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牛馬처럼 걷는 대구+경북 여행

(경북) 경주여행-불국사(佛國寺)

아내와 1박2일 경주 여행

 

언제 : 2009.11.14~15.

누구 : 아내

어디 : 경주 불국사 석굴암 그리고 시내

 

불국사(佛國寺)

 

 

 

불국사 소개

 

불국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11교구 본사이며, 1995년 12월에 석굴암과 함께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이다.

 

불국사의 창건에 관한 기록으로 가장 오래된《불국사고금창기(佛國寺古今創記)》에는 서기 528년(신라 법흥왕 15) 법흥왕의 어머니 영제부인(迎帝夫人)의 발원(發願)으로 불국사를 창건하여 574년 진흥왕(眞興王)의 어머니인 지소부인(只召夫人)이 절을 크게 중건하면서 비로자나부처님(毘盧遮那佛)과 아미타부처님(阿彌陀佛)을 주조해 봉안했고, 670년(문무왕 10)에는 무설전(無說殿)을 새로 지어 《화엄경(華嚴經)》을 강설(講說)하였으며, 그 후 751년(경덕왕 10)에 김대성(金大城)에 의하여 크게 개수되면서 탑과 석교 등도 만들었다고 하였다.

 

다른 기록인, 《불국사 사적(事蹟)》에는 이보다 앞선 눌지왕(訥祗王) 때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창건하였고 경덕왕 때 재상(宰相) 김대성에 의하여 크게 3창(祠)되었다 했다. 처음에는 소규모로 창립되었던 불국사가 경덕왕 때의 재상 김대성에 의하여 대대적으로 확장된 것으로 보인다.

《삼국유사(三國遺事)》 권5 <대성효 2세부모(大城孝二世父母)>조에는 경덕왕 10년 김대성이 전세(前世)의 부모를 위하여 석굴암을, 현세(現世)의 부모를 위하여 불국사를 창건하였다고 하였으며, 김대성이 이 공사를 착공하여 완공을 하지 못하고 사망하자 국가에 의하여 완성을 보았으니 30여 년의 세월이 걸렸다고 한다. 당시의 건물들은 대웅전 25칸, 다보탑 ·석가탑 ·청운교(靑雲橋) ·백운교(白雲橋), 극락전 12칸, 무설전(無說殿) 32칸, 비로전(毘盧殿) 18칸 등을 비롯하여 무려 80여 종의 건물(약 2,000칸)이 있었던 장대한 가람의 모습이었다고 전한다.

 

전해오는 가장 오래된 기록인 고금창기(불국사 창건에 관한 최고의 기록)는 문헌적인 근거가 약해 불국사가 일정 기간에 창건되기 보다는 긴 세월동안 여러세력들에 의해 점차적으로 완성되었다고 보는견해가 오늘날의 일반적 견해이다.

 

이러한 불국사의 거대가람으로서의 위용은 1593년 5월 의병과 승군의 활동으로 많은 피해를 입고 복수심에 사로잡힌 왜군의 방화와 파괴등으로 큰 피해를 입어 2,000여 칸의 대가람이 전소되는 고난을 겪게 되었다.

이후 전란의 피해가 복구되면서 불국사도 국가의 지원 및 스님과 신도들의 노력에 의해 1604년(선조 37)경부터 복구와 중건이 시작되어 1805년(순조 5)까지 40여 차례에 걸쳐 부분적인 중수(重修)가 이루어졌으며 1805년 비로전 중수를 끝으로 중수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이후 조선 후기 국운(國運)의 쇠퇴와 더불어 사운(寺運)도 쇠퇴하여 많은 건물이 파손되고 도난당하는 비운을 겪게 되었다.

 

일제강점기인 1924년 대규모의 개수공사를 실시하여 다보탑의 해체보수, 법당의 중수 등을 실시하였는데 이때 다보탑 속에 있던 사리장치(舍利藏置)가 행방불명 되었고 공사와중에 유물의 완벽한 복원과 보존에 대한 철저한 검증이 이루어지지 않은 일제의 문화정책의 전시물로서 수난을 겪었다.

 

8 ·15광복 후인 1966년 석가탑의 해체복원 등 부분적 보수가 있었다가 1969년 불국사 복원위원회가 구성되고 1970년 2월 공사에 착수, 1973년 6월 대역사(大役事)를 끝마쳤다. 이 공사로 주춧돌과 빈터만 남아 있던 무설전 · 관음전 · 비로전 · 경루(經樓) · 회랑(廻廊) 등이 복원되었고, 대웅전 · 극락전 · 범영루(泛影樓) · 자하문(紫霞門) 등이 새롭게 단장되었다.

 

 

  

불국사 일주문

 

해탈교 

사천왕문

반야교 

안양문 아래 석축에 졸고 있는 다람쥐 

 

안양문-연화교와 칠보교(앞), 범영루(중), 자하문-청운교와 백운교(뒤)

 

안양문과 연화교와 칠보교 

 

 

자하문과 백운교와 청운교

청운교靑雲橋. 백운교白雲橋

청운교. 백운교는 국보 제23호인 석조물이다.
위로는 자하문으로 연결되어 석가모니 부처님이 모셔진 대웅전으로 통한다.
이 계단은 2단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아래에 있는 것은 청운교로 길이 6.3m에 17계단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위에 있는 것은 백운교로 길이 5.4m에 16계단으로 되어 있다.
청운교의 아래 부분은 무지개 모습의 홍예문으로 장식되어 있다.
이들 계단은 부처님이 계신 도리천을 의미하며, 33이라는 숫자는 욕계 제2천인 33천을 상징하는 것이라 한다.

 

좌경루 

범영루 

대웅전 

대웅전 불상 

 

국보 제21호 석가탑

 

일명 무영탑(無影塔)이라 하며 백제 석공 아사달과 아사녀의 사랑 얘기의 전설이 있는
석가탑은 국보 제21호로 지정된 삼국시대의 석탑으로 불국사 대웅전 앞의 다른 석탑인 다보탑과는

달리 당시의 전통적인 석탑양식을 취하고 있다.

 

탑의 원래 이름은 ‘석가여래상주설법탑(釋迦如來常住設法塔)’으로, ‘석가탑’이라고 줄여서 부른다.

석가모니 부처님과 부처님의 교화를 상징하는 탑으로 높이는 8m 20㎝이고 751년에 세워졌다.
 또한 석가탑은 이전에 세워진 감은사지 삼층석탑의 형태를 이어받은 우리나라 3층 석탑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탑의 주위에 배치되어 있는 여덟 개의 연꽃과 회랑은 이 곳이 성역임을 나타낸다.

탑 안에서 발견된 세계 최초의 목판 인쇄물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 등 70 여점의 문화재는 일괄해서
국보 제 126호로 지정되어 있다.

 

국보 제20호 다보탑(多寶塔)

다보탑은 국보 제20호로 지정된 통일신라시대의 대표적인 석탑이며 석가모니 부처님의 설법을 찬탄하는 다보 부처님을 상징하는 탑이다.
‘과거의 부처님’ 인 다보부처님이 ‘현재의 부처님’인 석가모니 부처님께 설법할 때 옆에서 옳다고 증명한다는『법화경』의 내용을 눈으로 직접 볼 수 있게 석가탑 옆에 세웠다고 한다.

높이 10m 40㎝로 대웅전에 석가탑과 나란히 서 있다. 건축 연도는751년로 알려져 있고 현재 남아있지 않은 목조건축 양식을 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다보탑은 석가탑과 자주 비교되는데 석가탑이 전형적인 형태라면, 다보탑은 가장 개성적인 형태의 탑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보탑은 현재(2009.11월) 수리中 

 

무설전(無說殿) 

기록에 의하면 불국사 건축물 중 가장 먼저 지어진 건물로 화엄경을 강의하던 강당(講堂).

신라 문무왕10년에 왕명으로 세우고 법화경을 강의했다고 한다. 이 기록에 따르면 김대성이 불국사를 창건한 751년보다 약 백년이나 앞서 만들어 졌다고 할 수가 있으며,

이 건물도 임진왜란 후에 다시 세웠으나 1920년 경에 허물어진 것을 1971년 공사 때 또 다시 세운 것이다.

무설전에서 관음전으로 올라가는 계단 

관음전 

 

 

금동비로자나불좌상金銅毘盧舍那佛坐象(국보 제26호)

비로전의 비로자나부처님은 국보 제26호로 지정되었는데,
극락전의 금동아미타불좌상과 국립경주박물관에 있는 백률사 금동약사여래 입상과 함께
통일신라 3대 금동불의 하나로 꼽힌다. 높이 1.77m,머리 높이는 55cm,폭은 1.36m이다.
본래 대웅전에 모셔져 있었지만 일제강점기에 극락전의 아미타부처님과 함께 극락전으로 옮겨졌고,
그 뒤 현재의 비로전 주존불로 안치되었다.
비로자나불은 법신불法身佛이라고 하여 삼신불三身佛사상의 본존으로 여겨진다.
현재 대좌나 광배는 결실되고 불신만 봉안되어 있다.
 

 

비로전 옆에 모셔진 사리탑 

 

나한전 

극락전과 황금 돼지 상 

금동아미타여래좌상金銅阿彌陀如來坐像(국보 제27호)

극락전의 주불인 아미타 부처님은 국보 제27호로 지정된 금동불이다.
높이 180cm, 머리 높이 48cm이며, 무릎 너비는 125cm로 비로전에 모셔져 있는 금동비로자나불좌상에 비해 3cm 가량 크다.
수인은 아미타 부처님께서 취하는 하품중생인(下品中生印)을 하고 있다.
하품중생인(下品中生印)은 비로자나 부처님의 수인과 반대방향으로 취하는 수인이다.

극락전에는 좌우에 협시보살을 두지 않고 주불(主佛)인 아미타 부처님만 모시고 있다. 먼저 극락전에 들어서면 중앙에 모셔져 있는 금동아미타여래좌상 뒤편의 아미타삼존도가 눈에 띈다.

아미타부처님 좌우에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모시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이곳에는 중앙에 아미타부처님을 모시고 좌우에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그린 아미타삼존도를 그렸다 

극락전 현판 뒤에 있는 목조돼지  

알수 없다 왜 극락전 현판 뒤에 돼지상이 조각 되어 숨어 있을까?

 

극락전에서 바라 본 관음전과 비로전 

극락전에서 대웅전으로 올라가는 계단과 인상적인 석축

 

2009년 불국사 마지막 가을의 절정 

 

 

 

 

범종각 

 

요사채 

 

 

보물  제1523호 불국사 석조(石槽)와 당간지주(幢竿支柱)

불국사 당간지주는 거대사찰에 비해 참으로 왜소한 느낌이며, 다른 사찰에서 거의 볼 수 없었던

2쌍의 당간지주의 의미는 무엇일까? (게양대 역할)

 

 

 

 

 

- 여행후기 - 

 

조금은 늦었지만 2009년 아내를 위한 가을여행으로 11월14, 15일(토,일)

1박2일 여정으로 경주를 다녀왔다.

개인적으로는 약 28년만의 경주 방문이다.

 

11월14일 

15:00 인천 출발

22:00 경주 도착

터미널 근처의 모든 모텔의 숙박료가 팔만 원.

주말에다 관광지라지만 너무 비싸나 시설은 호텔 수준.

 

11월15일

서둘러 불국사 도착 근처 식당에서 식사

09:00 불국사 앞에서 버스로 토함산 올라 석굴암을 보고 걸어서 불국사까지 약 40분 걸려 하산.

낙엽 그리고 아직 남아있는 마지막 단풍

가을 만끽 

11:00 불국사 입장

14:00 시내로 이동

소갈비살 점심 소주 한 잔.

대릉원과 첨성대 안압지 경주 박물관을 서둘러 둘러본 후 저녁에 아들과 딸들에게 선물할 경주빵과 황남빵을 1시간이나 기다려 구입.

17:40 경주 출발 천안 못미쳐 정체 심각

11월16일

00:30 귀가.

 

경주를 1박2일로 둘러본다는 것은 무리였으나 되도록 많은 곳을 아내에게 보여주고 싶어 

시내 대릉원과 안압지 그리고 박물관등은 스치는 정도여서 약간의 여운이 남는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발가락도 아프고 종아리가 뻑뻑하다고 아내는 말했지만

이번  여행이 마지막 가을 여행으로 너무 감동적이며 좋았다고 내게 감사 하단다.

아내가 좋으면

나도 좋은 것......

 

다음에는

공주를 아내와 함께 둘러 볼 예정이다.

 

불국사는 신라인이 염원한 이상의 불국토(佛國土)를 3갈래로 구현한 것으로 〈법화경 法華經〉에 근거한 석가의 사바세계는 대웅전으로, 〈무량수경 無量壽經〉에 근거한 아미타불의 극락세계는 극락전으로, 〈법화경〉에 근거한 비로자나불의 연화장 세계는 비로전으로 대표된다. 즉 불국사의 경내는 석단(石壇)에 의하여 단상(壇上)의 불국토와 단하(壇下)의 속계(俗界)로 양분된다. 크고 작은 돌을 빈틈없이 쌓아올려 만든 석단 위에 청운교(靑雲橋)·백운교(白雲橋), 칠보교(七寶橋)·연화교(蓮花橋)라는 2쌍의 다리를 놓았다. 청운교·백운교는 자하문(紫霞門)을 거쳐 석가모니의 사바 세계인 대웅전으로 오르게 되어 있다. 대웅전 앞에 있는 3층석탑과 다보탑(多寶塔)은 서로 마주 서 있는 쌍탑구조이며, 뒤편으로는 경론(經論)을 강술하는 무설전(無說殿)을 두고 대웅전 일곽을 동·서 행랑으로 에워싸고 있다. 연화교와 칠보교를 올라 안양문(安養門)을 지나면 극락전에 이르게 되며 그 안에 금동아미타불좌상을 안치했다. 무설전 뒤에는 관음전이 있고, 그 서편에는 금동비로자나불좌상을 봉안한 비로전이 있다. 이외에도 토함산 일대에는 몽성암(夢成庵)과 보덕굴(普德窟)을 비롯하여 불국사 부속암자들이 다수 있다. 칠보교 아래에는 2쌍의 당간지주와 석조(石槽)가 있고, 5기의 부도가 남아 있다. 

 

불국사의 옛 모습

 

1909년경 정면에서 바라본 대웅전의 모습. 불국사는 1592년 임진왜란 때에 목조 건물이 모두

불타고,
1604년부터 150년간에 걸쳐 조금씩 복고와 중수가 계속되었지만 조선 말기에 이르서서는 퇴락의 길을 걸었다.
1923년경부터 일본인들에 의하여 여러 차례 정비가 되었다. 일제 초기의 대웅전의 모습을 보는 마음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당시 대웅전의 문짝은 지금과는 다른 모습이다.




1924년경 대웅전 수리 광경으로서 북서쪽에서 본 모습.
지붕과 마당에 잡초가 무성하고, 보수를 위해 기대어 놓은 사다리가 보인다.


1922년경 일제가 석축 등을 복원한 당시의 전경.

당시에도 좌경루는 복원되지 않았다.


1919년의 불국사 전경.

청운교, 백운교의 허물어져 있는 모습이 생생하다.


1919년의 불국사 전경.

자하문의 지붕은 허물어지고, 청운교, 백운교는 겨우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모습이다.


동쪽에서 바라본 1914년의 불국사 전경.

오른쪽에 다보탑이 보인다.


서쪽에서 바라본 1914년의 불국사 전경.

석축은 몹시 허물어진 상태이고, 석단 앞에는 밭을 일군 모습이 보인다.


1919년의 불국사.

맨 뒤로 보이는 것이 극락전이고 그 왼쪽이 요사채이다.

앞쪽은 칠보교, 연화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