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牛馬처럼 걷는 인천 여행

(인천 강화) 정수사와 전등사 탐방기

 

정수사와 전등사 탐방기

 

 

 

정수사 법당.

보물 제161호.

 

언제 : 2006년 12월

 

 정수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직할교구 본사인 조계사의 말사이다.

 

639년(선덕왕 8) 회정대사(懷正大師)가 마니산의 참성단(塹星壇)을 참배한 다음 이곳의 지세가 불제자의 삼매정수(三昧精修)에

 

적당하다고 판단되어 정수사(精修寺)를 창건했다.

 

1426년(세종 8) 함허(涵虛)가 중창한 다음,

 

법당 서쪽에서 맑은 샘이 솟아나는 것을 보고 절이름을 정수사(淨水寺)로 바꾸었다.

 

그뒤 여러 차례의 중수가 있었으며 1883년(고종 20) 근훈(根訓)이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 당우로는 법당(보물 제161호)·산신각·요사채 등이 있다.

 

이밖에 탱화 7점, 부도, 동종 등이 있다.

 

 

 

정수사 법당
보물 제161호. 정면 3칸, 측면 4칸의 단층 맞배지붕.

건립 당초의 세부형식을 제일 잘 파악할 수 있는 부분은 건물 후면의 공포(栱包)이며 그것은 조선 전기에 속하는 주심포(柱心包) 집의

수법을 따르고 있으나 출목(出目)을 1출목으로 처리하여 약간 긴 첨차(檐遮)를 받친 것이 특색이다.

또 외목도리를 받친 장설(長舌)은 공포 부분에서 운두를 높이고 있다.

내부는 바닥에 마루를 깔고 천장은 중앙을 우물천장, 그 주위는 빗 천장으로 만들었는데 이것은 후일에 추가된 것이다.

 이 때문에 지붕 밑의 가구재(架構材)들은 보이지 않는다.

건물 측면에는 고주(高柱) 2개를 세워서 그것으로 종량(宗樑)을 받치도록 하였으며 건물 앞뒤 기둥에 걸친 옥내 대들보는

그 양끝이 그대로 길게 외부의 출목까지 뻗쳐나와 공포와 함께 그 일부를 구성하고 있다.

 

1957년 보수공사를 할 때 1689년(숙종 15) 당시의 상량문이 발견되었으며

 1423년(세종 5)에 중창(重刱)된 것으로 되어 있다. (네이버 백과 사전 참조)

정수사는 강화도내의 보문사나 전등사에 비해 그 규모는 작지만 서민적인 풍모가 풍긴다.

정수사에서 특히 유명한 것은 보물 제161호로 지정되어 있는 대웅전의 문창살이다.

 

 

대웅전 문창살

 

 

 

모란과 장미가 활짝 핀 모습을 목각으로 깎아 만든 문창살은 청 황 홍 녹 등의 4색으로
색상이 화려하여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창살로 손꼽힌다.

 

 

 

정수사 샘물

 

 

淨水寺대웅전 옆 바위아래 샘물이 쫄쫄 나오고 있었다. 우리는 그 곳에서 목을 축였다.

 

 

 

 

 

정수사는 큰 절은 아니라 둘러보고 나니 시간이 충분하여 전등사까지 보기로 했다.

정수사에서 전등사까지는 택시로 이동했다.

 

 

전등사

 

 

삼랑성 전등사 정문 종회루

 

 

 

 

 

 

단군의 세 아들 부소(扶蘇), 부우(扶虞), 부여(扶餘가 쌓았다는 삼랑성 남문인 종회루 성벽

 

 

 

 

 

전등사의 고목

 

 

윤장대

 

 

전등사 올라가는 길

 

 

전등사

대한불교조계종 제1교구 본사인 조계사의 말사이다. 중창기문(重創記文)에는 381년(소수림왕 11)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창건한 절로, 1266년(원종 7)에 중창된 이래 3, 4차례의 중수가 있었다고 되어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현존하는 우리나라 사찰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볼 수 있으나 확실하게 단정짓기는 어렵다. 창건 당시에는 진종사(眞宗寺)라고 했으나 1282년(충렬왕 8) 충렬왕의 비인 정화공주가 승려 인기(印奇)를 중국 송나라에 보내 대장경을 가져오게 하고, 이 대장경과 함께 옥등(玉燈)을 이 절에 헌납한 후로 전등사라 고쳐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 이 옥등은 전하지 않고 있다. 1337(충숙왕 6), 1341년(충혜왕 2)에 각각 중수되었다고 하나 당시 전등사의 역사를 알려주는 기록은 거의 없는 실정이다. 1605(선조 38), 1614년(광해군 6)에 일어난 2차례의 화재로 절의 건물들은 완전히 소실되었고, 그 다음해 4월부터 지경(志敬)이 중심이 되어 재건하기 시작해 7년 만인 1621년 2월에 완성되었다. 1678년(숙종 4)에 실록을 보관하는 사고(史庫)가 건립되면서 왕조실록을 지키는 사찰로 왕실의 보호 아래에 있게 되었다. 이 사고장본(史庫藏本)은 1909년 서울로 옮겨져 조선총독부 분실(分室)에 보관되었다가 지금은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1707년에는 유수(留守) 황흠(黃欽)이 사각(史閣)을 고쳐 짓고, 별관을 또 지어 취향당(翠香堂)이라 하고 보사권봉소(譜史權奉所)로 정했다. 그뒤에도 1749, 1839, 1855, 1871, 1876년 등 여러 차례에 걸쳐 중수되었을 뿐만 아니라 근래까지 대규모의 중수 불사(佛事)가 이루어졌다. 이때 대조루(對潮樓)를 비롯해 양곡을 보관하는 정족창(鼎足倉)·석량고(石糧庫) 등의 건물들이 세워지면서 현재와 같은 대규모의 사찰이 되었다. 1912년 일제강점기 때 강화·개성 등 6개군에 있는 34개 사찰을 관리하는 조선불교 30본산의 하나로 승격되었다. 또한 이 절의 뒤편에 있는 정족산의 삼랑성은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고 하여 신성시되는 점이 주목된다. 경내에는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사원건축인 대웅전(보물 제178호)·약사전(보물 제179호)을 비롯해 명부전·삼성각·향로각·적묵당·강설당·범종각 등이 있다. 중요문화재로는 중국 북송시대의 범종(보물 제393호)과 전등사의 말사인 정수사(淨水寺)에서 개판된 조선시대의 법화경판(1544)이 전해지고 있는데 이 경판은 6·25전쟁 때 파주에 있었던 모부대에서 1매를 가져가 현재 104매만 남아 있다. 그밖에 거대한 청동수조(靑銅水槽)와 대웅전에서 사용했던 작은 옥등 등이 있다.

 

 

대웅전

 

전등사의 대표적인 건물인 대웅보전은 그 자체만으로도 조선 중기의 건축 양식을 보여주는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그러나 전등사 대웅보전이 더욱 유명하게 된 것은 지붕을 떠받치고 있는 나부상(裸婦像) 때문이다.

대체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신 신성한 법당에 웬 벌거벗은 여인인가 하고 궁금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나부가 아니라 원숭이로 간주하는 경우도 있다.

원숭이는 사자나 용과 마찬가지로 불교를 수호하는 짐승으로 중국, 인도, 동남아시아의 사찰에 모셔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등사 대웅전의 조각상에 대해서는 대체적으로 나부상이라는 데 의견이 더 많다.

 

대웅전 처마 밑 나부상

 

 

 

 

 

이 나부상과 관련해서는 유명한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전등사는 1600년 이상의 역사를 간직한 가운데 여러 차례 화재를 겪고 이 때문에 대웅보전도 여러 번 중건되었다. 그 중 지금의 나부상이 만들어진 것은 17세기 말로 추측된다. 당시 나라에서 손꼽히는 도편수가 대웅보전 건축을 지휘하고 있었다. 고향에서 멀리 떠나온 그는 공사 도중 사하촌의 한 주막을 드나들며 그곳 주모와 눈이 맞았다. 사랑에 눈이 먼 도편수는 돈이 생길 때마다 주모에게 모조리 건네주었다.

“어서 불사 끝내시구 살림 차려요.”

“좋소. 우리 그림 같은 집 한 채 짓고 오순도순 살아봅시다.”

도편수는 주모와 함께 살게 될 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대웅보전 불사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공사 막바지에 이른 어느 날 그 주막으로 찾아가보니 여인은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며칠 전에 야반도주를 했수. 찾을 생각일랑 아예 마시우.”

이웃집 여자가 말했다.

도편수는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었다. 여인에 대한 배반감과 분노 때문에 일손이 잡히지 않았고 잠도 오지 않았다. 그래도 도편수는 마음을 다시잡고 대웅전 공사를 마무리했다. 공사가 끝나갈 무렵 대웅전의 처마 네 군데에는 벌거벗은 여인이 지붕을 떠받치는 조각이 만들어졌다. 이것이 전등사 대웅보전에 얽힌 전설이다.


이 나부상이 더욱 재미있는 것은 네 가지 조각이 제각각 다른 모습이라는 점이다. 옷을 걸친 것도 있고 왼손이나 오른손으로만 처마를 떠받든 조각도 있으며 두 손 모두 올린 것도 있기 때문이다.

이 대웅전의 나부상은 희랍의 시지프스 신화를 연상케 한다. 그런가 하면 부처님을 모신 성스러운 전각이지만 그런 조각상을 세운 당시 도편수의 익살과 풍자, 그런 파격을 기꺼이 받아들일 줄 아는 전등사 스님들의 자비로운 마음을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과연 그 대웅전을 중건했던 도편수나 스님들은 무슨 뜻으로 나부상을 올려놓았던 것일까? 단순히 사랑을 배신하고 욕심에 눈 먼 여인을 징계하고자 하는 뜻만은 아닐 것이다. 도망간 여인이 잘못을 참회하고 세상을 올바르게 살아가라는 염원도 들어있는 것이다. 또 그런 조각상을 보게 될 후대의 사람들에게 부처님의 자비로운 마음을 본받으라는 뜻도 담겨 있으리라. 그렇기에 전등사 대웅보전의 나부상은 보면 볼수록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전등사 범종

 

 

겨울이지만 많은 분들이 전등사를 찾았다.

 

 

전등사에서 사진 속 지인님으로 부터 만공스님 법문집

 "사랑하고 또 사랑하라" 를 선물 받았다.

 

"사랑하고 또 사랑하라."

근대 한국 선의 중흥조인 경허 스님의 제자로 스승의 선지를 충실히 계승하여 선풍을 일으킨 위대한 선지식, 만공 스님의 첫 번째 법문집. 남해 망운암 주지인 성각 스님은 만공 스님의 법문들을 한 데 모으고, 한자로 기록된 법문을 한글로 풀이한 후, 현대적 의미의 해석과 주석을 달아, 누구나 쉽게 접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구성하였다.

불교의 주요 화두는 탐욕과 집착을 버리는 것에 있다. 인간이 가진 모든 번뇌와 불행이 바로 탐욕과 집착에서 기인하기 때문이다. 결국 탐욕과 집착 또한 인간 스스로가 만들어낸 굴레에 불과한 것이다.
이 책에는 탐욕과 집착을 버리는 '마음 비우기'를 주요 화두로 하는 총 170여 편의 법문과 게송들이 수록되어 있다. 만공 스님은 법문을 통해 속세의 사람들이 스스로 만들어놓은 원 안에 갇혀 살아가고 있음을 비유하면서 온갖 번뇌의 짐을 내려놓을 것을 권고한다. 또한 풍류객으로서의 호탕한 기질을 자랑하는 만공 스님의 게송은 자연과 인생의 절묘한 조화와 깨달음의 이치를 노래한다.

 

 

산행을 마치고

 

2006년 마지막 산행을 마니산으로 정하길 참 잘했다 생각한다.

지인님께서 가을부터 마니산 산행을 하자는 제의를 받았으나 시간이 여의치 않아

미루다

의미있는 2006년 마지막 산행을 같이 할 수 있어 나는 참으로 행복하였다.

산행 다음 날

전화가 왔다. 몸 괜찮냐고......나는 별일이 없다 했더니

님은 팔과 어깨 그리고 잘 쓰지 않았던 근육들이

쑤시어 파스를 많이 붙였단다.

아쉬운 점들도 몇 몇 있었지만 좋은 사람들과 산행을 하는 것은 행복이다.

힘들어도 힘들지 않다며 끝까지 웃음을 잃지 않은 님에게

새해에도 늘 강건하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