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牛馬처럼 걷는 충남 여행

(충남 부여) 사비왕궁터로 추정되는 곳에 부여 동헌(東軒)과 객사(客舍)

 

사비왕궁터로 추정되는 곳에 부여 동헌(東軒)과 객사(客舍)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96호)

 

 

어디 :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관북리

 

부소산성 남쪽 기슭

조선 시대 부여 동헌과 객사 앞 너른 공터는 백제 시대 사비 왕궁터로 추정되는 곳으로

1982~3년 발굴조사 때 백제 시대 연못이 발견되었고, 1992년 발굴조사 때는 건물터, 하수도, 도로, 유적 등이 발굴되어

이 일대가 사비왕궁터일 가능성을 높여 주었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는 이곳에는 관아가 자리 잡고 있었다.

 

 

부여동헌(부여동헌) -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96호 

 

조선시대 부여현의 관아 건물로 동헌. 객사. 내동헌 등이 남아있다. 동헌은 당시 부여현의 공사를 처리하던 곳으로,

고종 6년(1869)에 지었고 1985년에 크게 수리하였다. 동헌은 앞면 5칸 옆면 2칸의 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여덟 팔자 모양인 화려한 팔작지붕집이다.

초연당(超然堂)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으며 제민헌이라고도 한다.

 

 

 

 

 

 

 

 

 

 

 

 

 

 

부여 객사(扶餘 客舍) - 유형문화재 제96호

 

이곳은 조선시대 부여현의 관청으로서 동헌(東軒). 객사(客舍). 내동헌(內東軒)이 보존 되어 있다.

객사는 관청의 손님, 사신이 유숙하던 건물인데 궐패(闕牌)를 안치하고 대궐을 향해 제를 지내던 곳이기도 하였다.

동헌과 같은 해에 다시 지었는데 중앙의 정당(正堂)과 동서 양쪽에 붙은 익실(翼室)로 이뤄졌다.

양쪽 익실의 지붕은 가운데 정당보다 한 단 낮게 만들어진 건물 모양으로 각 실의 위계를 나타내고 있다.

정당은 사람 인자 모양인 맞배지붕집이며 익실은 팔작지붕집으로 정당의 대청에는 궐패를 모셨고

익실에는 온돌방을 들였다.

부풍관이라고도 하며 지금은 백제관(百濟館)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부여 객사 앞의 목백일홍

 

 

부여 객사의 측면과 후면

 

 

 

 

 

부여군 고도 문화 사업소

옛 국립부여박물관 건물이다.

 

 

 

 

 

 

 

 

 

 

 

 

 

 

 

 

 

동성왕 이후 즉위한 무령왕은 선대왕들이 귀족에 의해 살해되는 것을 목격해왔다.

그래서 특히 신구 귀족세력들의 균형유지에 힘썼다. 22담로에 왕족을 파견해 지방에 대한 통제력도 강화했다.

백제를 다시 강국으로 만들며 중흥을 이뤄낸 무령왕, 비로소 백성과 왕실은 안정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이때 백제 문화도 꽃피게 된다.

 

하지만 늘어나는 인구와 좁은 땅, 금강의 범람으로 인한 피해 그리고 왕실의 위신을 회복하기 위해선 새로운 땅이 필요했다.

그래서 무령왕의 아들 성왕은 아버지의 뜻을 따라 사비로 천도를 단행한다.

 

 

 

 

 

 

성왕은 왜 사비를 새 도읍지로 삼고자했던 것일까.

당시 사비는 도읍지로서 불리한 점이 많은 곳이었다. 지반이 낮았으며 수시로 물이 차오르는 습지였기 때문에

아무도 관심 갖지 않는 ‘버려진 땅’. 하지만 토호 세력이 없어 왕권을 강화할 수 있고, 넓은 땅이 펼쳐져 있다는 이점이 있었다.

또 백마강을 휘감아 도는 지형으로 배들의 정박이 자유롭기 때문에 바다를 이용해 더 넓은 세계로 뻗어나갈 수 있었다.

대륙의 끝자락이 아닌 해양의 중심 백제. 무엇보다 사비를 감싸고 있는 백마강은 외부의 침공을 막을 수 있는

자연 해자(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성밖을 둘러 파서 못으로 만든 곳)역할을 했다.

 

 

모든 조건을 갖춘 땅이 어디 있을까. 성왕은 사비의 가능성에 올인했다.

도읍지는커녕 사람이 살기 어려운 치명적인 약점을 가진 땅이었으나 약점을 역으로 이용하거나 보완해 새로운 도성,

계획 신도시를 만들고, 습지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흙을 파내고 주변의 물을 한 곳으로 모으는 인공 저수지를 만들었다.

그 예가 궁의 남쪽에 있다하여 이름 붙은 궁남지다.

 

저수지에 모인 물은 농경수나 홍수를 조절해주었을 것이고, 파낸 흙은 도성을 쌓는데 사용했을 것이다.

또 무른 토양을 다지는 데는 판축공법을 썼는데, 마치 시루떡을 여러 장 쌓아올린 것 같이 서로 다른 흙을 교대로 부으면서

절구 같은 도구로 꾹꾹 다져서 만들었다. 돌보다 강한 흙성을 쌓았던 것이다.

 

 

성왕은 538년 사비천도 이후 왕권강화와 백제중흥을 위해 여러 방면으로 노력했다.

중앙의 16관등제와 22부제, 불교 교단 정비 등 체제정비를 위한 개혁정치를 실현해 나갔다. 551년에는 신라와 함께 고구려를 공격해

70여 년 만에 한성 고토를 회복했다. 그러나 비밀리에 고구려와 동맹을 체결한 신라의 배신으로 한강유역을 다시 신라에게 빼앗기고

백제의 성왕은 관산성 전투에서 신라 매복병에 의해 시해되고 만다.

‘영원한 동맹은 없다’는 진실이 확인되는 대목이다.

백제 비극의 시작은 나제동맹의 결렬에서 오는 배신감과 성왕의 죽음 그리고 비옥했던 땅 한성에 대한 그리움에서

 그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했는지 모른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은

나당 연합군에 의해 패망한 백제는 궁터마저 흔적없이 사라졌다는 일입니다.

이 땅에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올바른 국가관을 가진 위정자와 정치인 그리고 공무원 또한 깨어있는 국민의 주인 의식이 중요합니다.

 

올여름은 유난히 긴 장마와 불볕더위로 한반도가 모두 힘들었습니다.

처서 지났으니 조석 간에는 선선한 바람 불고 낮에는 오곡백과가 여물어야 하니 더울 것이니,

남은 더위도 거뜬하게 넘기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