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牛馬처럼 걷는 경기 여행

(경기) 팔당호반의 다산(茶山) 유적지를 찾아서

 

팔당호반의 다산(茶山) 정약용 생가 여유당

 

 

 

언제 : 2013년 5월 11일 토요일

어디 :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마현마을

 

조선 후기

 실학을 집대성한 다산 정약용 생가인 여유당과 실학박물관을 방문하기 위해

용산역에서

용문행 전철을 타고 운길산역에 내려 다산 유적지 가는 버스를 타고 약 10여 분 후

 다산 유적지에 도착합니다.

 

다산 유적지는

 멀리 예봉산과 운길산이 있고 앞으로는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의 다소곳한 평지에

그의 기념관, 문화관, 사당, 생가와 묘 그리고 실학박물관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다산 유적지 입구에는 다산이 저술한 약 500여권에 이르는 서책과 그 속에서 꺼지지 않는 불꽃으로 타오르는

실학사상의 정신을 조형물로 형상화 하였고, 뒤 건물은 다산 문화관입니다.

 

 

다산 정약용에 대하여

 

다산의 자(字)는 미용(美鏞), 호(號)는 사암(俟菴), 당호(堂號)는 여유(與猶)

부친 정재원은 음직으로 진주목사까지 지냈고, 모친인 숙인 해남윤씨는 윤선도의 후손인 공제 윤두서의 손녀로

영조 38년(1762년) 6월 16일 열수(한강의 별칭)가의 마현리에서 다산 선생을 낳았다.

15세 때 풍산홍씨와 장가를 들었고 홍씨는 무인 출신으로 승지와 절도사를 지낸 홍보화의 딸이었다. 

16세 때(정조 1년 1777년) 성호 이익 선생의 유저(遺著)를 처음 보고 감명을 받았다.

사돈이던 이벽과 매형이었던 이승훈을 통해 서양서적을 접하면서 새로운 과학지식을 받아들이게 된다.

이렇게 실학(實學)과 서학(西學)의 분위기에서 성장했다.

 

 

 

22세 때(정조 7년 1783년) 소과에 합격해 생원이 됐다. 이어 성균관에 입학해 공부만 하면서

그 유명한 ‘중용에 관한 문답’으로 정조대왕의 인정을 받았으며 28세(정조 13년 1789년)에 문과에 급제해 벼슬길에 오른다.

이 때부터 임금의 총애를 한 몸에 받으며 성장해 간다. 문과에 합격한 그해 한강 배다리를 설치했으며,

31세 때 수원 화성을 설계했다. 현재 수원화성은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록돼 있다.

 

 

다산 문학관의 정조의 어가행렬도

 

 

정조 14년(1790) 다산은 예문관 검열로 발탁됐는데 노론이 반대하자 그 직을 사양했다.

이로 인해 왕명을 어겼다는 이유로 충청도 해미에서 10일간 유배생활을 한다. 34세 때(정조 19년 1795년)는 중국인

주문모 신부의 밀입국 사건의 여파로 정3품 통정대부에서 종6품 금정찰방으로 좌천됐고, 36세 때(정조 21년 1797년)는 6월

동부승지를 제수 받았으나 젊은 날 서학을 받아들일 것을 반성하는 사직상소문을 올리자 곡산부사라는 외직으로 가게 됐다.

이렇게 다산은 유배, 좌천, 근신을 거듭하면서 은연자중하며 지냈고,

끝내 형조참의를 사직하고 1800년 봄 처자를 데리고 낙향해 당호를 ‘여유당’이라 짓고 은둔생활에 들어간다.

 

 

목민심서 - 지역이나 지방 목민관들의 행동 양식을 담은 책

 

 

경세유표 - 국가 전반적인 통치기구에 대한 근본적 개현 안을 담은 책

 

 

흠흠신서 - 형사사건을 다루는 관리를 계몽하기 위해 쓴 책

 

 

다산 문화의 거리

 

 

거중기

 

 

다산의 像 뒤로 보이는 길은 다산의 묘소 올라가는 길과 다산의 생가인 여유당

 

 

다산의 사당 - 문도사

 

 

다산(1762~1836)과 부인 풍산홍씨(1761~1838) 합장묘

(경기도기념물 제7호)

 

 묘는 둘레담으로 곡장처리가 돼 있는데 당시 곡장처리는 왕과 왕비만이 할 수 있지만,

시대가 변하면서 남양주시에서 다산 묘 둘레에 곡장처리를 했다. 

 
묘비에는 ‘숙부인 풍산 홍씨 문도공 다산 정약용 선생 지묘’라고 써 있는데 남편이 영의정을 하면 정경부인이며

장관을 하면 정부인, 정약용은 오늘날 청와대 비서관급인 정삼품여서 숙부인이라고 한다.

관직이 없는 뭇 백성이 죽으면 신위나 유인을 앞에 붙인다.


 

 

 

 

 

언덕에서 내려다 본 여유당은 1925년 을축년 대홍수로 유실돼 1986년 복원했다.

 

 

묘소에서 바라본 팔당호 풍경

 

 

여유당 

 

 

당호(堂號)인 여유(與猶)는 1800년(정조 24년) 봄 모든 관직을 버리고 가족과 고향으로 돌아와 지었는데,

여유당(與猶堂)은 '노자의 도덕경' 한 구절로

 ‘여(與) 여! 겨울의 냇물을 건너는 듯하고, 유(猶) 여! 사방을 두려워하는 듯 하거라’라는

무릇 겨울에 내(냇가)를 건너는 사람은 차가움이 파고들어와 뼈를 깎는 듯 할 터이니 몹시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하지 않을 것이며, 온 사방이 두려운 사람은 자기를 감시하는 눈길이 몸에 닿을 것이니

 참으로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하지 않을 것이다.” 
 즉. 겨울 냇물을 건너는듯 조심해서 세상을 살아가자는 의미

 

 

자신의 회갑을 맞아 자서전적 기록인 '자찬묘지명(자찬묘지명)'을 저술하였고, 유배지 등에서 집필한 500여권의 저서를

정리하여 '여유당전서(여유당전서)'를 이곳에서 편찬하였다.

 

 

다산 정약용은 1762년 마재마을에서 태어나 15년을 살았고,

한양에서 관직생활(1783~1800)과

정조가 돌아가신 후인 1801년(순조 1) 강진으로 유배되어 18년만에 돌아와(1801~1818)

 이곳에서 18년 동안 살며 평생을 마무리하였다(1836).

 

 

여유당 안채

 

 

다산 기념관

 

 

 

 

 

 

 

 

 

 

 

형조참의로 있던 1799년(정조 23년) 다산에 대한 노론의 공격이 극에 달했다.

그해 정약용을 비롯한 남인의 정치적 스승이었고, 정조의 충직한 신하였던 번암 채제공이 돌아 가신 해이기도 하다.

이 무렵 정조는 정약용 선생을 무한히 신뢰하고 있었다. 밤늦게 까지 대화를 나누는 것이 흔한 일이 됐다.

그래서 선생이 판서가 되고 재상이 된 것은 시간문제였다. 노론 벽파는 선생을 제거하려했으나 방법이 없었다.

선생은 1797년 동부승지를 사직하는 상소에서 천주교와의 관계를 모두 고백했고,

그 뒤 고산부사로 임명돼 외직으로 나가 선정을 베풀고 돌아온 터였다. 이에 노론은 교활하게도 형 ‘정약전’을 공격해 관직에서

물러나게 했는데,  가족이 물러나면 벼슬자리에 있는 다른 가족도 사직하는 것이 관례였다.

 다산은 분노했고, 세상이 혐오스러웠다. 벼슬을 그만두기로 결심한 다산은 자명소를 울려 관직을 그만두기를 청한다.

정조는 계속 만류했지만 계속 거부하자 정조는 그해 7월 26일 허락하게 된다. 그리고 다음 해인 1800년(정조 24년) 봄에

 가족을 데리고 고향 마현리로 내려와 집의 문미에 ‘여유당’이란 현판을 붙이고 은신에 들어간다.

그해 6월 12일 달밤에 정조의 유시를 전하려 규장각 아전이 한서선 10질을 가지고 찾아왔다.

“5질은 남겨서 가전의 물건으로 삼도록 하고, 나머지 5질은 제목의 글씨를 써서 돌려보내도록 하라. 그리고 그대를 부르리라.”

다산은 가슴이 벅차 눈물을 흘리며 노론 틈에 정조를 홀로 남겨놓고 온 것이 비겁하다는 생각이 들어

 돌아가기로 마음먹는다. 그러나 6월 28일 정조는 노론에 둘러싸여 의문의 죽음을 맞게 된다.

  

 

배다리

정조 13년(1789) 양주 매봉산에 있던 사도세자의 묘소를 수원으로 옮길 때

다산의 고증에 의해 뚝섬에 배다리를 놓았는데

강의 가운데 부분에 가장 큰 배를 배치하고 양쪽으로 갈수록 조금씩 작은 배를 배열하여

전체적으로 완만한 무지개 모양을 이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