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牛馬처럼 걷는 서울 여행

(서울) 만해 한용운 심우장(尋牛莊)

 

만해 한용운 심우장

萬海 韓龍雲 尋牛莊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7호

 

 

언제 : 2013년 3월 21일 목요일

어디 : 서울 성북구 성북동 222-1

 

서울 성북동은 우리나라 부자촌으로 유명한 북악산 줄기의 남향 동네입니다.

그러나

부자촌 맞은편은 지형이 북향으로

서울에도 이런 동네가 있나 할 정도로 척박한 산동네인데 그 동네에 만해 한용운님의 심우장이 있습니다. 

 

 

지하철 4호선 한성대 입구에서

간송 미술관을 지나 약 5분 정도 걸어가면 좌측에 심우장 안내판이 있습니다.

 

 

복종 

                                                              한 용 운

 

남들은 자유를 사랑한다지마는, 나는 복종을 좋아하여요.

자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당신에게는 복종만 하고 싶어요.

복종하고 싶은데 복종하는 것은 아름다운 자유보다도 달콤합니다.

그것이 나의 행복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나더러 다른 사람을 복종하라면,

그것만은 복종할 수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복종하려면 당신에게 복종할 수 없는 까닭입니다.

 

 

도로에서 좌측 언덕 심우장 올라가는 길은 멋들어지게 나무 계단입니다.

 

 

골목으로 들어서면 슬레이트 지붕과 블록 담의 좁은 골목길입니다.

 

 

저 골목 끝큰 소나무와 향나무가 골목을 바라보고 있는 곳이 심우장입니다.

 

 

심우장의 내력

 

'심우'는 선(선)수행의 단계를 소와 목부(목부)에 비유하여 열 폭의 그림으로 그린

심우도(심우도)의 첫 번째 그림으로 소를 찾는 동자가 산 속을 헤메는 모습을 초발심의 단계에 비유한 내용으로

한용운의 아호 중에는 '목부'가 있는데, 이는 소를 키운다는 뜻을 가졌답니다.

 

성북동은 성(성)밖 마을 북장골로서 송림이 우거진 한적한 동네였습니다. 이 터는 원래 만해 선사를 따르던 안국동 선학원의

벽산 김적음 스님께서 초당을 지으려고 북장골 송림중에 52평을 마련하였답니다.

적음 스님은 만해 선사의 만년을 위하여 내어드린 것이 발전하여 심우장을 짓게된 동기로, 후학 동지들도 나중에

협찬을 하여 후일 52평의 땅도 더 보태게 되어 지금의 약 100여평의 땅에 심우장을 짓게 되었습니다.

 

조선총독부 청사를 마주보기 싫어 북향집이 되었다는 일화를 간직한 집으로

심우장은 현재 서울시 기념물 제7호(1984.7.5)로 지정되었습니다.

 

 

심우장은

만해께서 1933년부터 1944년까지 만년(晩年)을 보내다가 세상을 떠난 곳으로,

건물 형태는

정면 4칸, 측면 2칸의 역(역)'ㄴ'자형 평면이며, 중앙에 대청 2칸을 두고

왼쪽에는 서재롤 쓴 '심우장' 온돌방 1칸, 오른쪽은 부엌 1칸이 있으며, 부엌에서 남쪽으로 껶여 나간 곳에

찬마루 1칸이 있습니다.

 

 

 심우장 기념판

 

 

 

 

 

심우장은

대지 374㎡에 건축면적 52㎡로 대문에 들어서면 좌측에 한옥으로 지은 북향 심우장 있고,

대문 맞은편은 벽돌조 단층인 관리인 주택이 있습니다.

대문 왼쪽에는 소나무, 오른쪽은 은행나무가 서 있고, 마당 오른쪽 모서리에는 만해께서 손수 심으신

향나무가 한 그루 서 있습니다.

 

 

편액 심우장(尋牛莊) 글씨는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의 전자체(篆字體)

 

 

심우장= 온돌방으로 서재

 

 

만해 초상화와 像

 

 한용운은 1879년 8월 29일 충남 홍성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정옥(貞玉), 법명은 용운(龍雲) 호는 만해(萬海) 이다.

한용운은 1919년 승려 백용성 등과 함께 불교계를 대표하여 독립선언 발기인 33인중의 한분으로 참가하여

 3.1독립선언문의 공약삼장을 집필한 분으로 유명하다.

 

공약삼장(公約三章)

하나, 오늘 우리들의 이 거사는 정의 인도 생존을 위한 겨레의 요구다. 오직 자유의 정신을 발휘할 것이요

결코 배타적 감정으로 치닫지 말라.

하나, 마지막 한 사람에 이르기까지 마지막 한 순간에 다다를 때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시원스럽게 발표하라.

하나, 모든 행동은 가장 질서를 존중하여 우리들의 주장과 태도를 어디까지나

떳떳하고 정당하게 하라.

 

 

남국의 국화꽃 채 피지 않고

강호에 노는 꿈이 누대에 머물렀네

기러기 그림자가 산하에 인간의 형상처럼 비추고

가이 없는 가을나무 사이로 달이 뜨네

 

 

양 언덕이 고요하여 일마다 한가하네

은자가 자연에 도취되어 쉽게 돌아가지 못하는구나

산사에 미풍일고 해는 트는 듯 한데

헤일 수 없는 짙은 가을향기 선의를 때리누나

 

 

대청은 전시관입니다.

 

 

전대법륜

'진리의 큰 수레바퀴는 쉬임없이 변화한다.'라는 우주의 진리관을 말함.

 

 

마저절위

절구공이를 갈아 바늘을 만들었다.라는 고사로, 쉬지말고 계속 정진하라는 의미로 만해의 친필 서각이랍니다.

 

 

1917년 12월 3일 밤 오세암에서 좌선 중(39세)에 의심하던 마음이 씻은 듯 풀려 시 한수를 지었다.

 

만해의 오도송

 

사나이 가는 곳은 어디나 고향인 것을, 그 몇 사람 나그네 근심 잦단 말을 일런는가

한 마디 큰소리 질러 삼천 세계 뒤흔드니, 눈 속의 복숭아 꽃 붉게 붉게 피네

 

 

 

 

 

만해 한시집(漢詩集)

 

 

심우장 부엌과 찬마루(사진: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하는 장면)

 

 

심우장 마루

 

 

심우장 후면의 툇마루와 굴뚝  

 

 

성북구의 아름다운 향나무(수령 80년-만해께서 손수 심으신 향나무) 

 

 

심우장 입구에 서 있는 성북구의 아름다운 소나무(수령 90년) 

 

 

심우장 유리창의 雨村

 

 

 

03번 마을버스 종점에서 심우장 내려가는 길로 멀리 맞은편은 성북동 남향의 부촌

 

 

요즘 건강이 좋지 않아 서울 중앙대 병원에 진료를 끝내고

지하철 4호선을 이용하여 한성대 입구에서 다시 마을버스 03을 타고 종점에서 내려

심우장을 찾아갑니다.

 

성북동 하면 우리나라에서 부촌으로 유명한데 그 맞은편은

아직도

서울에 이런 산동네가 있음에 솔직히 놀랐는데, 그 북향 산동네에 심우장은 있었습니다.

  

 

심우장 전경과 관리인 주택

만해께서 1933년부터 1944년까지 만년(晩年)을 보내시다가 세상을 떠난 곳입니다.

약 1시간을 머뭇거렸는데도 아무도 찾아오는 이 없는 심우장이었습니다.

하기야,

누가 평일에 일하지 않고 오겠습니까만.