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牛馬처럼 걷는 대구+경북 여행

(경북) 소백산 희방사의 가을

소백산 희방사의 가을

 

일시: 2010. 10.11.월요일

어디: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 수철리 희방사

 

  

기차가 치악산을 넘어 소백 죽령에 이르러 힘이 벅찬지 뿌우웅 기적을 울린다. 하늘로 치솟아 충청도와 경상도의 경계를 이루는

소백산의 등허리와 계곡에는 이젠 울긋불긋 단풍이 들어 곱기도 했다.

 

올 6월 25일 충북 단양 천동계곡을 지나 소백산 정상 비로봉을 올라 일정상 연화봉을 거치지 못하고 경북 풍기 비로사로 하산을

했기에 연화봉과 죽령을 다녀오기 위해 희방사를 들 곳으로 날 곳은 죽령으로 정했다.  

 

08:20

청량리역에서 기차를 탔다. 낯선 곳으로 간다는 것은 조그만 걱정과 그리고 설레임이 있다면 그 떠남의 맛을 내는 것은 

바로 기차를 이용한 떠남일 것이다.

그러면서

차창으로 비춰지는 나이들어가는 내 모습을 돌아보며, 양심의 소리도 듣고, 터벅터벅 마음 비우고 걸으며 가시처럼 걸려있는

버리지 못한 이기를 털어내어 가볍게 가슴을 정리하고,

오름의 힘듬을 알면서 겸손을 배우고, 적막한 산길에서 만난 처음 본 사람과 주고 받는 인사에서 배려도 배워

돌아오는 길은 가벼운 마음과 밝은 모습으로 내일의 여정을 준비하는 것이 

여행의 참 맛이리라.

 

희방사역과 희방사 옛길

  

 

11:10

드디어 기차는 소백산역에 도착했다.

설레이는 마음으로 기차에서 내리는데 나 외엔 아무도 내리지 않는다. 혼자의 내림과 날 혼자 두고 뒤돌아 보지도 않고

무심히 떠나는 기차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초라하고 조그만 소백산역사(희방사역) 를 빠져 나오니 

좌측은 죽령 옛길이고 직진은 희방사 옛길이란다.

 

희방사 옛길을 따라 걷다 찻길이 나오면 버스를 타야겠다는 생각으로 약 10여 분 걸어도 도로는커녕 옛길의 흔적도

잡초에 묻혀 길이 아니다.

후회했다.

기차역 승무원에게 희방사 상업지구까지 가는 버스를 어디서 타는지 물어 버스를 이용할 것을......

지난 7월 이후 무릎 상태가 좋지 않아 걷는 일도 피했는데 약 30분을 아무도 없는 숲길을 걸으니 땀도 나고 힘들다.

걱정이 된다. 산속에서 더구나 월요일이라 산행인도 없을 터인데 다리 상태가 나빠지면 어쩌나 걱정 된다.

그러나 기어서라도 연화봉을 올라 죽령으로 내려가리라.

 

희방사 상업지구  

 

11:40

곱게 단풍이 든 희방사 상업지구에 도착하고 탐방지원센터를 지나 희방폭포를 향했다.

약 20년 전 

안동에 거주하는 지인과 함께 희방폭포와 희방사를 들른 적이 있어 옛 기억을 살리니 옛길은 폭포 우측으로 올라

식당가를 지나 희방사에 올랐는데 지금은 그 길은 폐쇄되었고 폭포를 벗어나 좌측으로 새 길이 생겼다.

그러나 옛친구를 만난 듯 희방폭포를 보니 반갑기 그지없다.

20년 전 지인과 희방폭포에서 

 

 

 

   

아래의 현재 희방폭포

 

 

 

12:40

과연 희방사는 어떤 모습으로 날 맞이할까? 설레이는 마음으로 발길을 희방사를 향해 옮기는데

저만치 숲 속으로 희방사가 보인다.

20년 전에 보았던 희방사는 대웅전도 없었고 조그만 요사채가 있던 볼품없든 절로 개울 건너 지장전과

지장전 옆에 조그만 스님 거처가 있었던 기억이 있는데

지금은 그럴듯한 대웅전과 크고 작은 여러 시설물과 범종각도 들어서 제법 볼만한 절이 되어 있었다. 

감회가 무량하다.

내 흔적이 희방사에는 없어졌을지라도 내 마음에는 늘 자리하고 있는 곳.

이곳에서 간식으로 점심을 대신하고 다음은 연화봉을 오르기 위해 물통에 물을 채웠다.

  

희방사 전경

 

 

 

 

 

경북 유형문화재 제226호 희방사 동종 

 

지장전과 불탑 그리고 범종각

 

  

 

 

 20년전 희방사 지장전과 아래의 현재의 지장전

 

화산대종사의 사리탑과 사리비

 

13:20

내가 언제 다시 이곳에 올 수 있을까? 머무를 수 없기에 또 새로운 곳을 향해 떠나야 한다.

다음은 연화봉이다. 

 

 

 

 

-희방사 소개-

소백산 연화봉(1,383m) 기슭 해발 850m 자리하고 있으며 신라 때인 643년(선덕왕 12) 두운(杜雲) 대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하는데,

창건 이후의 역사도 거의 전하지 않는다.

조선 말기인 1850년(철종 1)에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852년 강월(江月) 대사가 중창하였다. 

 그 뒤 6.25전쟁으로 소백산 지역이 치열한 각축장이 되면서 1951년 1월 13일에 4개의 전각과 당우가 모두 불타고 말았다. 이 과정에서 절에 소장하고 있던 『월인석보』 권1·권2의 목판이 사라졌다. 월인석보는 석가세존의 일대기를 엮은 <석보상절>과 세종이 석보상절을 보고 석가세존의 공덕을 찬송하여 노래로 지은 <월인천강지곡>을 합친 책으로 세조5년에 편찬된 한글 불교대장경. 월인석보 판목은 한국전쟁의 화마에 대웅전과 함께 재가 되고 말았다고 하니 아쉬움이 남는다.

다행히 법당에 모셨던 석가불상만은 화마를 피해 지금까지 남아 있다. 지금의 가람은 1954년 안대근(安大根) 스님이 새롭게 중창한 것이다.

많은 문화재는 소실되어 없지만 유일하게 동종이 남아 있는데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26호로 지정되어 있다.

 

희방사 창건 설화

“두운 대사는 태백산 심원암(深源庵)에서 소백산 연화봉 아래로 와서 동굴을 집 삼아 수행에 전념하고 있었다. 어느 겨울밤 갑자기 호랑이가 굴 안으로 뛰어 들어와 고개를 흔들며 고통을 호소하였다. 대사가 가만히 살펴보니 목에 비녀가 꽂혀 있었다. 불쌍히 여겨 비녀를 뽑아 주었다. 이런 일이 있은 며칠 뒤, 굴 앞에 인기척이 있어 나가보니, 웬 여인이 호랑이 옆에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 정성껏 보살피니 곧 정신이 들었다. 사연을 들으니 여인은 호장(戶長) 유석(留石)이라는 사람의 무남독녀로서 혼인을 치르고 신방에 들었는데 별안간 눈앞에 불이 번쩍한 뒤로 의식을 잃었다고 하였다. 영물인 호랑이가 지난번 자기를 살려준 데 대한 은혜를 이렇게 갚고자 했던 것이다. 때는 한겨울이라 깊은 산중이 눈에 덮여 길조차 막혀 있었다. 여인을 귀가시키려면 겨울이 지나야만 했다. 대사는 동굴 안에 싸리나무로 울타리를 치고 함께 겨울을 지낸 뒤 여인을 집까지 데려다 주었다. 여인의 아버지는 실종된 딸이 멀쩡히 살아 돌아오자, 기뻐하면서 대사의 은혜를 갚고자 동굴 앞에 전각을 짓고 농토를 희사하였다. 또한 계곡에 무쇠로 다리를 놓아 대사의 수행에 불편함이 없도록 배려해 주었다. 오늘날 절이 위치한 행정구역인 수철리(水鐵里)는 곧 이 다리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희방사라는 절 이름은 은혜를 갚게 되어 기쁘다는 뜻의 ‘희’와 두운 대사의 참선방이라는 의미의 ‘방’을 합친 것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