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牛馬처럼 걷는 충남 여행

(충남 당진) 솔뫼성지(솔뫼 성당과 김대건 신부 기념관)-3

솔뫼성지 -3

솔뫼 성당과 김대건 신부 기념관

 

 

언제 : 2014년 4월 6일 일요일

어디 : 충청남도 당진시 우강면 솔뫼로

 

십자가의 길을 걸어보고 이번에는 솔뫼성당과 김대건 신부 기념관을 둘러보았다.

기념관에서 인상적인 것은

김대선 신부 시신을 감쌌던 베와 베에 묻어있는 머리카락이었다.

 

조선 시대 수많은 천주교인이 박해를 받았는데,

특히 조선 4대 박해인 신해박해, 신유박해, 기해박해, 병인박해로 모진 고난과 목숨을 잃었었고, 김대건 신부는

병오박해에 새남터에서 순교하셨다.

도대체 그들이 믿는 하느님은 누구이시며, 예수님은 누구이며 그들에게 무엇이기에, 

그들의 목숨을 초개처럼 버리면서 신앙을 지키려고 했을까?

 

그동안 내가 다녀온 많은 성당과

새남터성지, 서소문성지, 솔뫼성지, 절두산성지, 해미읍성지, 전주 전동성당 등 천주교 신자도 아닌데

누가 나의 발걸음을 이곳으로 오게 하시는지.....

 

 

2014년 8월 14일 한국을 방문하는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솔뫼성지와 해미읍성지를 방문하신다는 뉴스를 접했는데,

솔뫼성지와 당진시 일원에 많은 교황 방문 환영 문구를 볼 수 있었다.

 

 

김대건 신부 기념관 앞 마리아像이 인상적이다.

 

 

 

 

 

솔뫼성당 성수대

 

 

솔뫼성당은 김대건 신부 기념관 맞은편에 있는 아담한 성당이며,

지금까지 보았던 고풍스런 성당이 아닌 현대식으로 지어진 단순하면서 깔끔한 성당이다.

 

 

성당 좌우에 배치된 스테인드글라스

 

 

 

 

 

솔뫼성당의 제단

 

 

솔뫼성당 앞에 있는 조형물

 

 

김대건 신부 기념관

 

 

 

 

 

 

 

 

김대건 신부의 생애와 순교과정을 그림으로 표현한 곳

 

 

입학추천서

파리외방선교회 선교사인 모방 신부가 1836년 12월에 작성한 신학교 입학 추천서 및 서약서.

"Andreae Kim Mintyen Solmoe

Tchongtchingto Prov. Oriundi

(충청남도 면천 솔뫼 출신 김 안드레아)" 라고 기록 되어 있다.

 

 

라파엘호 모형

1845년 4월 30일 제물포를 떠나 상해로 갈 때 타고 갔다가, 8월31일 제 3대 조선교구장 페레올 주교, 다블뤼 신부와 함께

상해를 출발하여 조선으로 입국할 때 타고 왔던 배

 

 

 

 

 

사진은 김대건 신부가 순교한 새남터이며, 치골과 머리카락등이 전시되었다.

 

 

 

 

 

계초(啓初 : 최초보고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체포와 심문 과정을 임금에게 보고하기 위해 작성하였던 자료.

 

 

김대건 신부의 흉상

1999년부터 2001녀까지 명동성당은 가톨릭대 해부학교실팀에 의뢰하여 성 김대건 신부의 유골을 바탕으로

성인의  얼굴을 복원하였다. 본 흉상은 김 신부의 얼굴 뼛조각에 대한 과학적 분석을 통해 뼈대를 제작한 뒤 19세기 당시

남성의 윤곽에 맞춰 찰흙을 붙여 청동 모형을 제작한 것이다.

 

 

마지막 회유문

교우들 보아라!로 시작하는 김대건 신부의 최후 편지로 조선 교우들에게 남긴 유언적 교시 

 

 

 

 

 

1. 신해박해.辛亥迫害.1791년.윤지충 사건

1791년(辛亥, 正祖 15년)에 있었던 박해.

전라도 진산에서 윤지충(尹持忠)과 그의 외종사촌 권상연(權尙然)이 제사를 폐하고 신주(神主)를 불태운 이른바

진산사건(珍山事件)으로 인해 발생하였다. 12월 8일(음 11월 13일) 윤지충과 권상연이 참수되고, 이승훈은 배교했음에도 불구하고

면직되고, 권일신은 유배가는 도중 사망하고, 그외의 교우들은 배교하고 석방됨으로써 박해는 일단락 되었다.

그러나 그 결과 서학서의 구입이 금지되고 또 이미 들여온 홍문관(홍문과)의 서학서도 불 태워지는 등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더욱 강화되었다.

 

2. 신유박해.莘酉迫害.1801년

1801년(신유년)에 일어난 천주교인에 대한 박해,

1800년(정조 24년) 6월(음) 천주교에 대한 비교적 온화한 정책을 써왔던 정조가 승하하자, 모든 정세는 천주교와 남인에게

더욱 불리하게 되었다. 정조의 뒤를 이어 순조(順祖)가 겨우 11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게 되고,

대왕대비(大王大妃) 정순왕후(貞純王后) 김씨는 섭정이 되어 모든 정사를 마음대로 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왕대비는 원래가

 노론벽파(老論僻派)에 속해 있었으므로, 집권하게 되자 천주교도들과 남인 시파(詩派)를 일망타진하려 하였다. 신유박해로

 교회의 지도급 인사들이 거의 사라졌을뿐만 아니라 살아남은 교인들도 유배를 당했거나 생명유지를 위해 산간벽지로

 피신하지 않을 수 없어 거의 빈사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천주교회 는 그 후에도 전국적인 규모는 아닐지라도

 크고 작은 박해를 끊임없이 받으면서, 신앙을 굳게 지켜나갔고, 선교사를 다시 영입하려는 시도를 계속했다.

 

3. 기해박해. 1839년

1801년에 일어난 신유박해 이후 한동안 잠잠했던 천주교에 대한 박해는 1839년(헌종 5년)에 이르러 다시 시작되었다.

1839년이 기해년이었기에,이 때의 박해를 흔히 기해박해라 한다.

기해박해 때에는 조선에 들어와 활약하던 앵배르(Imbert)주교와 모방(Maubant)신부 샤스탕(Chastan) 신부 등

3명의 불란서 선교사와 더불어 모두 114명 이상의 신자가 순교를 하였다.

기해년의 박해가 일어나자 앵배르 주교는 순교자들의 사적을 기록하기 시작하였으며, 자신도 곧 체포될 것을 예감하고

그는 정하상과 현석문에게 순교자의 사적을 면밀히 조사하여 기록하는 일을 계속하도록 명하였다.

이 일을 부탁받았던 정하상은 곧 체포되어 처형되었지만, 현석문은 숨어 다니며

교우들로부터 모아들인 기해박해 순교자들의 자료를 정리하고 기록하여 '기해일기'란 책을 완성하였다.

이 '기해일기'는 한동안 실전되었다가, 1904년경 당시 제8대 조선교구장으로 임명된 뮤텔(Mutel)주교에 의해 한글본이

발견되어 이듬해인 1905년에 그대로 출판되었다.

이 '기해일기'에 의하면 당시에 순교한 사람이 모두 114명이 넘었다고 되어 있으나, 여기에는 78명의 순교사기만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 '기해일기'는 그 사료적인 정확성이 입증되어 여기에 기록된 78명 가운데 69명이 1925년 7월 5일에 복자위에 올랐으며,

이들은 1984년에 성인품에 오르게 되었던 것이다.

 

*병오박해.1846년 헌종 12년

기해박해 후 7년이 지난 1846년 6월 5일, 김대건 신부의 체포를 계기로 시작된 병오박해는 9월 20일 종결됐다.

이 박해로 형벌을 받고 순교한 사람은 성직자 1명, 평신도 8명 등 모두 9명으로 1984년 모두 시성 됐다.

순위도 등산진에서 선주와 사공 등과 함께 체포된 김신부는 9월 16일 어영청을 거쳐 새남터로 끌려가 군문효수를 받았다.

그로부터 3일 뒤인 19일, 신앙을 굳게 지켜오던 현석문도 군문효수령을 받고 임치백, 남경문 등도 장사(장사)로 순교했다.

병오박해의 여파는 그다지 크지 않았다. 여러 차려의 박해를 겪어온 신자들은 박해소문을 듣고 피신했고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도 교우촌으로 피신했다. 순교자는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를 위시하여 현석문 가를로,남경문 베드로,

 한이형 라우렌시오, 우술임 수산나, 임치백 요셉, 김임이 데레사, 이간난 아가다. 정철염 가타리나 등이다.

 

4. 병인박해.丙寅迫害.1866년-1873년

조선조 말기인 1866년(高宗 3년)에 시작되어 1873년 대원군이 실각할 때까지 계속되었던 박해를 말한다.

피로 얼룩진 한국 교회사를 통해서도 병인박해는 그 규모와 가혹함과 희생자의 수에 있어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대박해였다.

이 박해의 주요 원인은 유교사상에 젖은 보수지배충의 서학(西學)에 대한 사갈시(蛇蝎視),
즉 천주교에 대한 이교도들의 증오심에서 발작한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척사(斥邪)를 요구한 박해자들은

"천주교 신자들이 윤리 도덕을 무시하고, 아비와 임금도 안중에 없으며 죽음을 가장 영광스럽게 여기는 족속으로,

재물을 가지고 사람을 유인한다"고 하여, 동양윤리의 이단자요 모든 악의 전형으로 몰았다. 위정자들은

 또 신유년(辛酉年, 1801년)의 이른바 황사영 백서(黃飼永帛書) 사건을, 한 교인 생각이 아니고 프랑스 군사력을 끌어들이는 것은

천주교의 신조인 것처럼 몰아세워 보수적인 배외사상(排外思想)을 부추기는데 이용하였다.

(카톨릭대사전에서)

  

 

신분을 감추기 위해 입었던 상복

1794년 12월 조선에 최초로 입국하였던 중국인 주문모(1752~1801)신부 이후 선교사들은 조선 입국 시에 상복을 입었다.

상복을 입을 경우 얼굴을 가림으로써 서양인의 신분을 속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선교사들은 조선에서 활동하는 동안에도 상복을 착용하고 교우촌이나 은신처로 옮겨 다녔다.

김대건 신부와 함께 입국한 페레올(Ferreol, 1808~1853) 주교와 다블뤼(Daveluy, 1818~1866) 신부 역시 라파엘호를 타고

 충청도 강경의 황산포로 입국할 때 이러한 형태의 상복을 입었다.

 

 

김대건 신부 친필 서한

 

 

 

 

 

 

 

 

김 신부의 생애와 순교 과정을 영상으로 볼 수 있는 영상실

 

 

 

 

 

 

 

 

기념관 마지막에는 기획전시실이 있는데, 이곳은 천주교인의 유물들이 전시되고 있었다.

 

 

 

 

 

 

 

 

 

 

 

솔뫼성지는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인 안드레아 김대건 신부가 출생한 곳으로 그의 생가와 동상, 기념관이 있는 곳이다.

국내 제1의 가톨릭 성지로 명성 자자 한 이곳은 1984년 5월 한국천주교 2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내한한 교황요한바오로 2세로부터

그가 성인으로 시성된 후 전세계 카톨릭 교회의 공경의 대상이 됨에 따라 역사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중요한 문화유적으로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1785년 을사박해를 시작으로 100년여의 세월동안 박해를 받아온 천주교 역사 중

병오박해 때 순교한 김대건 신부(1822-1846). 신심(信心) 만 놓는다면 해방 될 수 있는 온갖 핍박에 아랑곳없이

스스로 고난의 길을 가고자 했던 인물이다. 부귀영화에 아랑곳없이 가진 것을 나누며, 신자를 돕고 의지하며,

고난의 세월을 딛고자했던 성인. 그에게 있어서 박해는 이미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이웃을 사랑하고

 참된 진리를 얻기 위해 감내할 수 있는 극복의 대상이었음을 생각한다.

 

 

제법 나이 먹었음 직 한 소나무들이 동산에 가득 숲을 이룬 곳 솔뫼.

솔숲을 거닐던 중 자세가 바르지 않고 휘어 자란 소나무들의 모습에서 문득 느낀 애처로움은 증조부, 조부, 부친

그리고 자신까지 4대가 순교한 인물을 기억하기 때문이리라.

 

 

이렇게 긴 날을 기다리게 했던 솔뫼성지 방문을 마치고

시간이 촉박하지만,

왜목마을을 가려고 택시를 타고 합덕버스터미널로 향했는데 택시 기사가 좋은 날 어찌 혼자 성지를

다녀오시느냐며, 내게 천주교 신자냐고 묻는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