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牛馬처럼 걷는 경기 여행

(경기) 조선 후기 실학 계보의 으뜸 성호(星湖)기념관

조선 후기 실학 계보의 으뜸 성호(星湖)기념관

 

언제 : 2013년 5월 23일 목요일

어디 :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성호로 131

 

지난 5월 11일 다산 정약용 생가를 방문할 때 실학 박물관에서 성호 이익 선생의 특별전을 보고

다산 정약용의 정신적 스승인

경기도 안산에 있는 성호 기념관을 방문하여 성호 이익의 생애와 발자취를 보았습니다.

 

 

다산 정약용이 쓴 성호 이익에 대한 칭송의 글

 

 

정조께서 화성에 가는 도중 안산에 들러 하룻밤을 자면서 지은 안산에 대한 詩

 

 

 

 

 

당시

청문당에는 만 권의 책이 있었다.

(당시 만 권의 책이 있던 곳은 전국 4군데 중 안산에 2군데, 한양과 진천에 있었다함)

 

 

 당시 청문당  현판

 

 

 

 

 

 

 

 

 

 

 

 

 

 

 

 

 

 

 

 

성호 이익의 친필(親筆) 

 

 

 

 

 

 

 

 

 

 

 

 

성호사설(星湖僿設)

성호 이익이 평소의 체험을 통해 파악한 학문과 사물의 이치를 논한 것과 제자들의 질문에

응답한 내용을 모아 엮은 백과사전적 유서(類書)이다.

천지문(天地門), 만물문(萬物門), 인사문(人事門), 경사문(經史門), 시문문(詩文門)의 다섯 부문으로

나누어져 총 3007개 항목이 기술되어 있다.

 

 

'이하진 천금물전' 星湖의 부친인 이하진의 친필 가훈(보물 제1673호)  

 

 

성호선생 사당과 재실 현판

 

 

 

 

 

 

 

 

 

성호의 주요  제자들

이가환, 횽유한, 권철신, 신후담, 남하행, 이용유, 안정복, 이병휴, 윤동규 

 

 

 

 

 

 

 

 

정약용 여유당전서

 

 

 

 

 

 

 

 

 

 

 

 

 

 

 

 

 

 

 

 

 

성호 이익의 생애(生涯) 

 

조선 후기 실학의 대가로 알려진 이익(1681~1763)선생은 字는 자신(子新)이요, 號는 성호(星湖)이다.

성호는 첫돌이 되기 전 부친의 유배지에서 천리 길을 여행하여 안산으로 오게 되었다. 어려서부터 병약하여

10세가 되어 학문에 뜻을 두고 중형인 섬계(剡溪) 이잠(李潛)을 스승으로 삼았다.

 

 성호는 성품이 매우 효성스러웠으며 검소하였다.

  그의 근검절약하는 정신은 평생 이어져 가족들과 친척들에게 사치한 생활을 못하도록 엄하게

 가르쳤고 돈이나 물건을 꿔주거나 빌리지 못하게 하며 예절을 지키도록 가르쳤다.

 

성호가 26세 되던 해에 둘째 형 이잠이 화를 입게 되자 이 사건을 계기로

 과거에 응할 뜻을 버리고 평생을 안산 첨성리(安山 瞻星里) 성호장(星湖莊)에서 재야의 선비로 은거하였다.

35세(1715) 떼 모친을 여의고

노비와 집기를 모두 종가로 돌려보냈으나 형제 일가에 대한 사랑이 지극하여 실제로는 일가의 지주가 되었다.

 

47세 되던 해에 조정에서 그의 명성을 듣고 선공감가감역(繕工監假監役)을 제수 했으나 응하지 않고

83세 되던 1763년에 조정에서는 원로 우대의 관례에 따라 그에게 첨지중추부사로서 승자(陞資)의 은전을

베풀었으나 그해 12월17일 오랜 병고 끝에 세상을 떠났다.

 

유해는 선영이 있는 첨성리(안산시 일동)에

안장되었다. 시호는 문헌(文獻)이고, 성호의 묘역은 경기도 지방 문화재 제40호로 지정되었다.

 

 

성호 기념관 길 건너 야산에 이익선생의 사당과 재실 그리고 묘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