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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영주) 사적 제55호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 소수서원

 

사적 제55호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소수서원

한국 사액서원(賜額書院)

 

 
 
서원(書院)은 명목상으로 성리학을 연구하고 선현을 제사지낸다는 설립 목적을 가지고 있었고 지방 사족(士族)의 지위를 강화해 주는 기능도 가지고 있었다. 사화(士禍)로 말미암아 향촌에 은거하여 생활하던 사림(士林)의 활동 기반이었으며, 임진왜란 이후에 급속히 발전하였다. 서원(書院)은 유학의 성현들을 모시는 사당(祠堂) 또는 사묘(祠廟)의 역할, 향약(鄕約) 등의 향촌 질서를 정하고 백성들을 계도하는 역할, 단순한 교육이 아닌 학문 연구와 발전의 기능을 하는 연구소 역할을 담당함으로써 향촌의 사림(士林)을 결집하는 역할도 하였다.   

1543년(중종 38년) 풍기군수 주세붕이 순흥에서 고려의 학자 안향(安珦)을 모시는 사당을 짓고 이듬해 백운동서원이라 한 것이 조선 최초의 서원이었고 그 후 전국 각지에서 많은 서원이 생겼으며, 1550년(명종 5년)에는 퇴계 이황(李滉)의 건의로 국왕이 백운동서원에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편액을 하사하고 책·노비·전결(田結) 등을 주어 장려하였으며, 이것이 사액서원(賜額書院)의 시초가 되었으며 국가의 보조를 받는 서원이 각처에 설치되어 명종 대 이전에 설립된 것이 29개, 선조 대에는 1백 24개, 숙종 대에는 1도에 80 ~ 90개에 이르렀다.   

서원에 부속된 토지에는 조세를 과하지 않았고 양민이 원노(院奴)가 되어 군역을 기피하였으며 서원에 들어가 붕당(朋黨)에 가담하는 폐단이 생겨 1644년(인조 22년) 서원 설치를 허가제로 하였고, 1657년(효종 8년) 서원을 누설(累設)한 자는 처벌하였다. 1864년 흥선대원군은 서원에 대한 모든 특권을 철폐하고, 서원의 누설을 엄금하였으며 이듬해에는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와준 데 대한 보답으로 명나라 신종(神宗)을 제사지내는 사당 만동묘를 폐쇄하였다. 1871년 전국의 서원과 사우 1000여 곳을 헐어 버리고 47개소(서원 26곳, 사우 21곳)만 남겼으며, 서원 소유의 토지들을 거두어 국가에 귀속시켰다.

 

 

사액서원 제1호 / 소수서원 [紹修書院]

 

소수서원

 

 

 소수서원입구

 

  

 

사적 제55호. 세종대에 설립되었다는 기록도 있으나 확실하지 않고 최초로 국학의 제도를 본떠 선현을 제사지내고 유생들을 교육한 서원으로 알려져 있다.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이 풍기지방의 교화를 위해 이곳 출신의 유학자인 안향(安珦)을 배향하는 사묘(祠廟)를 설립했다가 1543년(중종 38)에 유생교육을 겸비한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설립한 것이 시초이다. 1544년에는 안축(安軸)과 안보(安補)를 추가배향했다. 주세붕은 서원에 자주 와 유생과 더불어 토론을 벌이는 등 정성을 기울였고, 그 결과 서원의 유생들이 4~5년 만에 과거에 급제하여 사람들이 '입원자편급제'(入院者便及第)라고 부를 정도였다. 이후 1546년(명종 1) 경상도관찰사로 부임한 안현(安玹)은 유생의 정원(10명), 공양절차(供養節次), 서원재정, 경리관계를 규정한 '사문입의'(斯文立義)를 만들어 서원의 경제적 기반을 확충하고 운영방책을 보완하는 데 주력했다. 백운동서원은 약 30결의 토지 및 18명의 노비, 4명의 원직(院直) 등을 소유함으로써 경제적 기반을 마련했다. 이 시기에는 서원이 사묘의 부속적인 존재로서 유생의 독서를 위한 건물로 생각되었으며, 과거공부 위주의 학교로 인식되고 있었다. 그후 이황(李滉)에 의해 과거를 위한 독서보다는 수기(修己)·강명도학(講明道學) 위주로 변했다. 특히 그는 1548년 풍기군수로 부임한 뒤 을사사화로 고초를 겪은 다음 관료로서 군주를 보필하고 경륜을 펴기보다는 학문의 연구와 교화, 특히 후진의 양성을 통해 학파를 형성함으로써 향촌사회를 교화하고 나아가 장래의 정치를 지치(至治)로 이끌 인재를 확보하겠다는 생각에서 지방유생의 강학(講學)과 교화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당시의 붕괴된 교학(敎學)을 진흥하고 사풍(士風)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서원의 보급이 시급하다고 주장하면서 백운동서원에 대해서 송나라의 예에 따라 사액(賜額)과 국가의 지원을 요청했다. 이에 따라 1550년에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현판과 사서오경과 〈성리대전 性理大全〉 등의 서적을 하사받았다. 이는 서원이 국가의 공인하에 발전하고 보급되는 계기가 되었다. 소수서원이 사액을 받고 국가에서 인정한 사학으로서의 위치가 확고해지면서 풍기지역 사림의 집결소이자 향촌의 중심기구로 위치를 굳혔다. 1633년(인조 11)에 주세붕을 추가배향했으며, 1868년(고종 5) 대원군이 서원을 철폐할 때에도 존속한 47개 서원 중의 하나였다. 서원 내에는 보물 제59호인 숙수사지당간지주(宿水寺址幢竿支柱), 국보 제111호인 회헌영정(晦軒影幀), 보물 제485호인 대성지성문선왕전좌도(大成至聖文宣王殿座圖), 보물 제717호인 주세붕영정(周世鵬影幀)이 있으며 서장각에는 141종 563책의 장서가 있다.    <백과사전>

 

 

숙주사 지 당간지주(보물 제 59호) 

소수서원의 자리는 원래 숙수사라는 절터였다.

억불숭유 정책에 따라 불교의 힘이 축소되고 유교의 세력이 커지던 조선 시대에는 이렇듯 절터가

서원터로 바뀐 적이 있었다.

 

 

영귀봉

서원을 애워싸듯 평지 돌출형으로 흡사 신령한 거북이가 알을 품듯 앉아있는 언덕

 

 

경(敬)자바위

백운동은 주세봉선생이 서원을 창건할 때 중국의 백운동서원을 참고하여  붙인 이름으로 이황선생이 각자한 후

흰 칠을 하였다.

'경'은 유교의 근본사상인 '경천애인'의 머리글자이다. 문헌에 의하면 주세봉선생이 조선 세조 3년 단종복이운동 실폐로

희생된 원혼을 달래기 위해 각자 후 붉은 칠을 하고 위혼제를 드렸다고 한다.

 

 

취한대

이 누대는 원생들이 시를 짓고, 학문을 토론하던 곳으로 명종 5년 풍기군수 이황이 세웠다.

취한이란, 푸른 솔과 맑은 내 등 자연경관에 도취되어 호연지기를 기른다란 의미

 

 

경렴정

이 건물은 원생들이 시를 짓고 학문을 토론하던 정자로 중종 38년(1543) 주세붕선생이 건립했다.

정자명은 북송의 철학자 염계 주돈을 경모하는 뜻에서 그의 자호를 따왔다.

정자안의 초서 현판은 퇴계 이황선생의 제자 고산 황기로의 글씨이다.

 

 

소혼대

유생들이 공부하며 머리를 식히던  자리로서,"암연소혼자 유별이이의" 이라는 이별을 노래한 옛시 별부에서

따온 이름이다.

 

강학당(보불 제1408호)

이 건물ㅇ느 원생들이 배움을 익히고 닦는 강당으로 중종 37년(1543) 주세붕선생이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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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수서원에는 고려 후기의 학자인 안향의 초상화로서 현존하는 한국의 초상화 가운데 가장 오래된 회헌 영정,

조선의 문신이며 학자였던 주세붕의 상반신을 그린 주세붕영정 등 소중한 자료들을 소장하고 있다.

 

안향 영정. 고려1318년,37cm×29cm, 비단에채색, 국보제111호,

경북 영주 순흥면 내죽리 소수서원소장

 

제사를 지내는 모습과 서원에서 공부하는 모습을 재현

 

 

탁청지

이곳은 겸암 류운용선생이 선조26년(1593) 풍기군수로 있으면서 지락제 담밖에 대를 쌓고, 그 아래 못을 파서

경승을 가꾸었던 곳이다.

못 옆으로는 400년이 넘은 느티나무가 그늘이 되어주고 있으며, 그가 못을 파고 대를 쌓은 기록이

지락제 제액에 전해 오는데 그 이름은 맹자와 초사에서 따 왔다.

 

 소수박물관

 

 

 

 

 

금동미륵반가상(복제품)

국보 제 78호

 

공자. 주자. 안향. 주세붕. 이황의 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