으로 발견된 것도 매우 우연한 기회에 이루어졌다.
1971년 7월 5일, 제6호 벽돌무덤 내부에 스며드는
유입수를 막기 위하여 후면에 배수를 위한 굴착공을 파면서 왕릉의 입구가 드러나 조사하게 된 것이다.
때문에 무령왕릉은 도굴과 같은 인위적 피해는 물론 붕괴 등의 피해가 없이 완전하게 보존된 상태로 조사된 것이다.
현재 송산리고분군 내 무령왕릉은 제7호분으로 분류되어 있으나,
피장자가 명확히 확인된 무덤이므로 무령왕릉이라고 부른다.
무령왕릉 구조와 유물에 관한 설명을 하시는 해설사
무령왕릉 유물 위치로 총 108종 4,600여 점이라는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으나 중요한 것만 전시되었으며,
그 중에 국보로 지정된 것은 12건에 달하고 있다.
무덤 맨 앞에 보이는 도자기는 중국 청자 도자기로 중국과 관계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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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제162호 석수(石獸)와 국보 제163호 묘지석(墓誌石)
석수는 무령왕릉 발굴 당시 널길(羨道연도)의 중앙에 밖을 향해 놓여 있어서
무덤 문을 열었을 때 제일 먼저 사람들의 눈에 띄었던 유물이다. 무덤을 수호하는 의미를 갖는 진묘수(鎭墓獸)의 일종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처음 발견된 것이다.
묘지석은 왕릉에 들어가는 연도 중앙 석수 앞에 왕비의 지석과 함께 나란히 놓여 있었으며, 이를 통해 무덤의 주인공이
무령왕과 왕비임을 알 수 있는 아주 중요한 묘지석이다.
지석에는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이 62세 되던 계묘년 5월 7일에 붕어하시고
을사년 8월 12일에 대묘에 예를 갖춰 안장하고 이와 같이 기록한다
(寧東大將軍百濟斯麻王年六十二歲 癸卯年五月丙戌朔七日壬辰崩到 乙巳年八月癸酉朔十二日甲申安爀登冠大墓立志如左)”라고
되어 있다. 이를 통하여 무령왕은 523년 5월에 사망하여 525년 8월에 왕릉에 안치되었고
왕비는 526년 11월에 사망하여 529년 2월에 안치되었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무령왕릉 지석 영동대장군백제사마왕년육십이세계묘년오월병술삭칠일임진붕도을사년팔월계유삭십이일갑신안착등관대묘입지여좌 (무령왕릉 묘지석 사진은 특급뉴스에서 가져왔음) |
석수(石獸)
돌로 만든 동물의 상으로 왕릉을 수호하기 위해 만들어 놓았던 진묘수(鎭墓獸)로
용이나 봉황처럼 가상의 동물이다.
진묘수는 기괴한 형태의 상상 속의 동물로, 무덤 안이나 앞에 놓아 악귀를 쫓고 죽은 자를 지킨다는 중국 묘장 풍습에서 온 것이다.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석수 역시 악귀를 물리쳐 달라는 의미에서 안치된 것으로 보인다.
석수는 정수리에 사슴뿔 모양의 쇠뿔이 하나 박혀 있는 점이 특징이다.
이처럼 뿔이 하나 달린 경우를 '독각 진묘수(獨角 鎭墓獸, 무덤을 수호하는 목적으로 뿔이 하나인 짐승의 석조 동물상)' 라고 한다.
국보 제154호 왕 금제관장식, 국보 제156호 왕비 금귀걸이, 국보 제159호 금제뒤꽂이
국보 제155호 왕비 금제관장식, 국보 제157호 왕비 금제귀걸이,
국보 제158호 금제일곱마디목걸이와 아홉마디목걸이, 국보 제160호 다리작명 은제팔찌
무령왕릉 출토물
국보 제161호 청동거울과 출토물
국보 제164호 왕비 나무머리받침, 국보 제165호 왕 나무머리받침
1971년 발굴
무령왕릉 모형
송산리 고분군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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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반 사정으로 송산리고분군과 무령왕릉 내부는 직접 볼 수 없어 아쉬웠지만,
잘 꾸며진 모형으로 대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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