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여행-국립경주박물관, 첨성대, 대릉원.계림등 시내 관광
국보 제195호
토우장식장경호는 몸체가 둥글고 입 부분이 약간 벌어져 세워진 원저장경호(圓底長頸壺)로 목 부분에는 3줄, 몸체에는 2줄의 두드러진 띠를 돌리고, 같은 간격으로 밀집 사선을 그어 구획하였으며, 그 구획 안에 원권점문(圓圈點紋)을 찍어 장식하였다.
목과 어깨 부분에는 거북이ㆍ새ㆍ개구리ㆍ악기를 타는 사람ㆍ성교를 하고 있는 모습 등의 토우(土偶)를 부착시켰다.
회청색(灰靑色)의 경질도기(硬質陶器)로, 경주시 황남동 미추왕릉지구(味鄒王陵地區)의 계림로 16지구 30호분에서 파손된 채로 출토한 것을 수리하였으며 결손된 부분도 있다.
이처럼 임신한 여자가 가야금을 연주하는 모습과 성교를 하고 있는 남녀의 모습, 그리고 뱀이 개구리를 물고 있는 모습들은 출산이나 풍요, 그리고 벽사(辟邪)를 기원하는 뜻을 담은 것으로 보인다.
수많은 토우가 부착되어 있는 장경호는 드물며, 고분 출토의 확실한 예로서 고대 신라인들의 정신세계를 엿보게 하는 작품이다. 신라 5∼6세기에 의식용의 기명(器皿)으로 제작된 작품이다
국보 제275호 기마인물형토기
삼국시대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되는 말을 타고 있는 사람의 모습을 한 높이 23.2㎝, 폭 14.7㎝, 밑 지름 9.2㎝의 인물형 토기이다.
나팔모양의 받침 위에 직사각형의 편평한 판을 설치하고, 그 위에 말을 탄 무사를 올려 놓았다.
받침은 가야의 굽다리 접시(고배)와 동일한 형태로, 두 줄로 구멍이 뚫려 있다.
받침의 4모서리에는 손으로 빚어 깎아낸 말 다리가 있다.
말 몸에는 갑옷을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하였고, 말갈기는 직선으로 다듬어져 있다.
말 등에는 갑옷을 입고 무기를 잡고 있는 무사를 앉혀 놓았다.
무사는 머리에 투구를 쓰고 오른손에는 창을, 왼손에는 방패를 들고 있는데 표면에 무늬가 채워져 있다.
특히 아직까지 실물이 전하지 않는 방패를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어 주목된다.
무사의 등 뒤쪽에는 쌍 뿔모양의 잔을 세워놓았다.
이 기마인물형토기는 가야의 말갖춤(마구)과 무기의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이차돈 순교공양비
높이가 1m정도, 각 면의 너비가 약 30cm쯤 되는 입석물이다. 모두 육면으로, 한 면에는 그의 순교 장면이 얕은 부조로 새겨져있고, 나머지 면에는 명문이 있는 듯 하나 마모가 심해 알아 볼 수없게 되어있다. 비의 밑 부분에는 별도 다른 돌로 만든 받침돌이 있고, 허리를 약간 굽혀 손을 맞잡고 있는 사람이 이차돈인 것 같다. 삼국유사에서 보듯, 그의 목을 베니 갑자기 하늘이 캄캄해지며 흰 피가 한 장이나 솟아오르고, 핏줄기 주변에는 꽃비가 내리면서, 천지가 진동하는 것처럼 땅이 흔들거렸다는 당시의 모습을 새겨놓은 것 같다.
원래 이차돈의 이름은 박염촉, 또는 박염도 라고 전한다. 22대 지증왕때에 태어났으며 나이 스물두 살에 하급벼슬인 내사사인 (왕의 뒷바라지를 하는 사람)으로 궁궐 내에서 일을 하게 됨에, 어전에서 일어나는 일에 민감했다. 법흥왕은 불교를 국교로 삼아 호국불교차원에서 왕권강화와 국토확장에 증폭제로 삼으려고 했다. 그러나 당시는 무속신앙이 만연되어 있던 터라 귀족, 신하들이 서역에서 들어온 사악한 종교라 해서 반대하던 시기다. 염촉은 불교를 융성시키기 위해 자기 한목숨 내놓겠다고 왕에게 굳게 약속한다. 왕은 염촉과 미리 계책을 짜놓고, 그가 왕명을 거역하고 마음대로 흥륜사 불사 공사를 지연시키고 있다는 죄목으로 그를 사형토록 명한다. 많은 군신과 귀족들이 모인자리에서 ‘제가 죽으면 신기한 일이 일어날 것이고, 모든 사람들이 왕의 말씀을 잘들을 것이다’라는 말을 남기자, 그의 목은 달아났다. 예언대로 이런 기이하고 신령스런 일이 벌어지자 백관, 귀족들은 불력에 놀란 나머지, 왕에게 굴복하게 되고 불교를 국교로 정하면서 백성들 사이에 급속도로 번져나갔다. 이 비는 1914년 백률사에서 발견되었는데, 순교 장면이 하늘을 보고 비스듬히 누어있었다고 한다.
그가 순교한지 약290년 후인 제41대 헌덕왕때(817)에 가서야 혜륭, 효원같은 대승들이 주축이 되어 이 비를 세우고, 무덤도 고쳐 쌓았다고 한다. 삼국유사를 집필한 일연스님이 이차돈을 위해 지은 시 한 수가 있다.
대의 위한 희생만도 놀라운 일이거든
하늘 꽃과 흰 젖 피 더욱 깊이 사무치네.
칼날이 한번 번쩍 그 몸이 죽으시매
절마다 쇠북소리 서라벌을 진동하네.
이 종 기(신라문화유산해설사)
국립경주박물관 내 안압지관에 전시된 안압지에서 발견된 목선
국보 제29호 성덕대왕신종=봉덕사의 종=에밀레종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가장 큰 종으로 높이 3.75m, 입지름 2.27m, 두께 11∼25㎝이며, 무게는 1997년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정밀실측한 결과 18.9톤으로 확인되었다.
신라 경덕왕이 아버지인 성덕왕의 공덕을 널리 알리기 위해 종을 만들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 뒤를 이어 혜공왕이 771년에 완성하여 성덕대왕신종이라고 불렀다.
이 종은 처음에 봉덕사에 달았다고 해서 봉덕사종이라고도 하며, 아기를 시주하여 넣었다는 전설로 아기의 울음소리를 본따 에밀레종이라고도 한다.
종의 맨 위에는 소리의 울림을 도와주는 음통(音筒)이 있는데, 이것은 우리나라 동종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독특한 구조이다. 종을 매다는 고리 역할을 하는 용뉴는 용머리 모양으로 조각되어 있다.
종 몸체에는 상하에 넓은 띠를 둘러 그 안에 꽃무늬를 새겨 넣었고, 종의 어깨 밑으로는 4곳에 연꽃 모양으로 돌출된 9개의 유두를 사각형의 유곽이 둘러싸고 있다.
유곽 아래로 2쌍의 비천상이 있고, 그 사이에는 종을 치는 부분인 당좌가 연꽃 모양으로 마련되어 있으며, 몸체 2곳에는 종에 대한 내력이 새겨져 있다.
특히 종 입구 부분이 마름모의 모서리처럼 특이한 형태를 하고 있어 이 종의 특징이 되고있다.
안압지 안내도
대릉원
경주시 황남동 일대에 있는 고분군으로 2000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이곳에는 다양한 크기와 형태의 신라 고분들이 보존되어 있다. 일부는 독무덤(옹관묘) 등 다양한 형식의 무덤이 섞여 있어 신라 무덤 양식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금광총, 서봉총, 금령총, 천마총, 항남대총이 이곳에 있는데 당시 신라의 경제적 풍요를 엿볼 수 있는 다양한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미추왕릉, 내물왕릉, 호우총 또한 이 고분군에 포함되어 있으며, 신라 역대 왕릉 중 그 소재의 기록이 없는 18대 실성왕, 19대 눌지왕, 20대 자비왕, 21대 소지왕, 22대 지증왕에 이르는 5대 120년간의 김씨 왕족 무덤들도 이곳에 있을 것이라 추측되고 있다. 이는 바로 전 세대의 왕인 내물왕릉이 있고 호우총에서 실성왕 14년 을묘의 기록이 있는 호우가 출토되었으며, 그 외에도 이 영역 내에서 출토된 여러 유물들의 시대가 위 5왕의 시대와 합치되기 때문이다. 한편 현 내물왕릉은 다른 왕릉들에 비해 크기가 작아 황남대총의 두 봉분 중 하나가 아닐까 하는 견해도 있다.
천마총
미추왕릉
신라 제17대 내물왕릉
국보 제31호 첨성대
천체의 움직임을 관찰하던 신라시대의 천문관측대로, 받침대 역할을 하는 기단부(基壇部)위에 술병 모양의 원통부(圓筒部)를 올리고 맨 위에 정(井)자형의 정상부(頂上部)를 얹은 모습이다. 내물왕릉과 가깝게 자리잡고 있으며, 높이는 9.17m이다.
원통부는 부채꼴 모양의 돌로 27단을 쌓아 올렸으며, 매끄럽게 잘 다듬어진 외부에 비해 내부는 돌의 뒷뿌리가 삐죽삐죽 나와 벽면이 고르지 않다. 남동쪽으로 난 창을 중심으로 아래쪽은 막돌로 채워져 있고 위쪽은 정상까지 뚫려서 속이 비어 있다. 동쪽 절반이 판돌로 막혀있는 정상부는 정(井)자 모양으로 맞물린 길다란 석재의 끝이 바깥까지 뚫고 나와있다. 이런 모습은 19∼20단, 25∼26단에서도 발견되는데 내부에서 사다리를 걸치기에 적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옛 기록에 의하면, “사람이 가운데로 해서 올라가게 되어있다”라고 하였는데, 바깥쪽에 사다리를 놓고 창을 통해 안으로 들어간 후 사다리를 이용해 꼭대기까지 올라가 하늘을 관찰했던 것으로 보인다.
천문학은 하늘의 움직임에 따라 농사 시기를 결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농업과 깊은 관계가 있으며, 관측 결과에 따라 국가의 길흉을 점치던 점성술(占星術)이 고대국가에서 중요시되었던 점으로 미루어 보면 정치와도 관련이 깊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일찍부터 국가의 큰 관심사가 되었으며, 이는 첨성대 건립의 좋은 배경이 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신라 선덕여왕(재위 632∼647) 때 건립된 것으로 추측되며 현재 동북쪽으로 약간 기울어져 있긴 하나 거의 원형을 간직하고 있다.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로 그 가치가 높으며, 당시의 높은 과학 수준을 보여주는 귀중한 문화재라 할 수 있다.
계림(鷄林)
사적 제19호. 원래 시림(始林)이라 하여 신라초부터 있던 숲으로 경역(境域)은 약 7,300㎡이며 느티나무·물푸레나무·싸리나무 등의 고목이 무성하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 제4대 탈해왕(脫解王) 9년 3월 밤, 왕이 금성(金城:지금의 경주)의 서쪽 시림 가운데에서 닭 우는 소리를 듣고 신하에게 살펴보게 했다. 신하가 가보니 금궤 하나가 나뭇가지에 달려 있고, 흰 닭이 그 밑에서 울고 있었다. 신하가 돌아와 이 사실을 알리자 왕은 날이 밝는 대로 그 궤짝을 가져오게 해 열어보니 속에 총명하게 생긴 어린 사내아이가 있었다. 왕은 이를 기뻐하며 아이 이름을 알지(閼智)라 부르고, 금궤짝에서 나왔으므로 성을 김씨(金氏)라고 했다. 이때부터 시림을 계림으로 바꾸고, 나라 이름도 계림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삼국유사〉 신라 시조 혁거세왕조(條)에 보면, 왕은 계정(鷄井)에서 태어났고 왕비 알영은 계룡(鷄龍)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에 계림국(鷄林國)이라 나라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그러나 계림의 계(鷄)를 '새'로 읽어 계림은 '새벌'의 다른 표기에 불과하다는 설이 유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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