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牛馬처럼 걷는 경기 여행

(경기 수원) 사적 제478호 정조대왕의 얼이 깃든 화성행궁(華城行宮)

정조대왕의 얼이 깃든 화성행궁(華城行宮)

사적 제478호

 

 

어디 : 경기 수원시 팔달구 정조로 825

 

화성행궁은 1789년(정조 13년) 수원 신읍치 건설 후 팔달산 동쪽 기슭에 건립되어

평상시에는 화성유수가 집무하는 수원부 관아와 행궁으로 사용되다가 1794년부터 96년(정조 18년~20년)에 걸쳐 진행된

화성축성 기간에 화성행궁을 확대하여 최종 완성되었습니다.

부친 장헌세자(사도세자)의 원침인 현륭원(현재의 융릉)을 13차례나 찾았던 정조는 참배 기간 내 화성행궁에서 유숙

하였으며 건립 당시는 600여 칸으로 정궁 형태를 이루며 가장 규모가 크고 아름다운 행궁이었으나

일제강점기에 낙남헌을 제외한 시설이 민족문화와 역사말살 정책으로 사라졌다가 

1996년 복원공사가 시작되어 2003년 10월 일반에게 공개 되었습니다.

 

 

화성행궁 입구

 

 

하마비

 

 

팔달산 화성장대에서 본 화성행궁

 

 

 

 

 

 

신풍루(新豊樓)

화성행궁의 정문으로 신풍이란 '국왕의 새로운 고향'이란 뜻이랍니다.

 

 

정조대왕의 친필 화성행궁

우측 상단 : 어필과 홍제, 정조의 어필이며, 붉은 인장인 홍제는 정조의 호

좌측 : 여친위십유8년계축년명춘(내가 왕위를 물려받은지 18년 되는 해 계축년 이른봄), 붉은 색은 규장지보(정조의 인장)

 

 

행궁 뒷산은 팔달산으로 정상에 화성장대(서장대)가 보이네요.

 

 

행궁 뒤 팔달산 정상의 서장대(화성장대)를 당겨 찍었습니다.

 

 

두 번째 문인 좌익문과 세번째 문인 중양문

행궁 정문인 신풍루로 부터 3개의 문을 통과해야 정궁에 닿게 되는군요.

 

 

 화성행궁의 느티나무는 600년 이상된 노거수로 화성 성역 이전부터 수원을 지켜온 신령스런 나무로

영목(靈木), 신목(神木), 규목(槻木)이라고 불려홨으며 예부터 잎이나 가지를 꺾으면 목신(木神)의 노여움을 사 어려움이

닥친다고 하며, 소원지에 소원을 적어 걸면 소원이 이뤄 진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높이는 30m, 둘레 6m에 이르며, 1982년 경기도 보호수 5-3으로 지정되었으나 뜻하지 않은 화재로 훼손되어

2003년 5월 나무살리기 작업을 하여 현재의 위용을 보여주고 있답니다. 

 

 

화성행궁에서 영화 대장금을 촬영했기에 사진 찍는 곳

 

 

봉수당(奉壽堂)

평상시는 화성유수의 집무실이며,

화성행궁의 정당으로 이곳에서 정조는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열었던 곳

 

 

봉수당의 정조 어좌

 

 

정조

 

 

혜경궁 홍씨의 회갑상

 

 

어머니 혜경궁 홍씨에게 회갑 절을 올리는 모습

 

 

혜경궁 홍씨 회갑연

 

 

혜경궁 홍씨 회갑 상차림

 

 

경룡관(景龍館)

장락당으로 들어가는 누문으로 경룡은 제왕을 상징하는 큰 용을 뜻함

 

 

장락당(長樂堂)

화성행궁의 침전으로 정조가 혜경궁 홍씨의 만수무강을 빌며 직접 편액을 써서 걸었음

 

 

상궁의 치장하는 모습

 

 

환관의 복장

 

 

내포사

포사는 성 밖의 위험을 성안에 알리는 역할을 하는 시설물로 화성행궁의 후원 높은 곳에 설치되어 화성행궁 밖에서

알려주는 신호를 받아 깃발을 흔들거나 목어를 쳐서 방어 태세를 갖추도록 하는 곳

 

 ▲

정조대왕 능행 반차도 

 

 

복내당(福內堂)

화성행궁의 내당으로, 평상시에는 화성 유수의가족들이 거처하던 곳

 

 

영화 대장금의 어린시절부터 상궁까지 변천

 

 

유여택(維與宅)

정조대왕이 행차중 잠시 머물며 신하들을 접견하던 곳

 

 

유여택 전경

 

 

뒤주

곡식을 넣어두는 생활용기이나,

정조대왕의 아버지 사도세자가 1672년(영조 38) 윤5월 갇혀 비운의 죽음을 당했던 뒤주를 상징적으로 전시

 

 

봉수당 전경

 

 

노래당(老來堂)

정조대왕이 왕위에서 물러나 수원에서 노후생활을 꿈꾸며 지었다는 곳

 

낙남헌(落南軒)

 경기도 기념물 제65호

일제 강점기 화성행궁 철거 때 유일하게 남은 부속 건물로,

1758년 혜경궁 홓씨 회갑연 기간 중 과거시험과 양로연 등의 여러 행사가 열렸던 곳

 

득중정(得中亭)

낙남헌 우측의 건물로

정조대왕이 화성행궁안에서 활을 쏘신 곳으로 모두 명중시켰다고 하여 득중정이라 했음

 

화성행궁을 돌아보면서 느낀 소감은

서울을 벗어난 인근에서 많은 관광객이 방문하는 곳으로, 평일임에도 외국 관광객이 많았습니다.

화성행궁은

정궁이 아닌 잠시 임금이 머무는 행궁이기에 웅장한 궁궐과 비교하는 것은 무리이며,

모든 건물을 검소하게 지으라는 정조의 명으로 크게 지을 수 없었으며

다만 낙남헌은 궁중 모습으로 지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