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牛馬처럼 걷는 경기 여행

(경기 수원) 사적 제115호 정조의 어진을 모신 화령전(華寧殿)

정조의 어진을 모신 화령전(華寧殿)
 사적  제115호 



 

어디 :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신풍동 92-2 

 

사적 제115호 화령전(華寧殿)

 1801년(순조원년) 정조대왕의 뜻을 받들어 화성행궁 옆에 세운 건물로 정조의 초상화를 모셔놓은 영전(影殿)입니다.

영전은 보통 제사를 지내기 위해 신위를 모신 사당과는 구별되는 건물로,

선왕의 초상화를 모셔놓고 살아있을 때와 같이 추모하던 곳입니다.

화성에서 '화'자와 「시경」의 '돌아가 부모에게 문안하리라〔歸寧父母〕라는 구절에서 '령'자를 따서 이름붙인 것으로

정조대왕의 뜻을 받들어 검소하면서도 품격있게 만든 조선시대의 대표적 영전입니다.

 

 

하마비 

 

 

외삼문 

순조는 평소 살아있는 정조를 대하 듯 한 곳이 바로 운한각이기 때문에

이 곳 운한각에서 길 밖으로 지나는 백성들을 바라볼 수 있도록 외삼문의 위를 살창으로 꾸민 것이랍니다.
 

 

내삼문

 

 

운한각(雲漢閣)과 이안청

 

화령전의 정전으로 정조의 초상화를 봉안한 건물로, 운한은 임금이 가뭄을 걱정하여 하늘에 기우제를

올릴 때 불러 졌다는 "시경"의 詩구에서 따왔으며, 앞에는 제사 때 악공들이 음악을 연주할 수 있는 월대(月臺 : 섬돌)가 있고,

세 개의 계단이 놓여 있는데

가운데 계단은 혼백만이 사용하는 계단으로, 옆 받침돌인 우석(隅石)에는 천계(天界)를 상징하는 구름 모양이 새겨져 있으며

1801년에 만들어진 조선후기의 가장 대표적인 건물이랍니다.

 

이안청은 운한각과 복도로 연결된 건물로 홍수나 화재등이 일어났을 때 어진을 피난시켰던 곳입니다.

 

 

왕의 모습을 지칭하는 어진은

 숙종 39년인 1713년 숙종어진을 그릴 당시 ‘어용도사도감도제조(御容圖寫都監都提調)’였던 것을

이이명(李頤命)의 건의로 ‘어진’이라 했는데, 이 이후에 어진이라고 일컫는답니다.

 

 

정조의 어진은 즉위년과 즉위 5년, 즉위 15년에도 어진 제작이 이어졌지만,

 현존하는 정조의 어진은 선원보에 있는 간단한 스케치 말고는 남아있지 않고 현재의 어진은 최근에 새로 그렸는데,

할아버지인 영조와 닮았다고 하여 경복궁에 남아있는 영조의 어진과 흡사하게 그렸다고 합니다. 

 

어진 제작은 모두 세 종류로 도사(圖寫)와 추사(追寫) 그리고 모사(模寫)가 있으며,

도사란 군왕이 생존해 있을 때 그 수용을 바라보면서 그린 것을 말하고, 추사란 왕이 승하한 뒤에 그 수용을 그리는 경우이며

모사란 이미 그린 어진이 훼손됐거나, 새로운 진전에 봉안하게 될 때 원본을 범본으로 해 새로 그린 것을 말합니다.

 

 

신연(神輦)

'신연'이란 국왕의 장례시에 신백(神帛)을 모시고 가는 수레로 화령전의 신연은 사도세자가 묻혀계신 현륭원 제실에

봉안되었던 정조의 어진을 이곳으로 옮겨오기 위해 특별히 제작된 연이랍니다.

일제강점기에 사라진 신연을 고증을 통해 2008년 복원하여 원래의 위치에 설치하였습니다.

 

 

운한각에서 이안청으로 연결되는 복도

 

 

월대가 넓은 이유

 아버지 정조대왕의 효심을 어려서부터 보아 온 순조임금은, 운한각을 정조가 살아계신 처소 처럼 꾸며 놓았으며,

 평소 백성들을 생각한 정조가 달을 보고 거닐 것을 생각해, 제사 지낼 때 악사들이 앉는 월대를 넓게 꾸몄답니다.

 

 

정면의 문 위에는 발을 늘일 수 있는 시설을 만들어 놓았고,

 현재 문 위에 있는 발은 운한각 조성 당시 것이니, 이미 200년이란 세월이 지난 것입니다.
 

 운한각의 정면 기둥 위를 가로지른 부분에는 도르래가 달려있는데, 이것은 제를 지낼 때 차일을 치기위한 것으로

그만큼 이 운한각은 하나하나 세심한 신경을 써서 지은 전각입니다. 측면으로 돌아가면 바닥이 눅눅치 않게 환기를 시키는 통풍구가 있고,

운한각의 뒷벽은 벽돌담으로 조성을 해 멋을 더했습니다.

 

아궁이를 만들어 살아 계실 때 처럼 불을 지펴

 겨울철에도 따듯한 곳에서 쉬시라는 의미도 있지만, 이 아궁이는 장마철에도 운한각이 눅눅하지 않도록 한 것이랍니다.

 

 

제향은 1920년 일본인에 의해 정조의 초상화가 창덕궁으로 옮겨질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풍화당

제실로서 제향이 있을 때 제를 올리는 사람이 미리 와서 머무는 건물로, 풍화는 사회의 풍속과 기강을 교화한다는 의미 

 

 

 

 

 

풍화당 밖의 내삼문 뜰의 낙엽

 

 

 

 

 

제정(祭井)

화령전의 제례에 사용될 정화수를 뜨는 우물

 

 

화성행궁과 화령전 사이의 담

 

 

정조대왕상

 

 

현대의 우리는 문명의 발달로 너무 가까운 것만 보며 살아 마음의 눈을 잃고 살지 않을까요?

우리는 먼 곳의 진리, 먼 곳의 꿈은 까맣게 잊고 사는 건 아닐까요?

먼 곳을  보며, 먼 것을 생각하며 보다 여유롭게 우리의 문화재를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요?
우리문화재에는 그것을 조성한 이의 혼이 깃들어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내용을 모르고 돌아보는 화령전은 그저 정조의 어진을 모셔놓은 단순한 전각으로만 보일 뿐이어서

자세한 설명을 올려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